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깨비 같은 매력, 의령

[여행]by 한겨레

순식간에 짙은 운무 걷히고 ‘도깨비 숲’ 드러나

기암괴석 봉황대엔 세계 최대 동굴 법당

한겨레

지난 22일 새벽 5시40분께 경남 의령군 한우산을 뒤덮은 운무가 걷히고 해가 떴다. 구름 위 바람개비처럼 돌아가는 건 풍력발전기, 길 끝에 서 있는 건 ‘문지기 도깨비’다. 김선식 기자

의령? 정확히 어디 있는지 몰랐다. 지도를 보니 경상남도 내륙 한가운데다. 진주시, 함안군, 합천군, 창녕군에 둘러싸여 있다. 임진왜란 의병장 곽재우와 삼성 창업주 호암 이병철 생가가 의령에 있다. 메밀국수(소바)와 망개떡이 대표 음식이다. 그 의령에 ‘도깨비’가 있다는 말을 들었다. 별 망설임 없이 경남 내륙 한복판으로 떠난 까닭이다. 지난 21, 22일 의령에서 도깨비 같은 매력을 느꼈다. 오싹할 만큼 생경했다.


다섯 달 만에 보는 해돋이였다. ‘지난 연말 함백산에서 본 해맞이처럼 감동적일까?’ 솔직히 말하면 별로 기대하지 않았다. 전날 찍은 사진 중 썩 맘에 드는 사진이 없었을 뿐이다. 지난 22일 의령군 해돋이 예정 시각은 새벽 5시15분께, 예보는 ‘구름 없음’(새벽 6시 기준)이었다. 의령 남쪽 숙소에서 서쪽 한우산까지 차로 20분 거리. 새벽 4시40분 출발해 룰루랄라 콧노래 부르며 차를 몰았다. 정상이 가까워져 오자 5m 앞도 희미했다. 사방이 운무였다. 예보와 달랐다. ‘망했다’고 생각했다. 한우정(정상 근처 정자)도 구름에 포위당했다. 해돋이 시각은 이미 지났고, 해는 미명도 내비치지 않았다. 초조한 시간만 흘렀다. 망연자실, 자포자기한 얼굴로 정자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해가 중천에라도 뜨길 기다렸다.

한겨레

새벽녘 한우산에 깔린 운무. 김선식 기자

운무가 정체를 드러냈다. ‘한우산은 5월에도 겨울 이불을 덮고 있구나.’ 두꺼운 솜이불 같은 구름이 섬세한 결을 뽐냈다. 누군가 이불을 끌어당기는 것처럼 구름이 물러나고 있었다. 구름으로 뒤덮인 숲도 조금씩 얼굴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새벽녘 파란빛 도는 신록이었다. 시들어버린 철쭉만 유난히 붉었다. 가까운 산봉우리에 도깨비 상이 나타났다. ‘도깨비’ 머리 위 구름 속에서 바람개비(풍력발전기)가 돌아갔다. 새벽 5시38분, 드디어 해가 떴다. 하늘은 거짓말처럼 맑아졌다. 단 20여분 만에 벌어진 일이었다. 도깨비가 요술방망이로 바람을 일으켜 구름을 물리친 것 같은 신비로운 광경이었다. 늘 그 자리에 있는 자연도 그렇지만, 순간 기적적인 변신을 해내는 자연은 위안을 준다. 일상도 언제든 그럴 수 있다는 일말의 희망을 품게 한다.

한겨레

한우산 ‘철쭉 도깨비 숲’ 들머리를 지키는 ‘문지기 도깨비’. 김선식 기자

도깨비 같은 한우산에 ‘도깨비’가 산다. 거대한 도깨비 상이 여럿이다. 설화 때문이다. 옛날 옛적 한우산 산골짜기에 금비늘 옷 입은 한우 도령과 머릿결 좋은 응봉 낭자가 살았다고 한다. 둘은 평생의 사랑을 약속했다. 이들을 시기한 자가 있었으니, 바로 도깨비 ‘쇠목이’다. 황금 동굴에 사는 대장 도깨비 ‘쇠목이’는 응봉 낭자를 흠모했다. 그는 망개떡을 건네며 사랑을 고백했지만, 응봉 낭자는 단칼에 거절했다. 질투에 눈이 먼 쇠목이는 한우 도령의 숨통을 조였다. 힘없이 쓰러진 한우 도령을 발견한 응봉 낭자도 충격을 받고 그 자리에서 쓰러지는데…. 숲의 정령은 안타까운 마음에 한우 도령을 차가운 비(한우)로, 응봉 낭자를 철쭉으로 만들었다. 비 오는 날마다 둘이 만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한겨레

‘도깨비 숲’으로 내려가는 길. 김선식 기자

쇠목이는 끝내 심술을 부렸다. 구름 짙은 날마다 거센 바람을 일으켜 구름을 물리치고 둘의 만남을 방해했다고 한다. 처음 설화를 지은 이도 철쭉이 시들어가는 어느 날, 한우산에서 운무가 순식간에 걷히는 신비로운 장면을 목격한 걸까. 한우산 ‘철쭉 도깨비 숲’(철쭉 설화원)은 나무 데크를 따라 걸을 수 있다. 거인 같은 도깨비 상(숲을 지키는 도깨비, 누워서 철쭉 먹는 도깨비, 망개떡 주는 도깨비 등)과 설화를 소개하는 책 모형으로 꾸몄다. 정상(836m)에서 도보로 10분 거리다.

한겨레

‘도깨비 숲’에 있는 도깨비 상. 김선식 기자

새벽녘 한우산 정상으로 가는 길은 어지러웠다. 남북으로 통하는 양쪽 도로 모두 꼬부랑길(각 2㎞가량)이다. 180도 커브 길을 연이어 돌다가 오랜만에 멀미가 났다. 산세는 웅장하고 골은 깊다. ‘한우산 생태숲 홍보관’ 옆으로 난 샛길 따라 20여분 걸으면 ‘한우산 호랑이 전망대’가 나온다. 길이 2~3m 호랑이 모형을 세운 곳이다. 아랫마을 곡소마을(대의면 신전리) 주민들은 한국전쟁 전까지만 해도 한우산에서 울려 퍼지는 호랑이 포효 소리를 들었다고 전해진다.

한겨레

‘한우산 호랑이 전망대’에서 본 호랑이 상. 김선식 기자

산을 걷다 우연히 만난 장철식(65) 경남 숲 교육협회 숲 해설가는 “한우산은 인공적으로 조림하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숲이어서 ‘한우산 생태숲’이라 부른다”며 “그중에서도 ‘홍의송’은 한우산만의 특별함”이라고 말했다. 그는 “홍의송은 나무줄기 밑동 약 50㎝ 위부터 줄기(가지가 아니다)가 갈라져 자라고 수피가 붉은 게 특징”이라고 덧붙였다. 그제야 밑동이 사슴뿔처럼 갈라져 뻗어 오른 소나무 줄기가 눈에 들어왔다. 홍의송이란 이름은 의병장 곽재우의 별칭 ‘홍의장군’에서 따왔다. 홍의송은 한우산 700m 이상 능선을 따라 약 2700주가 자라고 있다고 한다. ‘도깨비 설화’는 한우 도령과 응봉 낭자가 비와 철쭉으로 재결합하도록 도운 숲의 정령이 바로 홍의송이라고 전한다. 한우산 정상 주변엔 나무 데크와 흙길로 이어지는 둘레길이 있다. 홍의송원~도깨비 숲~정상~호랑이전망대~홍의송원을 잇는 ‘한우산 10리 숨길’이다.

한겨레

한우산 ‘홍의송원’. 김선식 기자

한우산 정상은 백패킹(야영 장비를 등에 지고 떠나는 여행)의 성지로 불리기도 한다. 정상 가까이 차로 갈 수 있다. 평일엔 정상에서 도보 약 20분 거리 ‘생태숲 홍보관’까지, 주말과 공휴일엔 정상에서 약 2㎞ 거리 쇠목재까지 차로 오를 수 있다. 해발 836m일 뿐인 정상은 탁 트인 전망을 자랑한다. 맑은 날엔 동쪽 대구 비슬산(1084m)과 창녕 화왕산(757m), 서쪽 지리산 천왕봉(1915m)과 황매산(1108m), 북쪽 가야산(1432m)과 오도산(1134m) 능선이 뚜렷이 보인다.

한겨레

한우산 정상으로 오르는 도로. 김선식 기자

쇠목이가 산다는 황금 동굴은 찾지 못했다. 다만 한우산 정상에서 북동쪽 약 12㎞ 거리에서 ‘자연’ 동굴을 발견했다. 우둘투둘한 기암괴석이 우람한 풍채를 뽐내는 봉황대(궁류면 벽계리)에 있다. 가파른 계단을 10분가량 오르내리며 거대한 바위를 코앞에서 볼 수 있는 곳이다. 거기 어둡고 깊은 자연 동굴이 있다. 굳이 동굴 속으로 들어가 볼 필요는 없을 것이다. 입구만 들여다봐도 도깨비가 튀어 나올 것 같은 오싹함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다.

한겨레

궁류면 평촌리에 있는 일붕사 전경. 김선식 기자

봉황대를 내려오면, 1996년 영국 기네스북에 등재됐다는 세계 최대 동굴 법당이 있다. 일붕사 제1 동굴 법당 대웅전(455㎡)이다. 바로 옆 무량수전(297㎡·제2 동굴 법당)도 동굴 속에 있다. 일붕사는 신라 성덕왕 시절 성덕사라는 이름으로 창건했다고 전해진다. 사찰은 자주 불이 났다. 1984년에도 또다시 누전으로 불탔다. 3년 뒤 봉황대 바위 속에 동굴 법당을 짓기로 했다. 이때 일붕사로 개명했다. 약 8m 높이 동굴 법당 안은 어둡고 서늘하다. 저절로 발걸음과 목소리가 조심스러워지는 곳이다.

한겨레

일붕사 제1 동굴 법당(대웅전) 내부. 김선식 기자

그동안 의령 여행지를 특징짓는 열쇳말은 ‘의병’과 ‘부자’였다. 대표적인 여행지는 의병장 곽재우를 포함한 의병들 위패를 봉안한 충익사, 곽재우 생가, 삼성 창업주 호암 이병철 생가, 부의 기운을 상징하는 솥바위 등이다. 다만 27일 현재 충익사 사당, 기념관, 박물관과 곽재우, 이병철 생가 등은 코로나19 여파로 휴관 중이다. 마지막으로 의령 전통시장을 빼놓을 수 없다. 고명으로 쇠고기 장조림을 얹은 메밀국수(소바)와, 청미래덩굴(망개) 잎으로 감싸 찐 망개떡을 맛볼 수 있는 곳이다. 도깨비처럼 별난 그 맛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한겨레

의령 전통시장 근처 3대째 운영 중인 ‘다시식당’의 온소바. 김선식 기자

한겨레

응봉 낭자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철쭉을 먹다 독이 올라 깊은 잠에 빠진 도깨비 ‘쇠목이’. 김선식 기자

한겨레

긴 잠에서 깨어나 죄를 뉘우치고 사람들에게 망개떡을 나눠주는 도깨비 ‘쇠목이’. 김선식 기자

의령 여행 수첩

한겨레
  1. 교통 : 동서울버스터미널과 의령 버스터미널을 오가는 버스가 하루 세 차례씩 있다.(편도 4시간50분) 마산역(KTX)에서 렌터카로 이동하면, 의령읍 의령군청까지 약 30분, 한우산 주차장까지는 약 1시간 걸린다.
  2. 식당 : 메밀국수(소바) 파는 식당은 의령 전통시장 안팎에 있다. 다시식당(의령읍 서동리 491-7/055-573-2514)은 3대째 약 70년간 운영한 메밀국수(소바) 전문점. 다른 지역에 체인점이 없다. 온소바, 냉소바, 비빔소바 각 8000원부터, 메밀 만두는 5000원. 망개떡은 의령 전통시장 안에 있는 의령망개떡(남산떡방앗간·의령읍 서동리 485-16/055-573-2422)이 유명하다. 10개 5000원, 20개 1만원, 40개 2만원. 일붕사에서 차로 10분 거리에 콩국수 맛집이 있다. 시골 동네 도로변에 있는 진미식당(유곡면 송산리 253-3/055-573-5777)이다. 주인장이 직접 농사지은 콩을 즉석에서 갈아 콩국수를 낸다. 콩국수 7000원, 물국수(촌국수) 5000원.
  3. 숙소 : 의령읍에 여관·모텔 등 숙박업소들이 몰려 있다. 의령 벽계 관광지(궁류면 벽계리) 주변에도 몇몇 민박·펜션들이 있다.
의령(경남)/글·사진 김선식 기자 kss@hani.co.kr
2020.06.03원문링크 바로가기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 등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Copyright © ZUM internet Corp.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