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출된 베이비부머…‘나는 자연인이다’는 인류학적 기록물이다

[컬처]by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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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례없이 긴 장마와 잦은 산사태에 그분들은 무사하실까. 불현듯 생각나는 사람들이 있다. 바로 ‘자연인’들. ‘자연인’이란 말에 ‘법인’이나 떠올리는 사람들은 당최 티브이를 보지 않는 이들이리라.


<나는 자연인이다>(엠비엔)는 2012년 첫 방송 뒤 9년째 이어오는 장수프로그램이다. 최고 시청률이 7%에 이르는데, 종합편성채널에서 보기 드문 수치다. 더 놀라운 것은 유료 방송 채널 시장의 최강자라는 점이다. 여러 군소 채널에서 여러번 송출되는데, 에스케이(SK) 비티브이(Btv)의 경우, 지난 20일 하루 동안 21개 채널에서 총 55회가 편성됐다. 아무 생각 없이 티브이를 틀면 나오는 일명 ‘수도꼭지 프로그램’인 셈이다. 지난해 6월에는 ‘한국인이 좋아하는 티브이 프로그램’ 1위에 오르기도 했다. 소리 없이 강한 셈인데, 이는 50대 이상 남성 시청자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기 때문이다.


<나는 자연인이다>가 이처럼 사랑받는 이유가 뭘까. 일단 배경이 산이니 도시에서 볼 수 없는 아름다운 풍광에 눈이 시원해진다. <정글의 법칙>(에스비에스) 같은 오지가 아니라,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갈 수 있는 곳이지만 막상 가긴 힘든 그곳의 풍경이 정겹다. 산에 움막 같은 집을 짓고 수렵·채집 등을 통해 최대한 자급자족을 하는 자연인의 라이프스타일을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역시 하이라이트는 ‘먹방’과 ‘쿡방’이다. 자연에서 얻은 흔치 않은 재료로 소박하게 요리하는 과정이 흥미를 더한다. 이따금 고라니 간이나 곱등이 튀김 같은 ‘괴식’이 등장하거나, 자연인이 이승윤·윤택을 향해 짓궂은 장난을 치는 장면에선 웃음이 터진다.


보다 보면 은근히 빠져드는데 ‘어떻게 저런 데서 혼자 살지?’하는 호기심에서 ‘저 사람들은 누구이며 왜 저렇게 살고 있는가?’로 호기심이 자연스레 옮겨간다. 아니, 그보다 매주 이런 사람들이 소개된다는 사실에 진짜 호기심이 동한다. 대한민국엔 대체 몇 명의 자연인이 있을까? 그동안 약 400명 넘는 자연인이 출연했는데, 이렇게나 많은 자연인이 살고 있을 줄은 제작진도 아마 몰랐을 것이다. 처음에는 기인이나 도인에 가까운 사람이 많이 출연했지만, 지금은 괴상하다기보다 소박한 사람들이 나온다. 2019년 미성년자 성추행으로 유죄 판결을 받은 가해자가 출연하는 등 간혹 논란도 일지만, 이들의 사연이 400회나 누적되다 보니 생애사에 어떤 패턴이 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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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은 1955년∼1963년 사이에 태어난 베이비부머 세대의 남성들이다. 당시 한국의 농촌 인구는 약 80%에 이르렀으므로, 이들 중 상당수가 농촌 출신이다. 주로 70년대 도시로 와 80년대 노동시장에 진입하였으며, 제조업 위주의 현장에서 치열하고 극심한 경쟁을 겪다 큰 상처를 입었다는 사연이 많다. 가령 실직을 당하거나 부도를 맞거나 중병에 걸리거나 다치거나 아내와 사별하거나 이혼하거나 지인에게 사기나 배신을 당하는 등의 외상을 겪고, 이를 치유하기 위해 자신이 살던 고향이나 연고지로 내려온 것이다. 요컨대 어린 시절을 농촌에서 보내 농경사회의 풍습과 추억이 몸에 배어 있는 이들이 고도성장기의 살벌함을 온몸으로 겪으며 고생하다가 경쟁에서 패퇴하거나 도시 생활에 염증을 느껴 자연인이 됐다는 서사가 추출된다. 그런데 이는 도시에서 고독사하는 50∼60대 남성의 서사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자연인이다>는 고도성장기의 이면에 놓인 베이비부머 세대 남성의 퇴출을 보여주는 인류학적 기록물에 가깝다.


현재 한국 사회는 인구학적 대변화 초입에 와 있다. 2020년은 베이비부머 세대의 맏형인 1955년생 65만명이 공식적으로 65살 고령자가 된 해이자, 중간 연령대인 1960년생 88만명이 은퇴 연령에 들어가는 해이다. 앞으로 매년 70만∼85만명이 고령자로 편입되고, 매년 90만명에 가까운 인구가 은퇴자 대열에 합류할 것이다. 물론 그중 성공한 소수의 사람은 최초로 연금 생활이 가능한 노년 세대로서 은퇴 뒤 제2의 인생을 즐기며 살 것이다. 그러나 대다수 베이비부머 세대에게 준비 안 된 노년은 개인적으로나 국가적으로나 엄청난 부담이 아닐 수 없다.


이들에게 귀농이나 귀촌이 대안처럼 떠오르기도 한다. <나는 자연인이다>가 10년 가까이 인기를 끌 수 있었던 것은 귀농이나 귀촌을 로망으로 간직한 많은 중장년 남성의 욕망을 대리 충족시켜 줬기 때문이다. 5060 인구가 등산복을 입고 다니자 저가 아웃도어 시장이 열렸듯이, 도시에 사는 베이비부머 세대가 귀촌·귀농을 꿈꾼다면 이에 대한 시장과 정책이 마련되어야 한다. 실제로 포털에는 자연인이 되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나 묻고 답하는 글들이 종종 발견된다. 수도권에 사는 베이비부머 세대의 일부만 지방으로 이주해도 지방 공동화와 수도권 과밀화가 크게 개선될 수 있다는 보고가 있다. 그러나 2000년대 초중반의 낭만에 기댄 전원주택 붐은 실패로 돌아갔으며, 지금은 다시 서울로 회귀하는 경향이 뚜렷하다. 이제 생계와 커뮤니티가 뒷받침된 새로운 귀농 귀촌 프로젝트가 추진될 만하다. 양봉이나 버섯 재배를 가르치거나 ‘시니어 산촌 학교’ 같은 프로젝트를 통해 ‘자연인 되기’를 적극적으로 권장하는 것도 생각해볼 일이다.


부탁이 있다. <나는 자연인이다>에서도 별 근거 없는 자연식의 효능을 장황하게 소개하기보다 산에 합법적으로 산림경영관리사를 짓는 절차와 비용을 알려주거나 자연인이 되기 위한 실질적인 과정을 인터뷰나 자막을 통해 더 많이 다루어주길 바란다. ‘나도 자연인이다’를 외치고픈 사람들이 의외로 많기 때문이다.


황진미 대중문화평론가

2020.08.25원문링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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