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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행 ] 일하다 냉커피 한잔, 해 지면 골뱅이로 하루를 마감하던 그 시절 을지로 유람

우주선도 만든다던
그 거리, 그 사람들

by한겨레

우주선도 만든다던 그 거리, 그 사람

“내 얼굴도 찍어줘. 장인을 딱 발견한 느낌으로다가 흑백으로 찍어줘. 인화도 좀 해줘.”

 

“나는 우리 집 상호를 크게 나오게 찍고 기억해줘. 다시 오면 냉커피 한잔 대접할게.”

 

좁은 골목에서 방향을 찾느라 지도를 펴들 때마다 을지로 골목 어르신들이 그림자처럼 나타났다. 천장 낮은 집에서 웅크리고 일하다가도 고개를 들고 이방인을 구경했다. 2014년형 디지털카메라를 들고 2016년형 나이키 운동화를 신은 것만으로 나는 과거를 여행 중인 미래인 같았다. 한국전쟁 이후 60년. 그 시간의 흔적이 쇳가루처럼 묻어나는 을지로 골목길은 바깥세상과 또 다른 속도로 가느다란 맥박을 이어가고 있었다.

못할 것 없던 산업화 시대, 그 거리 그 사람들

을지문덕 장군의 성에서 따온 ‘을지로’는 광복 후 얻은 지명이다. 을지로 일대에 조성된 ‘산업 특화거리’도 한국전쟁 이후 무너진 도시를 재건하던 무렵 탄력을 받고 호황을 누렸다. 1970년대 을지로 일대가 전성기를 누릴 무렵, 지금은 쇠락한 작은 공업사와 철공소 같은 제조업체들이 이곳에 자리를 잡았다. 지금은 산업 구조의 변화로 퇴락한 거리를 젊은 예술가들이 새로운 거리로 만들고 있다.

 

최근 중구에서 이러한 을지로의 역사를 이야기로 묶어 ‘을지유람’ 코스로 마련했다. 을지로3가역에서 시작해 을지로 입구를 거쳐 다시 을지로 4가로 이어지는 을지유람 길은 특화거리, 맛집, 공방 등을 품어 오래된 도시의 한 부분을 공들여 보여준다. 지도 한 장 들고 발길 따라 골목을 누비면 걷는 맛이 몸속 가득 피어오른다. 다방과 시보리. 설렁탕 한 그릇. 잊어버린 서울의 시간을 그 시절 그 사람들이 여전히 살고 있다.

길마다 소리가 다르고, 골목마다 냄새가 다르다.

을지로 일대에는 타일·도기 특화거리, 공구 특화거리, 조명 특화거리, 가구 특화거리, 미싱 특화거리, 산림동 조각 특화거리가 자연스럽게 터 잡았다. 특히 산림동 등지에서 ‘시보리’와 ‘로구로’를 하는 어르신들은 적어도 30년 이상 이 골목에서 밥을 먹었다. 쿠릉쿠릉 움직이는 기계 소음 속에서 단련된 근육은 우직하게 움직인다.

 

골목 깊은 곳마다 모 굵은 붓으로 휘갈긴 간판은 꼭 흑백텔레비전 시대 세트장 같다. ‘못 만드는 게 없던’ 을지로의 황금기. 이제 그 동력은 한풀 죽었지만 ‘요즘에도 대학 다니는 공대생들이 와서 모르는 걸 묻는다’며 ‘옛날에는 도면만 있으면 땅크까지 만들었다’는 검증 못할 자랑이 넘나든다. 옆 골목에서는 ‘거기서 탱크 만들 때 나는 우주선 만들었다’고 한술 더 떴다.

 

세운·대림·청계상가

1968년 건축가 김수근이 설계한 한국 최초 주상복합단지. 80년대까지 한국의 전자기술과 서울을 대표하는 문화 장소 중 하나였다. 시대에 밀려 주춤했다가 최근에는 서울시의 도심재생 프로젝트 ‘다시 세운’으로 젊은이들이 입주하고 있다. 을지로 일대를 바꾸는 다양한 실험도 전개한다. 위층에서 내려다보는 중정이 고즈넉하다. 매점에서 간단한 마실 거리도 판다. (중구 산림동 / 02-2278-5191)

 

송림수제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수제화 업체다. ‘서울미래유산’으로도 지정되었다. 1936년 개업 후 한국 유명 등산가들의 등산화를 만들어왔다. 4대에 걸쳐 내려온 기술에 대한 자부심이 높다. (중구 수표로 60-1 / 02-2279-1910)

 

타일·도기 특화거리

지나가는 길목이라면 유심히 쳐다보자. 변기 모양의 의자는 욕실 집기들을 오랫동안 제작해온 타일·도기 특화거리를 상징한다. ‘을지유람’ 산책 지도도 몇 부 챙길 수 있다. (을지로3가역 2번 출구 일대)

 

국도극장 터

1936년 개관한 국도극장은 한국영화 80년 역사를 함께해왔다. 광복 이후 '미워도 다시 한 번' 등을 상영했으며, 1999년 철거되어 현재 ‘베스트웨스턴 국도호텔’로 쓰인다. 지금의 복합상영관이 있기 전 서울에 몇 안 되는 개봉관으로, 유명한 영화는 길게 줄을 서서 봐야 했다. (중구 을지로 164)

  1. 시보리: ‘눌러 짠다’는 뜻의 일본말. 원형 금속판을 선반 틀에 고정시켜 고속 회전하며 눌러 모양을 만드는 과정
  2. 로구로: ‘녹로’의 일본식 발음. 재료를 축에 붙인 뒤 회전시켜 성형이나 표면을 가공하는 방법. 물레, 선반이라고도 한다.
우주선도 만든다던 그 거리, 그 사람

‘을지로 먹방투어’ 설렁탕 한 그릇에 군만두 디저트, 쌍화차 한 잔

을지로 일대는 집 건너 집이 대부분 맛집이다. 옛 다방의 모습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는 곳도 을지로다. 평양식 냉면으로 소문난 ‘을지냉면’에서 물냉면 한 그릇을 먼저 흡입하고, ‘을지다방’에서 쌍화차 한 잔을 주문해 앉았다. 지도를 펴 본격적인 맛집 순례의 경로를 잡아본다. 옆 테이블에서는 육십오 세 후배들을 둔 칠십오 세 선배가 ‘사람이 되라’며 조곤조곤 나무라고 있다. 육십이 넘어도 사람이 되기 힘든 이 현실이라니 마음이 무거워진다.

 

을지다방

사장님은 30년째 쌍화차를 끓여온 쌍화차의 달인이다. 노른자도 예쁘게 띄운다. 계란 맛이 비릴 것 같지만, 비린 건 흰자지 노른자는 절대 아니라는 사실도 배울 수 있다. 뜨겁고, 달고, 맛있다. (중구 충무로 72-1/ 02-2272-1886)

 

오구반점

을지로 3가 5-9번지에서 문을 열어 ‘오구’ 반점이다. 사장님은 아들 이름도 ‘오구’라고 지었다. 1953년부터 대를 이은 맛에 인근 직장인들 회식장소로 유명하다. 속 꽉 찬 군만두가 가장 인기 있다. (중구 수표로 60 / 02-2267-0516)

 

원조녹두

오랜 점포 집의 향수가 그대로 남아 있는 이곳은 주변 상인들이 먼저 줄 서서 먹곤 했다고 한다. 손 두툼한 할머니가 열다섯 종류의 전을 골고루 만들고 포장도 해준다. 오후 4시부터 문을 연다. (중구 을지로11길 26-2 / 02-2277-0241)

 

이남장

옛 시절 먹던 그 맛 그대로, 한 그릇 푸짐한 설렁탕을 찾는다면 제격인 집이다. 70년대 개업 후 현재까지 설렁탕 메뉴 하나로 수많은 단골을 만들었다. 새벽부터 밤늦도록 영업한다. (중구 삼일대로 12길 16 / 02-2267-4081)

 

커피한약방

을지로 데이트족이라면 챙겨둬야 하는 골목 안 숨은 카페. 어스름 저녁마다 빛을 발하는 예스러운 공간을 원두 향이 은은하게 채운다. ‘필터 커피’는 물론 모든 메뉴가 두루두루 괜찮다. (중구 삼일대로 12길 16-6/ 070-4148-4242)

젊은 예술가들의 공방 탐색, 산림동 조각거리

을지로4가역 즐비한 공업사와 철공소 간판 사이로 난 좁은 골목길이 산림동 조각거리다. 김기덕 감독의 '피에타' 촬영지이기도 했다. 끝없이 이어진 듯한 골목은 초입부터 낯설지만, 발걸음을 빨아들이는 묘한 힘을 갖고 있다.

 

산림동 빈집에 젊은 예술가들이 입주한 것은 최근의 일인데, 중구에서 주관하는 을지로 재생사업 덕이다. 사람 하나 간신히 지나가는 좁은 골목에 현재 8팀이 들어왔다. 문화공간 R3028의 스태프들은 다양한 장르의 예술로 관객과 만나는 소통의 장을 꾸렸고, 김선우 작가는 알록달록한 새를 캔버스에 그리며 도심을 비행한다. 이현지 작가는 ‘을지로 기록관’을 세워 역사가 숨 쉬는 을지로 일대를 사진과 글로 기억하고 있다. (을지로4가역 2, 3번 출구)

을지로 미생들의 위안, 노가리 골목과 골뱅이 골목

쿵덕쿵덕 뭔가를 찍어내는 소리 따라 다른 길로 들어서면, 난생처음 본 ‘노가리’ 찍는 기계다. 수북이 쌓인 빳빳한 노가리들은 쇠공에 쿵쿵 씹히면서 다소곳해졌다. 기계 소음이 사라지는 밤이면 을지로 넥타이부대가 몰려온다. 주인은 묻지도 않고 차가운 생맥주 한 잔에 노가리 한 접시를 잽싸게 대령한다. 벌건 살갗으로 목청 틔우는 직장인들을 구경하면, 질겅질겅 씹혀 나가는 게 노가리뿐만은 아닌 것 같다. 건배사는 풍요롭고, 오늘의 기억은 내일로 닿는다.

 

노가리 골목

‘만선, 초원, 마부, 뮌헨’ 등 오종종한 맥줏집들이 무리 지어 몰려 있다. 저렴한 안줏값도 고마운데 밤늦도록 골목을 밝히는 덕에, 주머니 가벼운 을지로 ‘미생’들의 유구한 안식처가 되고 있다. (을지로3가역 3, 4번 출구)

 

골뱅이 골목

60년대 말 구멍가게에서 깡통 골뱅이를 술안주로 먹기 시작한 데서 ‘골뱅이 골목’이란 이름이 유래했다. 파채와 다진 마늘과 고춧가루로 투박하게 버무려 맵싸한 맛이 나고, 대구포가 담백한 맛을 채워 준다. 부드러운 달걀말이까지 더하면 비로소 하루의 마감을 실감하게 된다. (을지로3가역 11, 12번 출구)

‘을지유람’ 해설사 투어 안내

  1. 투어 운영: 상시 운영, 매일 오후 3시 을지로3가역에서 출발. (일요일 제외)
  2. 투어 문의: 중구청 시장경제과 02-3396-5085 / www.junggu.seoul.kr
  3. 이틀 전까지 예약 필수이며 4인 이상일 때 출발함. 단체 예약 가능.

글·사진 전현주 문화창작자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