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도 과연 비범함이 남아 있을까요

[컬처]by 한겨레

(21) 문학이라는 현미경으로 바라본 세상

댈러웨이 부인이 아픔 속에서도 잃지 않으려 한 자유, 그리고 너그러움

대단한 존재만이 ‘특별함’ 간직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알게 한 문학

한겨레

마를린 호리스 감독의 영화 <댈러웨이 부인> (1997) 한 장면. 젊은 시절 클라리사가 리처드의 꽃 선물을 받으며 행복해하는 모습. <한겨레> 자료사진

지금의 내 모습이 내가 지닌 최고의 모습이라면, 나는 이 이상 발전할 수 없는 존재라면, 얼마나 절망적일까. 어린 시절 나는 이런 부정적인 생각에 자주 빠지곤 했다. 성장을 꿈꾸면서도 성장이라는 말이 싫었다. 성장하면서 필연적으로 잃어버리는 순수도 있지 않은가. 게다가 성장이라는 말에는 ‘남들처럼 사회화된다’는 뉘앙스가 포함되어 있기에 더욱 성장이 두려웠다. 하지만 나는 성장해야 했고, 변신해야 했고, 더 나은 존재가 되어야 했다. 하지만 나의 성장 속에 그 어떤 ‘남다름’도 없을까봐 두려웠다. 자기만의 세계를 갖지 못한 지루한 어른이 될까봐 겁이 났다. 내게 성장과 발전을 강조하는 어른들은 너무도 단조롭고 모범적인 삶을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성장을 갈망하면서도 두려워하는 나에게 ‘그 어떤 성장도 제 나름의 특별한 의미가 있다’는 것을 가르쳐준 것이 문학이었다. 자신을 둘러싼 갑갑한 환경이라는 알의 껍질을 깨기 위해 분투하는 모든 이들의 성장은 그 자체로 소중하며 아름답다.


문학은 뭔가 대단한 존재가 되어야 ‘특별함’을 간직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가르쳐주었다. 제인 에어는 겉보기에 평범한 가정교사이지만 알고 보면 주변의 모든 사람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는 눈부신 잠재력을 지닌 존재다. 제인으로 인해 로체스터 가족은 물론 세인트존의 가족들까지 모두 놀라운 변신을 경험한다. 천애고아로 학대받으며 자라난 제인은 열정과 헌신, 의지와 노력의 힘으로 인간이 어디까지 변신할 수 있는가를 보여준다. 황순원의 소설 <소나기>의 소녀와 소년도 멀리서 보면 지극히 평범한 아이들이지만 두 사람에게는 이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애틋한 첫사랑의 추억이 숨겨져 있다. 문학은 내게 가르쳐주었다. ‘사회적 시선이라는 망원경’으로 보면 그저 평범해 보이지만 ‘문학이라는 현미경’으로 보면 그 누구도 빼앗아갈 수 없는 특별함을 간직한 존재가 바로 우리들, 인간이라는 것을.

댈러웨이 부인의 특별한 선택

버지니아 울프의 <댈러웨이 부인>은 모두가 ‘화려한 가문의 완벽한 안주인’으로만 알고 있는 한 여성의 마음 깊은 곳으로 들어가 그녀의 삶 속에 얼마나 풍요로운 가능성이 숨 쉬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단 하루 동안의 이야기를 통해 댈러웨이 부인의 한평생뿐 아니라 당시 런던 사람들의 총천연색 일상이 만화경처럼 펼쳐진다. 그를 위해 버지니아 울프가 선택한 두 가지 장치는 바로 ‘산책’과 ‘파티’였다. 파티에서 쓸 꽃을 한아름 사기 위해 런던 거리를 산책하는 클라리사 댈러웨이의 동선을 통해,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를 앓고 있는 참전용사 셉티머스부터 대영제국의 여왕이 타고 있는 것으로 짐작되는 비밀스러운 검은 자동차에 이르기까지, 런던의 온갖 서점과 카페와 꽃집과 공원 전체의 풍경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그리고 ‘파티’를 통해 댈러웨이 부인과 관계 맺은 모든 사람들, 옛 친구와 옛 연인과 런던의 온갖 유력인사들과 영국의 최고권력자인 수상까지 한자리에 모임으로써 ‘댈러웨이 부인의 하루’는 전쟁이 끝난 뒤 런던 전체의 풍경으로 확장된다. 이 모든 사람살이의 풍경을 예리한 관찰력으로 묘사하는 클라리사는 스스로를 이제 한물간 중년부인으로 생각하지만, 나의 눈에 비친 클라리사는 삶을 더 아름답게 만들 수 있는 재능을 지닌 사람, 더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이다.


나의 댈러웨이 부인, 클라리사를 더욱 특별하게 만들어주는 세 가지 순간이 있다. 첫 번째 순간. 첫사랑 피터를 깊이 사랑했음에도 리처드와 결혼한 이유를 떠올리는 순간이다. 결혼한 뒤 날마다 한집에 살아야 하는 사람들에게는 약간의 방임, 약간의 독립성이 필요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상대방의 사생활을 꼬치꼬치 캐묻지 않는 여유, 리처드에게는 그런 자유로움이 있었다. 첫사랑 피터는 모든 것을 알고자 했다. 모든 비밀을 공유해야 하고 모든 것을 설명해야 하는 압박을 클라리사는 견딜 수 없었다. 클라리사는 자유를 지키기 위해, 자신을 지나치게 감시하는 첫사랑과 절교하는 무참한 슬픔을 견뎌냈다. 가슴에 박힌 화살처럼 평생 떠나지 않는 슬픔을 간직했지만, 그 상처에도 불구하고 클라리사에겐 ‘자유’가 중요했다. 열정이 넘치지만 자신의 모든 것을 통제하는 피터보다는, 상상력이 부족하지만 클라리사의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존중하는 리처드를 선택한 것이다.


둘째, 이 작품은 전쟁이 끝난 뒤 영국인들이 애써 보여주고 있던 완벽하게 의연하고 금욕적인 참을성, 그 뒤에 숨은 불안과 슬픔을 그려낸다. 리처드는 차분하고 엄격한 영국인의 전형이다. 모범적이고 금욕적이며 신사적인 남자. 그런 그가 장미꽃을 사들고 아내에게, 그것도 결혼한 지 수십년이 넘은 아내에게, ‘사랑한다’는 고백을 하고 싶어 하는 장면이 있다. 리처드는 마음속으로 생각한다. 아내에게 쑥스러워서 사랑한다는 말을 차마 못 한다면, 그건 세상에서 가장 큰 실수라고. 꽃다발을 들고 웨스트민스터사원을 향해 걸으며 ‘오늘 밤 아내에게 꼭 사랑한다고 고백해야지’라고 결심하는 노신사의 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리처드는 전쟁의 상흔이 깊게 밴 런던의 거리 곳곳을 바라보며, 자신의 가슴속에 아직 사랑이라는 감정이 남아 있다는 것 자체가 기적임을 깨닫는다. 아내에게 꽃을 내밀며, 돌려 말하지 않고 분명하게, 사랑한다고 말해야지. 아내를 매일 집에서 보면서도, 무시무시한 경쟁자 피터를 제치고 클라리사와 결혼한 것은 기적이었다고 생각하는 남자. 클라리사를 만날 수 있다는 사실 자체를, 그녀와 매일 함께하는 자신의 인생 자체가 기적이라고 생각하는 남자. 그렇게 정성껏 꽃을 고른 뒤 사랑 고백을 굳게 다짐하고 집에 가서도 너무 떨려서 ‘사랑한다’는 고백을 못 하는 남자. 리처드는 사교계 사람들이 보기에는 ‘욕심이 없어 더 높은 공직에 올라가지 못한 사람’이고, 질투심 가득한 피터가 보기에는 ‘상상력이 부족한 사람’이지만, 내가 보기엔 자신이 진정으로 지켜야 할 생의 가치가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이다. 클라리사는 이런 눈부신 사랑 속에 살아가고 있기에, 그 자체로 소중하고 특별한 사람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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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를린 호리스 감독의 영화 <댈러웨이 부인> (1997) 한 장면. 댈러웨이 부인이 런던 거리를 산책하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가장 찬란한 빛을 찾아줄 문학

클라리사의 특별함이 빛나는 세 번째 순간. 그것은 마지막 장면이다. 사교계의 수많은 스캔들과 잔칫집의 떠들썩함이 아직 남아 있는, 파티의 막바지 무렵. 피터가 ‘이젠 가야지’ 생각하면서도 차마 떠나지 못하는 이유를 생각하는 장면이다. 파티를 즐기기보다는 남들의 뒷이야기에 열을 올리는 사람들 속에서도, 클라리사의 형언할 수 없는 내면의 빛은 사라지지 않는다. 사람들은 클라리사가 파티를 연다는 말만 듣고 그야말로 불원천리하고 달려온다. 초대도 안 받고 온 사람들까지 있다. 영국 수상까지 나타난다. 피터는 파티 내내 구석에 앉아서 클라리사의 특별함에 대해 옛 친구 샐리와 대화를 나누다가, 이제 그만 떠나야겠다고 생각하면서도 차마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지 못한다. 마침내 클라리사가 다가와 말을 걸어줄 것이라는 절박한 기대 때문이었다. 피터는 질문한다. 이 두려움, 이 황홀감은 무얼까. 나를 이토록 흥분과 열정으로 가득 채우는 것은 대체 무얼까.


그건 바로 클라리사였다. 그녀가 다가와 말을 걸어줄 거라는 기대감. 피터가 그 모든 우여곡절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클라리사에게 설레는 장면. 그것은 단지 ‘매력적인 여성’으로서가 아니었다. 클라리사가 나에게 다가오면 온 세상이 환해지는 그런 느낌. 그가 내 곁에 있어주기만 한다면 온 세상이 새로운 의미로 숨 쉬는 것 같은 느낌. 그 느낌을 피터는 사랑하는 것이었다. 클라리사는 자신이 그저 누군가의 아내, 댈러웨이 부인으로 주저앉은 것 같은 느낌에 괴로워한다. 드높은 학식을 지닌 것도 아니고 탁월한 업적을 이룬 것도 아닌 자신의 삶이 지루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클라리사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그가 이루지 못한 탁월한 업적이 아니라 ‘지금 있는 그대로의 클라리사’ 자체를 사랑한다. 파티가 끝나갈 무렵, 클라리사는 ‘내 파티가 성공적이었는가’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잘 알지 못하는 청년 셉티머스가 왜 자살했을까를 생각하며, 그의 죽음을 이해하려 노력한다. 누군가의 아픔을 이해하려는 헤아릴 수 없는 따스함과 너그러움, 그것이 클라리사가 지닌 가장 소중한 빛이다.


나는 문학작품을 통해 이렇게 우리 안의 특별함을, 비범함을, 눈부신 잠재력을 발견한다. 첫사랑 피터가 ‘이제 그만 가봐야겠다’고 생각하면서도 차마 떠나지 못하는 이유는 클라리사와 잠깐이라도 대화를 나누고 싶은 간절한 열망 때문이었다. 이제 다시 사랑을 시작할 수 없을지라도, 그저 바라보고만 있어도 기분 좋아지는 사람, 아직 내 인생에 넘치도록 많고 많은 희망이 남아 있을 것만 같은 느낌을 주는 사람, 특별히 좋은 일이 일어나지 않아도 그저 그와 함께 있기만 해도 지금 이 순간이 더없이 완벽하다는 것을 느끼게 해주는 사람. 클라리사는 내게 그런 사람이며, 그런 클라리사를 창조해낸 버지니아 울프야말로 문학이 아니었다면 절대로 만날 수 없었을 내 안의 영원한 멘토다. 지금을 뛰어넘는 그 무엇을 소유하기 위해 이미 아름다운 오늘을 망치지 말자. 지금과 다른 그 무엇이 되지 않아도 당신은 충분히 아름답다. 당신 안의 가장 찬란한 빛을 찾아주는 문학의 힘이, 당신의 오늘을 밝혀줄 것이니.


정여울 작가

2020.09.22원문링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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