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C] ‘무미’인데 이상하게 맛있네, 시~원한 ‘묵밥’ 납신다

[푸드]by 한겨레

[커버스토리] 묵밥 & 시원한 여름 음식


‘묵사발’로 불려 억울한 묵밥


과거 구황작물이었던 식품


최근 채식·다이어트 바람 타고 재조명


전국 묵밥 명가 다녀보니 ‘겸손한 맛’ 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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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밥은 억울하다. 사람들은 묵밥을 흔히 ‘묵사발’이라고도 부른다. 묵이 든 사발에 국물이 가득한 모양새 때문이리라. 국어사전에서 ‘묵사발’을 찾으면 ‘묵을 담는 그릇’이라고 적혀있다. 하지만 묵사발엔 다른 뜻도 있다. 흔히 분노에 찬 어조로 “묵사발을 만들어 주겠다”고 말할 때 그 ‘묵사발’ 말이다. 이때 묵사발은 ‘공격당해 심하게 망가지고 깨진 상태’란 뜻이다. 부정적인 뉘앙스가 가득한 단어와 동음이의어란 점이 묵은 억울하다.


먹을거리 적었던 조선시대 등 옛날에 묵은 구황작물로 민초들의 주린 배를 채웠다. 맛을 치켜세우는 근사한 먹거리가 아니라 곯은 배를 채우기에 적당한 음식으로 취급받은 것이다.


우리 민족이 묵을 먹기 시작한 때는 꽤 오래전부터라고 추정한다. <동문선>(1478), <음식디미방>(1670년경). <시의전서>(19세기 말) 등엔 묵의 재료인 도토리나 제조법이 기록되어 있다. 특히 도토리는 신석기시대부터 먹은 거로 본다.


묵은 곡식, 열매 등을 불려 갈면 생기는 앙금을 끓였다가 식혀 만드는 음식이다. 종류도 많다. 청포묵(녹두), 도토리묵, 메밀묵, 고구마묵, 올챙이묵(옥수수), 우무묵(우뭇가사리) 등 셀 수가 없다. 박대, 홍어, 장어 같은 생선의 껍질로 만든 묵도 있다. 여기에 육수와 갖은 고명을 얹으면 묵밥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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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원주에 있는 메밀묵밥 명가 ‘흥업묵밥’의 메밀묵밥. 박미향 기자

가난이 묵의 본질이었던 때가 있었다. 이제는 다르다. 지금 세상에선 묵의 지위가 급상승했다. 가난조차 장식인 시대가 아닌가. 비만의 시대에 묵 요리만 한 저칼로리 음식도 없다. 포만감은 최고다. 호서대 식품영양학과 정혜경 교수는 “묵은 사람에게 더없이 좋은 음식”이라며 “서양인은 젤리 같은 식감을 좋아하는데, 그들의 젤리는 대부분 동물성 콜라겐에서 얻는 것이지만 우리 묵 대부분은 식물성 식재료에서 얻는 것”이라고 말한다.


채식이 대세다. 30대 말 한 채식주의자는 “묵이야말로 우리가 좋아할 만한 음식인데, 서울엔 의외로 전문점이 드물다”고 말한다. 지방에 견줘 서울에는 전문점이 적다. <대한민국을 이끄는 외식 트렌드> 저자 이윤화씨는 “지방에선 식재료 수급이 비교적 원활한 편인데, 서울 등 대도시는 중간 상인 등 누군가에게 의존해야 한다. 재료비가 올라서 채산성 떨어진다. 비싼 가격에 팔 수도 없는 음식이다”며 하지만 “최근 묵을 식재료로서 가치를 인정한 유명 요리사들이 새로운 시도에 나서고 있다”고 분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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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ESC가 떠났다. 곧 외식업계 방탄소년단이 될지도 모르는 전국 묵밥집을 찾아 길을 떠났다. 거기서 만난 건 ‘할머니의 주름진 손’과 ‘느리지만 미련하지 않고, 겸손해서 더 빛나는 맛’이었다. ‘순흥전통묵집’의 정옥분(90) 할머니의 손은 주름이 실핏줄처럼 퍼져있다. 손가락 끝 마디는 지팡이처럼 굽어 있다. 누가 뭐라고 하든 40년 넘게 묵묵히 묵을 만들다 생긴 훈장이다. 직접 묵을 쑤는 명가들은 패스트푸드 시대 따위는 관심이 없다. 느리다. 한참 느리다. 하나같이 소박하다. ‘내가 최고’라고 가슴 내미는 묵밥은 없다. 짜지도, 달지도, 맵지도, 시큼하지도, 고소하지도, 달곰하지도 않은 ‘무미(無味)의 맛’인 묵밥. ‘궁극의 무미’만 줄 수 있는 차분한 황홀경을 느꼈다. 시원했다. 더없이 차가웠다. 평양냉면만이 다가올 폭염을 몰아낼 비책이라는 생각은 착각이었다. 이젠 얼음 찰랑거리는 묵밥이 나설 때가 된 것이다.


기차역 영주역에서 다음 묵밥집을 가기 위해 탄 4칸짜리 무궁화 열차. 덜컹거리며 달리는 더딘 속도는 정 할머니가 버틴 세월이다. 무궁화 열차는 ‘맛있었고’, 묵밥은 더 맛있었다.


글·사진 박미향 기자 m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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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C] 메밀묵밥? 도토리묵밥? 당신의 선택은?


전국 묵밥집 순례


원주·영월·제천·청주·영주·문경 등


파주·안성· 양평도


집집이 내는 묵 맛달라


‘기꺼이 경험하기 위해 여행할 만한 곳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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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미(無味)의 맛’도 차이가 있나? 도통 말이 안 되는 소리다. ‘무미’란 ‘맛이 없다’는 소리인데 ‘없는 맛’에서 차이를 논한다는 게 말이 되나! 하지만 묵의 세계로 들어서면 다르다. 묵은 ‘짜다·달다·새콤하다·맵다’ 등의 표현으로 정의할 수 없다. ‘무미’인데, ‘맛’이 있다. 더구나 종류에 따라 맛이 다르다. 가장 큰 요인은 원재료다. 녹두로 만드는 청포묵, 옥수수가루로 만드는 올챙이묵, 우뭇가사리로 만드는 우무묵 등은 다른 풍미를 자랑한다. 우리에게 친근한 묵은 메밀묵과 도토리묵이다. 취향에 따라 메밀묵파와 도토리묵파로 나뉜다. 지난 6월 중순 4일에 걸쳐 전국에서 유명한 묵밥집들 다녔다.


묵밥은 국수처럼 채 썬 묵에 국물을 붓고 밥을 말아 먹는 음식이다. 겨울엔 뜨거운 국물을, 여름엔 차가운 육수를 부어 먹는다. 묵밥의 양대 산맥은 메밀묵밥과 도토리묵밥이다. 메밀묵밥을 파는 명가는 전국에 드물다. 도토리묵밥집이 9할이라면 메밀묵밥집은 1할이다. 도토리가 더 흔해서다. 더구나 메밀묵밥은 평양냉면과도 재료 수급 싸움을 해야 한다. 그 집 묵을 먹기 위해 기꺼이 여행에 나설 만한 곳은 어디일까? <미쉐린 가이드> 기준 별점 3개짜리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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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색빛 순한 맛, 메밀묵밥


지난 11일, 강원도로 향하는 고속버스엔 빛이 비스듬히 스며들었다. 나른한 햇살은 여행자를 방심하게 한다. 원주 시내에서 차로 5~7분 달리면 ‘흥업묵집’에 도착한다. 메밀묵 전문점으로 유명한 곳이다. 대를 이어 영업하는 흥업묵집은 창업자가 초창기 만들던 방식을 고집한다고 알려져 있다. 주문하자 단아하고 푸짐한 한 그릇이 나타났다. 순한 회색빛이다. 간 깨와 김치, 김 등이 고명이다. 찰랑거리는 육수는 시원하다. ‘궁극의 무미’다. 메밀 100%로만 만든다는 얘기가 지역민들 사이에서 도는데, 맛이 소문을 증명하는 듯하다. 가격은 고작 5000원. ‘쌍 엄지척’이다. (강원도 원주시 흥업면 남원로 29-3/033-763-5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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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업묵집’과 메밀묵집 전국 양대 산맥으로 꼽히는 ‘순흥전통묵집’은 경북 영주에 있다. 농촌 마을 한가운데 생뚱맞은 묵집이 있다. 들어서자마자 민속촌이 연상된다. 마당 가운데 굵은 나무 기둥으로 만든 초가 같은 건물이 있는데, 사방이 터져있어 코로나19 걱정은 안 해도 된다. 앞쪽 다른 공간엔 주방과 계산대가 있다.


지난 14일께 만난 이 집안의 사위는 “예전에 말도 못할 정도로 사람이 몰렸다. 오늘 이정도면 적은 것”이라고 말했다. 풍경만으로도 별 하나 받기 충분하다. 마침 90살인 창업자 정옥분 할머니가 가게에 나와 있었다. 소독한 뜨끈한 숟가락을 정리하는 할머니가 들려주는 자신의 옛이야기는 대한민국 미시사다. 본래 그의 고향은 강원도 태백. “17살에 영주로 시집온” 그는 어린 시절 친정에서 메밀묵을 쑤던 가락대로 만들기 시작한 게 50년이 넘었다. 동네 주민의 증언에 따르면 한국전쟁 때 이곳으로 온 할머니는 농한기인 겨울에 집집이 모여 놀았던 지역민들의 요청에 따라 묵을 팔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만큼 할머니 묵 맛은 맛났다.” 주민의 말이다. 겨울밤 뜨끈한 야식이었던 것이다. (경북 영주시 순흥면 읍내리 399/054-634-4614)


■ 부드럽거나 탱탱하거나~도토리묵밥


도토리묵 전문점은 유난히 충청도에 많다. <아름다운 우리 향토음식>에 기록된 충청도 대표 향토음식 목록에 도토리묵 요리가 유난히 많다. 유명한 묵집이 먹거리 넘치는 전라도엔 거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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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제천에 있는 ‘묵마을’에 들어서면 낡았지만 깨끗한 벽과 방마다 걸린 그림들에 시선을 빼앗긴다. 중국에서 활동하는 류시호 화가의 작품이다. 묵마을은 그의 집이기도 하다. 그의 아내가 운영한다. 빙하 같은 얼음이 가득한 ‘채묵밥’(7000원)은 김이 숲을 이룬다. 김 숲을 파헤쳐 깊숙이 숟가락을 박으면 탱탱한 묵에 닿는다. 시원하다.(충북 제천시 봉양읍 주포로 3-1/043-647-5989)


충북 청주에 있는 ‘초정묵집’도 외관이 허름하다. 언론에 소개된 적이 거의 없는 ‘신상 묵밥집’이다. 특이하게 묵수제비도 판다. 도토리묵 코스 요리가 있을 정도로 묵엔 자신 있는 곳이다. 얇게 부친 메밀부침개는 흡사 피자처럼 보이는데, 이걸 먹고 묵밥을 먹으면 부침개의 바삭함이 더 인상적으로 느껴진다. 그저 외할머니네 온 느낌이 든다.(충북 청주시 청원구 내수읍 우산1길 22번지/043-212-7416) 충북 옥천에 있는 ‘구읍할매묵집’도 묵밥으로 유명한 곳이다. 대전 유성구에 있는 ‘산밑할머니묵집’도 널리 알려진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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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에도 유명한 도토리묵집이 여럿이 있다. 경기도 파주에 있는 ‘원조할머니묵집’의 묵밥은 열무김치와 배추김치가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다. 얼핏 보면 육수가 김칫국물 같다.


14년 전에 이 집을 연 정영자(75)씨의 둘째 딸이 실무를 도맡아 하지만, 정씨를 만나는 일은 어렵지 않다. 걸어서 2~3분 거리에 있는 ‘서패 토마토농장’에서 한창 토마토를 따고 있던 그를 지난 19일께 만났다. “본래 이 동네에는 우리 묵집과 매운탕집 하나, 장어집 하나 정도만 있었는데, 지금은 식당이 50개가 넘을 거다.” ‘삼학산돌곶이꽃마을축제’가 생긴 후부터 찾아오는 이들이 늘었다. 본래 전북 무주에 살던 정씨는 젊은 날 교사를 그만둔 남편 김현득(82)씨와 상경해 이곳에서 터를 잡았다. “홍합, 미더덕, 고추씨 등으로 육수 내고 열무김치와 배추김치를 넣는다.” 정씨는 자랑스러워했다. 옆에 있던 큰 딸 김나휘(53)씨가 “우리 아버지는 서예가”라며 가족 얘기로 거든다. 가족이 운영하는 묵밥집은 유원지 식당 같은 구조다. 이 집 평상에선 한 숨 잠을 자고 싶을 정도로 바람이 솔솔 분다. 시큼한 김치를 만난 도토리묵은 또 다른 맛이다. (경기도 파주시 돌곶이길 108-5/031-942-3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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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양평에 있는 ‘콩리’(도토리국수집)는 특이하게 삶은 달걀이 들어간다. 얼음 양도 많아서 이가 시리다. 남극이 가슴에 들어온다. 다른 곳에 견줘 묵 굵기가 가는 편인 이곳은 직접 재배한 농산물로 식탁을 차린다. 26년째 영업 중인 이곳은 방송에도 꽤 소개됐다. (경기도 양평군 옥천면 신복길 99/031-772-5352) 경기도 안성에 있는 ‘고삼묵집’에 들어서면 요란스럽다. 벽엔 온통 유명인과 주인장이 함께 찍은 사진이 붙어있다. (경기도 안성시 고삼면 가유리 194/031-672-7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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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토리묵밥과 메밀묵밥, 둘 다 먹는 행운


“(여기 메뉴 중에) 묵밥이 제일 좋아요.” 흔히 묵 요리는 ‘어른의 맛’이라고 한다. 지난 12일 오후 찾은 ‘주천묵집’에는 모녀 두쌍만 있었다. 근처 캠핑장 가던 길이라는 이들. 9살 안지민양은 묵밥이 맛있다고 말한다. 동갑인 이채윤양도 “밥을 마니깐 더 좋다”고 말했다. 아이들 입맛까지 사로잡은 주천묵집은 도토리묵밥과 메밀묵밥을 다 판다. 정갈하고 슴슴하면서 쨍하다. 자신도 모르게 묵사발에 코를 박고 흡입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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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천묵집’의 조옥분씨. 박미향 기자

주인 조옥분(62)씨가 주방에서 도토리묵을 숭덩숭덩 썬다. 30년 넘게 묵을 쑨 내공이 드러난다. “어머니와 함께했었다. 어머니의 어머니도 묵을 쒔다.” 직접 농사짓는 메밀이 재료라고 한다. 가게 앞 작은 논에서 재배한 쌀도 식탁에 오른다. 그가 들려주는 묵 쑤는 법은 옛날 동화이자 고서적 기록물이다. 정갈한 이곳 밥상의 맛은 주인의 품성에서 나온다. (강원도 영월군 주천면 송학주천로 1282-11/033-372-3800) 경북 문경에 있는 <소문난 식당 새재묵조밥>도 청포묵과 도토리묵 두 가지를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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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경에 있는 <소문난 식당 새재묵조밥> 의 청포묵비빔밥. 박미향 기자


메밀묵은 포근하고 부드러운 식감이 자랑이다. 은은하고 우아하다. 도토리묵의 식감은 팽팽하고 단단하다. 이가 긴장한다. 원재료 가루 함량에 따라, 추가하는 다른 종류의 전분 유무에 따라 맛은 달라지지만, 이 둘은 분명 차이가 있다. 미세하고 미묘하다. 묵 취향을 찾아 떠나는 여행, 폭염이 몰아치는 이 계절에 할 만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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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영월·제천·청주·영주·문경 ·파주·안성· 양평/글·사진 박미향 기자 m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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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6.30원문링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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