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 살 소녀의 성정체성 질문, 시공 초월한 따뜻한 서스펜스

[컬처]by 한겨레

톰보이


화제작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셀린 시아마 감독의 초기작 개봉

웃통 벗고 여성용 수영복 자르는

남자 같은 여자애 ‘톰보이’ 로레

성별·이름 ‘속이고’ 새 친구 만나

그 애가 끌리는 여자아이 리사

로레는 정말 리사를 속인 걸까

‘정체’에 대해선 거짓말했어도

‘정체성’은 진실한 것 아닌가

한겨레

<톰보이> 는 ‘여름방학 기간 중 파리 교외로 새로 이사 가게 된 열살짜리 소녀 로레(조에 에랑)가 자신을 ‘미카엘’이라는 이름의 남자아이로 소개하고, 남자아이로 행동하면서 벌어지는 일들’이라는 설정에서 출발한다. 인터넷 영화 데이터베이스(IMDb)

영화는 나지막한 엔진 소리, 그리고 차 지붕 위로 몸을 한껏 내민 아이의 뒷모습으로 시작된다. 반팔 옷을 입은 아이의 머리 위로 우거진 가로수의 녹색이 빠른 붓질처럼 지나친다. 나뭇잎을 뚫고 들어온 햇빛이 화살처럼 떨어져 내린다. 한마디로 여름이다.


곧이어 우리는 눈을 감고 손바닥을 벌린 채 여름과 바람을 느끼는 한 주근깨 많은 소년의 얼굴을 본다. 아참, 가만. 그런데 이 영화의 제목은 <톰보이>, 즉 ‘남자애 같은 여자아이’가 아니었던가? 답이라도 하듯 암전된 화면 위로 타이틀이 뜬다. 처음엔 파란색, 다음엔 빨간색, 그리고 두 색이 한 알파벳씩 교대로.


이 도입부는 <톰보이>의 기본 설정을 요약하고 있다. 즉 ‘여름방학 기간 중 파리 교외로 새로 이사 가게 된 열살짜리 소녀 로레(조에 에랑)가 동네에서 만난 리사(잔 디송)라는 또래의 소녀에게 자신을 ‘미카엘’이라는 이름의 남자아이로 소개하고 남자아이로 행동하면서 벌어지는 일들’이라는. 그렇다. 가까운 예로서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에서도 그랬지만, 여름방학은 소녀소년들의 마음에 많은 일이 일어나는 시간이다. 그리고 그 특수한 시간이 남긴 기억은 선명하고 길다. 어쩌면 실제보다도 더.

성 정체성 혼란 감싸는 ‘부드러운 온도’

만약 <톰보이>라는 제목이 없었다면 주인공이 여자아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 자체가 스포일러가 되었을지도 모를 만큼 로레 역의 조에 에랑은 생김새부터 목소리까지 영락없는 남자아이다. 더구나 영화 초반에는 ‘미카엘’이라는 가짜 이름만 등장하고, ‘로레’라는 진짜 이름은 한참 뒤 영화 중반쯤이 되어서야 나온다. 하지만 이것은, 예컨대 <크라잉 게임>에서 ‘딜’의 성별이 드러났을 때와 같은 충격효과를 노린 은폐 같은 것은 아니다. 톰보이라는 제목을 빼고 생각하더라도, 로레의 성별에 대한 팩트는 영화 전반의 목욕 장면에서 일말의 모호함도 없이 확실하게 관객에게 제공되고 있다.


그러니까 <톰보이>가 만들어내려고 하는 것은 반전이 아니라 서스펜스다. 데이비드 린치나 스티븐 스필버그 같은 감독들의 영화에 영향을 받았다고 밝히는 셀린 시아마 감독(익히 잘 아시듯, 작년 최고의 화제작 중 하나였던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의 각본 겸 감독)의 초기작 <톰보이>는 확실히 서스펜스물이다.


서스펜스가 대개 그렇듯 <톰보이>의 서스펜스는 발각에 대한 두려움에서 온다. 새로 이사를 와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없는 동네에서 ‘로레’는 ‘미카엘’이 된다. 방학은 언젠가 끝날 것이고, 그녀가 ‘미카엘’이 아니라 ‘로레’라는 것이 드러날 것은 시간문제다. 그럼에도 서스펜스는 사라지지 않는다. 로레의 거짓말은 이웃집 소녀 리사를 만나는 순간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다른 남자아이들과는 다른’ 미카엘에게 끌리는 리사. 소녀는 그가 남자아이 미카엘이 아닌 여자아이 로레라는 것을 결국 알게 될 것인가? 그렇게 리사가 로레의 거짓말을 알게 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가?


그런데 가만, 로레는 정말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인가? 물론 이름과 성별을 속이긴 했지만, 그는 리사를 좋아하고, 그것도 이성의 감정으로 좋아하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로레/미카엘은 ‘정체’에 대해서는 거짓말을 했어도, ‘정체성’에 대해서는 오히려 진실한 것이 아닌가? 등등, 아직 자신의 성향을 알고 있지만 그에 대해서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이것은 감독이 자신의 어린 시절을 회상하며 했던 언급이기도 하다) 열살 로레는, 지금까지 수많은 영화들이 성 정체성을 둘러싸고 던져온 익숙한 질문들을 익숙하지 않은 각도로, 그러나 훨씬 친숙하고 부드러운 온도로 바라보게 한다.


정중동이라는 단어의 정의 그 자체인 듯, 절정의 순간까지 감정의 종이 한장 한장씩을 쌓아 올리는 <타오르는…>의 무섭도록 절제된 리듬을 경험하신 독자께서는 이미 짐작하시겠지만, <톰보이>는 이 서스펜스와 그것이 불러내는 질문들을 야단스럽게 강조하거나 앞서가며 들이밀지 않는다. 영화는 로레/미카엘 앞에 모든 열살 아이들이 하거나 겪을 법한 흔하디흔한 일들(물론 그 일상은 사교육 지옥과 아파트 협곡에서 살아가야 하는 한국 아이들의 일상과는 사뭇 다르지만), 즉 치기놀이, 동네축구, 진실게임, 카드게임, 물놀이 등등을 던져놓는다.


여자아이임을 들키지 않고 해나가야 하기 때문에 폭탄 뇌관처럼 아슬아슬해져 버린 이 일상 앞에서 로레는 위축되지 않는다. 로레가 움찔 식은땀을 흘리는 것은, 아이들과의 축구 도중에 근처 숲에 앉아서 소변을 보는 걸 들킬 뻔했을 때 정도다.


오히려 로레는 ‘남자아이 전용 행동’인 축구 도중 웃통을 벗고 침을 뱉는 것 같은 행동을 신나게 즐긴다. 심지어 삼각 수영복 하나만 덜렁 걸쳐야 하는 물놀이라는 절체절명의 위기에서도, 여성용 수영복을 잘라 수영복을 디아이와이(DIY)하고, 리얼리티 확보를 위해서 그 미덥지 않은 수영복 안에 넣을 뭔가를 만들고, 격한 물놀이의 와중에도 무사히 제자리를 지켜준 그 ‘뭔가’를 보물상자에 소중하게 넣어둔다. 그것은 “이 영화를 보는 사람들 모두 ‘이건 요즘 아이들의 이야기이지만, 내 어린 시절의 얘기이기도 해’라고 하길 원했다”는 감독의 언급 그대로, 우리 모두의 어린 시절과 그 시절에 누구나 하나쯤은 품었을 법한 비밀을 닮아 있다. 덕분에 로레의 ‘거짓말’은 그것을 이해하든 않든, 동의하든 않든, 관객들의 마음을 조마조마하게 한다. 웃음기 어린 안쓰러움과 함께 말이다(로레의 모든 노력은 사랑을 위한 것이기에 사랑스럽고, 빤히 보이는 막다른 곳으로 향하고 있기에 애처롭다).

한겨레

인터넷 영화 데이터베이스(IMDb)

‘레즈비언’도 ‘트랜스젠더’도 아닌 한 사람

바로 이 대목이 <톰보이>의 가장 영리한 점이겠다. 이 영화의 생활 속 서스펜스, 생활 속 모험은 놀랍고 신기한 사연이나 초인적 투쟁담 같은 것 없이도 관객들을 충분히 깊게 끌어들인다. 그렇다. 지켜보게 하는 것, 그리고 지켜보는 것,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것을 이 영화는 잘 알고 있고, 그 영리함이 어떤 모습으로 만개했는지는 이 영화로부터 8년 뒤에 등장한 감독의 2019년 작 <타오르는…>에서 목격된 바와 같다.


그러고 보니 좀 얘기가 늦은 것 같은데, 이 영화는 2011년에 공개된 영화다. 그러니까 이 영화의 2020년 개봉은 거의 재개봉에 가까운 형국이라 할 것인데, 그럼에도 이 영화의 개봉은 크게 때늦어 보이지는 않는다.


그 이유는 물론 이 영화가, 얼마 전 그녀의 특별전이 열렸을 정도로 <타오르는…>으로 관심이 자연발화된 셀린 시아마 감독의 초기작(<톰보이>는 그녀의 두번째 장편이다)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이 영화 자체가 9년 정도의 시간은 어렵잖게 뛰어넘는 시류/유행/시대초월스러운(즉 타임리스한) 면모를 갖추고 있다는 점에 있겠다.


매우 사소해 보일 수도 있겠으나, 단적인 예로 이 영화에는 핸드폰이 등장하지 않는다. 물론 이는 주인공 로레가 열살이고 그녀 주위의 세계 역시 또래의 동네 아이들과 동생 잔(말롱 레바나) 같은 어린아이들로 채워져 있으니 당연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 영화의 어른들 역시 핸드폰을 쓰지 않는다. 에스엔에스, 문자는 물론 통화 장면도 없다. 서로 만날 일이 있으면 직접 집의 초인종을 누른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타오르는…>이 철저하게 남성들을 자신의 프레임(이는 물론 단순히 화면 프레임만을 얘기하는 것은 아니다) 밖으로 밀쳐뒀던 것, 그리고 덕분에 영화의 배경인 브르타뉴의 외딴섬이 원더우먼의 고향 파라다이스섬처럼 여인들만의 섬(또는 세계)으로 변모했던 것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톰보이>에서는 남성 대신 구체적인 시간이 걸러져 있다. 이는 물론 위에서 말했듯 이 영화가 ‘모두의 어린 시절’로 받아들여지길 원했던 감독의 의도 때문인데, 덕분에 영화는 감독 자신의 성장기였던 1990년대와 이 영화가 공개된 2011년뿐 아니라, 지금 2020년에도 아무 위화감 없이 통하는 이야기가 되었다. 감독은 첫 시대극인 <타오르는…>에 대해 “딱히 과거(18세기-필자 주)로 들어간다는 느낌은 없었다. … 우리는 지금 오늘날에 그 이야기를 하고 있다. 내게 중요한 건 그것이다”라는 말을 했는데, 이는 <톰보이>에도 적용될 수 있는 이야기이겠다.


그런데 이렇게 적다 보니 이 영화의 때늦은 개봉이 유독 시기적절해 보이는 이유 하나가 더 눈에 들어온다.


비단 요즘만의 일은 아니지만, 최근 유독 어떤 단어 아래에 사람들을 퉁 쳐 묶어버리는 라벨 치기가 득세하고 있다. 그 무시무시한 폭력이 그로써 이득을 얻는 사람들에 의해 공공연히 부추겨지고 권장되기까지 하고 있다. 하여 그 라벨 뒤에는, 차 지붕에서 손바닥으로 바람을 가르고, 가로수 틈으로 떨어지는 햇빛을 느끼고, 뭔가를 동경하고, 누군가를 사랑하는 사람이 있음이 너무 간단히 잊히고 있다.


그런 면에서도 로레라는 한 아이, ‘레즈비언’도 ‘게이’도 ‘동성애자’도 ‘트랜스젠더’도 ‘성소수자’도 아닌 한 사람을 드러내고 지켜보도록 만드는 <톰보이> 같은 영화는 시간을 뛰어넘는 현재다.

2020.05.19원문링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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