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바마는 박근혜에게 왜 “불쌍한 대통령”이라 했을까

[이슈]by 한겨레

[한겨레 아카이브 프로젝트] 시간의 극장


제21화 미국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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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뒤면 세계 최강대국 미국의 새 대통령이 결정된다. 미국 대통령이 바뀌거나 재선에 성공하면, 우리나라 외교부가 가장 먼저 공을 들이는 게 한-미 정상회담이다. 미국의 새 대통령과 대북 정책을 비롯한 현안에서 입장을 조율하는 건 한-미 관계에 중요할 뿐 아니라 국내 정치적으로도 의미가 크다. 특히 미국 대통령이 바뀌면 정상회담을 서둘러야 할 필요성은 훨씬 커진다. 첫번째 정상회담, 이 회담이 한-미 관계와 대북정책, 국내 정치 흐름을 완전히 뒤바꾼 사례는 적지 않다. 미국 대통령과 한국의 인연, 미국 대통령이 한국에 끼친 영향을 한겨레 아카이브에서 돌아봤다. /해설 박찬수


케네디 앞에서 긴장했던 박정희


죽기 전 카터 만났을 때도 곤혹


박근혜도 오바마 앞에선 마이크만…


부시는 김대중에게 화를 냈다


노무현은 부시와 만나 직설적 논쟁


거의 자리 박차고 나올 분위기



첫손에 꼽을 수 있는 한-미 정상회담은 2001년 3월7일(현지시각) 워싱턴 백악관에서 열렸던 김대중 대통령과 조지 부시 대통령의 정상회담이다. 이 회담을 계기로 북핵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던 천재일우의 기회는 날아가고 결국 북한은 몇년 뒤 핵실험 강행으로 나아가게 된다. 아쉽기 짝이 없는 장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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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 초유의 플로리다 재검표로 얼룩진 2000년 11월7일의 미국 대선. 이 선거에서 앨 고어 민주당 후보가 당선됐더라면 빌 클린턴 당시 대통령이 평양을 방문하면서 북-미 관계 정상화는 급진전을 이뤘을 것이다. 연방대법원이 조지 부시 공화당 후보의 승리를 선언한 뒤에도 클린턴은 평양을 방문하겠다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그러나 부시 당선자 진영이 반대했다. 김대중 대통령은 어떻게든 북-미 대화의 기류를 이어가려 했다. 2001년 2월 조지 부시 대통령이 취임하자마자 한-미 정상회담을 추진했고, 그렇게 급하게 이뤄진 게 3월7일의 워싱턴 회담이었다.


미국 정치권과 언론은 김대중 대통령을 ‘아시아의 만델라’로 대했다. 1980년대 초반 쿠데타로 집권한 전두환 신군부가 김대중에게 사형을 선고했을 때, 그를 감형하는 조건으로 전두환의 워싱턴 방문을 받아들인 게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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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방미 열흘 전인 1981년 1월22일 윌리엄 글라이스틴 주한 미국대사가 알렉산더 헤이그 국무장관에게 보낸 2급 비밀 전문엔 “전두환 대통령은 상당 부분 이번 방문이 김대중 사건에 대한 자신의 결정(사형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 때문에 가능했다는 점을 알게 될 것”이라고 적었다. 그런 민주주의 정치인이 한국 대통령이 돼서 노벨평화상까지 받았으니, 김 대통령을 대하는 워싱턴의 분위기는 호의적이었다.


그러나 텍사스 주지사 출신의 조지 부시는 ‘카우보이’였다. 김 대통령 방미에 앞서 <뉴욕 타임스>가 김대중 인터뷰를 싣고 ‘햇볕정책’을 소개하자, 조지 부시의 백악관은 몹시 못마땅해했다. 부시의 카우보이 기질은 정상회담장에서 그대로 표출됐다. 당시 정상회담 상황을 잘 아는 전직 고위 관리는 이렇게 말했다.


“회담을 시작하자마자 부시는 ‘(양쪽이 조율한) 공동선언문은 그대로 언론에 발표하고 우리는 좀 더 솔직하게 얘기를 하자’고 말했다. 직설적인 그의 말에 우리 대표단은 얼어붙었다. 회담 도중 김 대통령 발언이 좀 길어지면 부시는 가차 없이 통역을 끊고 들어와 자기 말을 했다. 급한 성격을 그대로 보여주는 이례적인 행동이었다. 부시의 성격은 오찬을 겸한 확대정상회담에서도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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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빙하던 직원이 부시 그릇에 수프를 퍼주다가 실수로 국물을 약간 양복에 흘렸다. 그러자 부시가 큰소리로 직원을 나무라면서 손수건에 물을 적셔 양복을 닦았다. 그 뒤에도 여러 번 자기 양복이 더러워졌다고 불평하며 투덜댔다. 정상회담에선 참 보기 힘든 장면이었다. 좋게 보면 솔직하고, 나쁘게 보면 상대방을 배려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래도 김 대통령은 노련했다. 얼굴은 흙빛이 됐지만 한번도 부시를 맞받아치지 않고 꾹 참았다. 그렇게 참았기에 2002년 2월 부시 방한 때 김 대통령과 함께 도라산역을 방문해서 한국이 원하는 말(‘북한과 대화할 준비가 되어 있다’)을 해줬다고 본다.”


이 점에선 문재인 대통령도 김 대통령과 비슷한 점이 있다. 거칠고 무례하기로 따지면 부시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은 게 도널드 트럼프 현 대통령이다. 정상회담이나 정상 통화에서 트럼프는 자기가 원하는 경제적 이익을 얻기 위해선 외교적 예의를 벗어던지고 상대국 정상을 강하게 몰아붙인다. 문 대통령에게도 예외는 아니다. 특히 주한미군 방위비 분담금 인상 요구가 대표적이었다고 한다. 정상 통화에선 구체적인 액수까지 거론하진 않는 게 외교 관례인데, 트럼프는 ‘얼마를 올려 달라’는 식으로 마치 장사꾼 흥정하듯 했다고 한다. 트럼프와의 통화가 끝난 뒤 문 대통령은 참모들에게 ‘정상 간에 이렇게까지 할 수 있는가’라는 취지로 불만을 토로한 적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트럼프 면전에선 꾹 참고 맞대응을 하지 않았다. 특히 대북 문제에서 트럼프의 적극적인 태도를 이끌어내기 위해서 몹시 애를 썼다. 트럼프도 문 대통령의 제안에 호의적 반응을 보였지만, 회담에 배석한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이나 존 볼턴 국가안보보좌관 등이 트럼프의 이런 즉흥적 행동에 제동을 걸곤 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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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와 문재인 대통령은 전화 통화도 많이 했다. 정상 통화를 하기 전, 청와대 국가안보실에선 거의 대화록 수준의 수십쪽짜리 상세한 참고자료를 대통령에게 올린다. 하지만 문 대통령은 트럼프에게 무슨 말을 건넬지 직접 A4 용지에 따로 적어서 정서적으로 접근하려 애썼다. 2019년 2월 하노이 2차 북-미 정상회담의 실패로 북핵 문제는 다시 수렁에 빠졌지만, 2018년 6월 싱가포르 1차 북-미 정상회담을 성사시킨 건 이런 방식으로 문 대통령이 트럼프의 마음을 산 측면이 컸다. 싱가포르 1차 정상회담을 끝내고 본국 귀환을 위해 에어포스원에 오르자마자 트럼프는 문 대통령에게 전화를 걸어 마치 만점을 받은 아이처럼 회담 성과를 자랑했고, 문 대통령은 “세계 평화의 큰 토대를 놓았다”고 극찬했다. 북핵 문제를 다루는 두 대통령의 스타일을 잘 보여주는 광경이었다.


1961년 11월 군사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워싱턴을 방문해 존 에프 케네디 대통령을 만나는 사진은 유명하다. 다리를 꼬고 비스듬히 의자에 기댄 케네디와 선글라스를 쓴 무표정의 박정희 의장 모습은 대조적이다. 쿠데타를 일으킨 제3세계 군 장교가 백악관에서 미국 대통령을 만난다니 얼마나 긴장했을지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1979년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박정희 대통령을 저격하기 몇달 전, 지미 카터 대통령이 서울을 방문했을 때도 박 대통령은 몹시 긴장했다. 주한미군 철수와 한국 정부의 야당·재야인사 탄압을 놓고 한-미 간에 긴장이 높을 때였다. 정상회담에서 박 대통령은 주한미군 철수 계획을 철회해달라고 강하게 요구했고, 카터는 “내 개인적인 바람은 당신이 긴급조치 9호를 철회하고 재소자(양심수)를 가능한 한 많이 석방하는 것”이라고 직설적으로 비판했다.(2018년 한미클럽이 공개한 미 국무부 비밀해제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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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이런 모습을 봤기 때문일까. 박근혜 대통령은 2014년 4월 버락 오바마 대통령과의 청와대 공동기자회견에서 유난히 긴장해서 실수를 많이 했다. 오바마가 답변을 하라고 눈길을 주는데도 박 대통령은 마이크만 만지작거리면서 제대로 말을 하질 못했다. 오바마가 “불쌍한 대통령이 질문이 뭔지 기억하지 못하나 보네요”라는 조크를 던질 정도였는데, 이 부분은 백악관 영상에선 묵음으로 처리됐다.


미국 대통령은 한-미 관계와 대북 정책에만 막대한 영향을 끼치는 게 아니다. 나비의 날갯짓처럼 물결을 일으켜 국내 정치·사회적으로도 커다란 흔적을 남긴다. 2008년 4월 취임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이명박 대통령의 캠프데이비드 방문이 대표적이다. 이 대통령이 워싱턴을 방문하는 동안 한-미 쇠고기 협상이 전격 타결된 게 ‘광우병 파동’을 불러일으키며 대규모 촛불시위를 불러온 것이다.


이 대통령의 미국 방문은 조지 부시 행정부의 환대 속에 이뤄졌다. 정상회담은 백악관이 아니라 미국 대통령 별장인 메릴랜드 캠프데이비드에서 열렸다. 한국 대통령으론 첫 캠프데이비드 방문이었다. 부시 대통령은 가장 친한 외국 정상을 개인 별장인 텍사스 크로퍼드 목장으로 초대했다. 영국 토니 블레어 총리나 중국 장쩌민 주석, 일본의 고이즈미 총리가 크로퍼드 초청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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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2003년 이라크에 병력을 파병한 한국의 노무현 대통령은 크로퍼드로 초대하질 않았다. 부시와 노무현, 두 대통령이 정상회담에서 수차례 설전을 벌인 게 영향을 끼쳤다. 전직 외교부 고위 관계자의 얘기. “대개 정상회담은 의전적이고 외교적인 성격이 강하다. 양쪽 모두 윈윈하는 모양새를 좋아한다. 노무현 대통령은 달랐다. 정상회담에서 현안을 담판 지으려 했다. 처음엔 주변에서 말려서 의전에 따라 했는데, ‘이러니 너무 답답하다. 솔직하게 토론했으면 좋겠다’고 말하더라. 2005년 11월 경주에서 열린 조지 부시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은 그런 논쟁의 장이었다. 부시와 노 대통령은 대북 금융제재 등을 놓고 직설적인 말들을 주고받았다. 거의 자리를 박차고 나올 듯한 분위기였다. 이듬해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열린 정상회담도 분위기는 비슷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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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4월18일 오후 6시(한국시각), 이명박 대통령이 캠프데이비드에 도착하기 11시간 전에 한-미 간에 쇠고기 수입 재개 협상이 타결됐다. 한국이 ‘30개월 이상 쇠고기 수입금지’ 방침을 철회하고 미국산 쇠고기를 다시 수입한다는 내용이다. 정부는 쇠고기 협상과 대통령 방미는 관련이 없다고 말했지만, 나중에 공개된 미 국무부 문서엔 한국 정부가 이명박 대통령 방미 전에 쇠고기 수입 문제를 풀겠다는 뜻을 미국에 전달한 것으로 적혀 있다. 위키리크스가 공개한 미 국무부 외교전문을 보면, 인수위 시절인 2008년 1월17일 최시중·현인택 두 측근 인사가 알렉산더 버시바우 주한 미국대사와 만나 이 대통령 방미를 논의했다. 현인택씨가 “4월이 적기이며 캠프데이비드를 방문할 수 있다면 이상적”이라고 제안했고 버시바우 대사는 “한국이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재개한 이후 4월에 방미한다면 더 좋을 것”이라고 대답했다. 이에 현씨는 “이 대통령 방문에 앞서 한국 시장이 개방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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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의 미국산 쇠고기 수입 재개 발표로 전국에선 대규모 촛불시위가 벌어졌고, 임기 초반의 대통령 지지율은 한자릿수까지 떨어졌다. 이명박 대통령이 직접 대국민 사과를 하고 쇠고기 재협상에 들어가겠다고 밝혔다. 미국 대통령 별장인 캠프데이비드에서 하룻밤 묵은 값으로는 너무 커다란 정치적 대가를 치른 셈이었다.


1966년 10월 린든 존슨 미국 대통령의 서울 방문은 또 다른 측면에서 한국 사회의 중요한 변화와 연결되어 있다. 존슨 방한은 박정희 대통령이 베트남에 전투병력을 파병(1965년 10월)한 데 대한 답례 성격이 짙었다. 한국은 존슨의 7개국 순방 중 마지막 방문국이었다. 전세계적으로 베트남전 반대시위가 불이 붙던 때였다. 존슨은 순방국들에서 시민들의 큰 환영을 받지 못했다. 뉴질랜드에선 의사당 앞에서 반전 시위대와 마주치기도 했다. 한국은 달랐다. 김포공항에서 서울시청까지 카퍼레이드를 했는데, 180만명(언론 보도)의 시민들이 연도에 쏟아져나와 열렬히 존슨을 환영했다. 당시 서울 인구가 370만명이었으니 이 숫자는 다소 과장됐고 또 대다수는 동원 군중이었지만, 어쨌든 베트남전에 짓눌려 있던 존슨 대통령은 기뻐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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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존슨의 카퍼레이드 도중 소공동 지역의 너저분한 중국인촌과 남산 기슭 판잣집이 텔레비전으로 방영되면서 나라 안팎의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박 대통령은 도시 미관을 위해 용산역 등 철도 부근 판잣집부터 철거하라고 지시했다. 무허가 건물 철거와 대대적인 도시계획의 출발이었다. 도심 철거민들은 경기도 광주의 허허벌판 대단지(지금의 성남)로 강제 이주해야 했다.(<경기동부>, 임미리, 2014) 서울 도심 재개발이 꼭 존슨 대통령의 방한 때문에 이뤄진 것은 아니지만, 1971년 한국 사회운동에 한 획을 그은 광주대단지 사건은 그렇게 미국 대통령과 실낱같은 연결점을 지니고 있다.


한국과 미국 대통령의 만남이 꼭 껄끄러운 건 아니다. 재미있는 장면도 적지 않다. 1993년 7월 빌 클린턴이 방한했을 때는 김영삼 대통령과 청와대 녹지원에서 조깅을 같이 했다. 매일 아침 달리기를 했던 김 대통령이 클린턴 쪽에 먼저 제안을 했고 클린턴도 흔쾌히 수락해서 이뤄진 행사였다. 행사 이름은 ‘민주주의를 위한 조깅’(Jogging for Democracy)이라 붙였다. 300m 우레탄 트랙을 10바퀴 뛰었는데, 나이가 많은 김 대통령은 클린턴에게 지지 않으려 처음부터 속도를 올렸다. 클린턴은 여유 있게 맞춰주었지만, 미국 쪽 통역은 따라가질 못해 중간에 통역을 포기하고 트랙 밖으로 나와버렸다. 클린턴은 조깅을 마친 뒤 김 대통령에게 “나이도 많으신데 젊은 사람처럼 잘 뛰신다”고 덕담을 건넸다. 흡족한 김 대통령은 그날 저녁 만찬에서도 조깅을 화제에 올렸다. 힐러리 클린턴에게 “딱딱한 시멘트에서 뛰면 무릎이 상하니 우레탄을 깔아야 한다”고 조언했고, 힐러리는 백악관에 돌아가서 조깅 트랙에 우레탄을 깔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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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7월10일 아침, 빌 클린턴 대통령은 청와대 녹지원에서 김영삼 대통령과 조깅을 함께 했다. 김영삼 대통령은 조깅 전에 참모들에게 “내가 지지 않을 끼다”라며 특유의 승부욕을 불태웠다. 김 대통령은 처음부터 조깅 속도를 높였는데 클린턴이 잘 맞춰주었다고 한다. 청와대 사진기자단이 찍었다.

11월3일(현지시각) 미국의 새 대통령이 뽑히면 한-미 정상회담이 언제 열릴지가 초미의 관심사로 떠오를 것이다. 역대 정상회담을 보면, 빨리 여는 것보다 치밀하게 회담을 준비하는 게 더 중요하다. 이번 정상회담은 동북아 정세와 한국 사회에 어떤 파장을 던질까. 20년 전과 달리, 한반도에 따뜻한 바람을 몰고 오는 회담이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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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1화 해설자는 박찬수 <한겨레> 선임논설위원입니다. 박찬수 논설위원은 <한겨레> 워싱턴 특파원과 정치부장, 편집국장, 논설실장을 지냈습니다. 청와대와 백악관의 작동방식을 비교한 <청와대 vs 백악관>, 민족해방(NL) 사조의 흐름을 다룬 <엔엘(NL)현대사>를 썼습니다. 요즘 오피니언면에 격주로 ‘진보를 찾아서’를 연재하고 있습니다.


▶ 팩트스토리는 전문직·실화 소재 웹소설·웹툰 및 르포 논픽션 기획사입니다. 저널리즘 바깥으로 확장하는 실화를 추구합니다.


<한겨레>가 지령 1만호를 맞아 ‘시간의 극장-한겨레 아카이브 프로젝트’를 선보입니다. 33년 기사와 사진 아카이브를 활용하여, 중요 사건과 인물을 현대사 콘텐츠로 재탄생시키는 작업입니다. 해당 주제를 잘 아는 해설자가 ‘시의성 있는 과거’와 관련한 한겨레 사진과 기사를 선정하고 독자에게 해설합니다. 한번도 소개된 적 없는 비컷(B-cut)사진 필름도 발굴하여 공개합니다. 르포, 전문직 소재 웹소설 기획사 팩트스토리가 기획하고 한겨레와 공동으로 제작합니다. 주간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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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1.08원문링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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