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코지만 괜찮아’ 결핍·억압의 두 주인공, 치유·성장로맨스 그려낼까

[컬처]by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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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코지만 괜찮아’의 한 장면. 티브이엔 제공

<사이코지만 괜찮아>(티브이엔)는 김수현·서예지 주연의 드라마로 화제성이 높다. 드라마의 만듦새는 <호텔 델루나>(티브이엔)를 떠올리게 한다. 화려한 미술과 과장된 스타일, 세련된 연출과 정교한 편집이 눈에 띈다. 또한 동화나 설화를 인용해 해석의 묘미를 느끼게 하면서, 은근한 유머를 구사하는 것도 비슷하다. 게다가 화려하고 자기애 강한 여주인공과 반듯하고 안정된 인격의 남주인공의 로맨스라는 점도 유사하다.


가장 돋보이는 점은 주인공 캐릭터다. 문강태(김수현)는 정신병동의 보호사고 자폐 스펙트럼을 지닌 형 상태(오정세)를 돌본다. 고문영(서예지)은 성공한 동화작가로, 반사회적 인격 장애를 지녔다. 반사회적 인격 장애를 지닌 동화작가라니, 언뜻 형용모순 같다. 그러나 드라마는 잔혹 동화를 통해 모순을 돌파해낸다. 고문영은 동화란 본래 현실의 문제를 잔혹하게 그린 것이라 믿으며, 그로테스크한 자신의 정신세계를 잔혹 동화로 풀어내 대박을 터뜨린다. 드라마는 고문영의 그림책 <악몽을 먹고 자란 소년>과 <좀비 아이>를 독특한 그래픽과 함께 보여주는데, 그림책들은 이 드라마를 쓴 조용 작가의 작품이다.


강태와 문영의 로맨스는 파격적인 젠더 역전을 통해 신선한 웃음을 선사한다. 돈과 능력을 지녔지만 내면이 공허한 주인공이 돌봄 노동에 특화된 캐릭터를 만나 일방적으로 들이대고 집착한다. “탐난다. 예뻐서 가지고 싶다” “나랑 한번 잘래?” “같이 자자” “일하는 뒷모습이 맛있어 보이네” 등 희롱과 고백을 넘나드는 말을 쏟아낸다. 물론 이런 장면들은 현실적이지도 바람직하지도 않다. 아무리 성공한 여성이라 할지라도 현실에서 이런 말로 남자에게 구애하지 않는다. 젠더 권력이 현존하기 때문이기도 하거니와, 사람을 물건처럼 대해서는 안 된다는 윤리 때문이다. 고문영이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것은 반사회적 인격 장애라는 설정 때문이다. 즉 ‘미친×’ 혹은 ‘미친 예술가’라는 독한 설정을 지렛대 삼아 젠더 울타리를 훌쩍 뛰어넘어 ‘미친 미러링’을 선보인다. 이런 ‘미친 미러링’은 여성들에게 해방감을 안기기도 하지만, 더 중요한 각성의 의미를 지닌다. 예컨대 지금껏 사회적으로 성공했지만 내적 결핍을 가진 남자가 가난하지만 반듯한 성품의 여자에게 막무가내로 들이대며 “나랑 살자”고 했을 때, 괴상하고 무례한 짓이라며 정색하는 사람보다 로맨틱하다고 받아들이는 사람이 많았다. 하지만 젠더를 뒤바꾸어 같은 상황을 보여주니, ‘저것은 성희롱’이라며 모처럼 맞는 말을 해댄다. 미러링이 항상 옳진 않지만, 꽤 유효한 현실 인식의 도구임이 확실해지는 순간이다.


드라마는 장애와 결핍의 문제를 전면에 내세운다. 영화 <싸이보그지만 괜찮아>와 드라마 <괜찮아, 사랑이야>처럼 정신병원을 배경으로 삼지만, 그보다 눈에 띄는 것은 발달 장애다. 상태는 고기능 자폐 스펙트럼 장애로, 일반적인 자폐 스펙트럼 장애와 차이가 있다. (연기파 배우인 오정세의 연기가 영화 <결백>에서 자폐성 발달장애인 역을 한 홍경의 연기보다 어색해 보이는 것에는 이런 복잡한 설정도 한몫한다.) 가령 상태는 말을 다소 주절거릴 뿐 언어를 통한 의사소통에 문제가 없으며, 지능도 나쁘지 않다. 그러나 불안해하거나 감정조절이 힘들고, 상대방과의 정서적인 소통에 어려움을 느낀다. 더욱이 엄마의 죽음에 대한 트라우마를 지니고 있어서, 악몽의 공포에 시달린다.


고문영 역시 심각한 결핍을 갖고 있다. 그는 자폐가 아니지만, 정서적 소통이 어렵고 악몽에 시달리는 건 마찬가지이다. 반사회적 인격 장애를 지닌 문영은 타인의 감정에 무관심하고, 충동적이고 공격적인 행동을 한다. 드라마는 문영이 어린 시절 엄마에게 가스라이팅을 당했으며, 비극적인 가족사가 있었음을 암시한다. 드라마는 부모의 양육 태도가 자녀의 정신건강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믿는 듯하다. 이는 정신병동의 환자 사례를 통해 더욱 분명해진다. 가령 조증 환자 권기도는 국회의원 집안의 모자라는 아들로 무시와 냉대를 받다 발병했다고 주장한다. 모든 정신질환이 부모의 양육 때문은 아니다. 그러나 외로운 사람의 마음속엔 부모의 사랑을 갈구하는 아이가 있기 마련이다. 그런데 쓸모없는 자식은 부모의 사랑을 받기 어려울까. 오히려 반대의 경우도 있다.


어머니는 상태에게만 애정을 쏟았다. 어린 강태에겐 책임감만 부여했다. “나는 형을 돌보는 사람이 아니다”라며 반발한 적도 있지만, “형을 돌보라고 널 낳았다”는 엄마의 말에 평생 짓눌렸다. 드라마는 형에 대한 강태의 의무감, 미안함, 죄책감, 분노, 우울 등을 잘 보여주는데, 이는 장애인의 형제자매들이 공통적으로 겪는 정서다. 비장애 형제자매가 느끼는 복잡한 감정은 영화 <길버트 그레이프> <스탠바이, 웬디>, 책 <어른이 되면> <나는, 어떤 비장애형제들의 이야기> 등을 통해 상세히 알 수 있다.


강태는 제멋대로 행동하는 문영과의 만남을 통해 억압하고 회피해왔던 자신의 욕망을 돌아본다. 또한 문영은 자신의 폭주를 적절히 제어해주는 강태를 안전핀 삼아 자신을 다독인다. 두 사람의 억압과 폭주가 맞물려, 마침내 트라우마를 마주하고 치유와 성장으로 나아가는 로맨스가 펼쳐질지, 잔혹 동화가 펼쳐질지 아직은 알 수 없다. 부디 전자가 되길 기대해본다.


한겨레
대중문화평론가

2020.07.13원문링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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