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구마사’가 사라진 자리에 남은 질문들

[연예]by 한겨레

[토요판] 이승한의 술탄 오브 더 티브이

역사왜곡 사극과 과잉 반발


엉뚱한 중국풍 소품·분위기에

국민청원, 협찬 철회 쓰나미

2회 만에 종영하는 초유 상황

역사왜곡 비판 일리 있지만


‘조선족 작가’ 주장 인종주의

작가 전작 출연자까지 불똥

방송·언론·여론 모두 문제 노출

옮고 그름보다 힘의 논리 관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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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구마사> 의 한 장면. 시청자들은 충녕대군이 구마사제 일행에게 월병과 오리알 등 중국 음식을 대접하는 장면과 중국식 소품으로 꾸민 공간 등을 두고 역사왜곡이라고 꼬집었다. 방송 화면 갈무리

한국 방송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작품이 등장했다. 불행하게도 긍정적인 방향 말고 부정적인 방향으로. 조선 전기를 배경으로 태종이나 양녕대군, 충녕대군과 같은 실제 역사 속 인물들을 등장시킨 에스비에스(SBS) 월화드라마 <조선구마사>는 조선 건국 과정에 악귀들이 개입했으며 그 악귀와 대적하기 위해 저 멀리 서역에서 구마신부를 데려왔다는 설정의 판타지 사극이다.


그러나 판타지 사극임을 고려하더라도 영 미심쩍은 장면들이 시청자들 눈에 밟혔다. 환시를 보고는 칼을 들고 백성들을 도륙하는 태종(감우성)이나, 충녕대군(장동윤)이 자신의 6대조인 목조의 삼척 정착 과정을 ‘기생 때문에 야반도주’한 것으로 축약하며 비아냥대는 장면 앞에서 적잖은 시청자들이 움찔했다.

‘역사왜곡’에 초유의 조기 종영 철퇴


사태에 본격적으로 불을 댕긴 건 중국풍 소품이었다. 충녕대군 일행이 서역에서 온 구마신부를 의주 근방의 한 기생집에서 접대하는 장면, 온통 중국풍 소품으로 도배가 된 중국식 가옥에서, 월병과 피단, 중국만두와 중국술을 먹는 장면은 시청자들의 역린을 건드렸다. 아니, 세상 어느 왕조가 외국에서 온 사절에게 타국의 음식을 접대하는가?


시청자들의 문제 제기에 제작진은 “명나라를 통해서 막 조선으로 건너온 서역의 구마사제 일행을 쉬게 하는 장소였고, 명나라 국경에 가까운 지역이다 보니 ‘중국인의 왕래가 잦지 않았을까’ 하는 상상력을 가미하여 소품을 준비했다”고 해명했다. 그러나 이 해명은 그 시절 의주 근방은 조선과 명나라의 경계가 아니라 조선과 여진 세력의 경계였으며, 그렇기에 명에서 조선으로 온다고 한다면 바닷길로 오는 것이 더 자연스러웠을 것이라는 반박만 불러왔다.


불성실한 해명에 더해, 불과 한달 전에 방영이 끝난 전작인 티브이엔(tvN) <철인왕후>에서도 역사를 경솔하게 대했던 박계옥 작가의 전력이 언급되자,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역사를 왜곡하는 동북공정 드라마를 폐지해야 한다는 청와대 국민청원이 하루 만에 서명 수 13만을 돌파했고, 뜨거운 여론을 감지한 광고주들과 협찬사들이 속속 광고와 협찬을 철회했다. 결국 <조선구마사>는 방영 2회 만에 폐지 수순을 밟는 한국 드라마 사상 초유의 작품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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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청자들은 도무녀 무화의 의상이 중국 드라마에 나온 스타일이라고 지적했다. 에스비에스 제공

‘표현의 자유’라는 말로 <조선구마사>의 역사왜곡을 옹호할 생각은 전혀 없다. 전작에 이어 또 역사를 대하는 불성실한 태도를 보여준 박계옥 작가는 비판을 피하기 어려우며, 오랜 세월 역사에 대한 깊이 있는 연구나 시대상에 대한 치밀한 고증 없이 작가가 쓰고 싶은 대로 쓰고는 ‘퓨전 사극’이나 ‘판타지 사극’이라는 핑계로 비판을 피해 갔던 역사가 있던 한국 드라마 업계도 이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준비 과정에서 시나리오를 검토할 시간적 여유가 있었을 제작진 중 아무도 문제가 된 대목을 걸러내지 못한 것 또한 문제적이다. 그러나 방영 첫주 만에 폐지 결정이라는 사상 초유의 사태에서, 유심히 살펴봐야 할 몇가지 쟁점이 존재한다.

인종주의적 논란으로 발전

이를테면, 온라인 일각에서 제기된 박계옥 작가의 ‘조선족 의혹’이 그것이다. 일부 네티즌들은 박계옥 작가의 게으른 태도와 반복되는 역사왜곡에 대한 문제 제기를 넘어서, 그가 조선족이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했다. 박계옥 작가가 중국 자본과 일을 자주 하고 있고, 최근 몇년 사이 등록된 어문저작물 목록을 보면 중국 관련된 콘텐츠를 많이 생산한 흔적이 있으며, 전작인 영화 <댄서의 순정>(2005)이나 드라마 <카인과 아벨>(2009), <닥터 프리즈너>(2019) 등에 조선족 캐릭터들이 등장했다는 것이 그 이유다.


그러나 이 의혹 제기의 진의는 ‘민족은 한국 민족이어도 국적은 중국인 조선족이기 때문에 동북공정과 궤를 같이하는 콘텐츠를 만드는 것 아닌가’ 하는 인종주의적인 발상일 것이다. 그게 아니었다면 작가의 출신 지역과 관계된 추측은 세번째로 조선족 캐릭터가 등장한 <닥터 프리즈너>가 공개될 무렵에 나왔겠지. 작가가 역사왜곡을 선보인 작품이 공개된 이후에 출신 지역에 대한 추측이 제기된 것은, 조선족 집단 전체를 ‘한국 사람들 틈바구니에 섞여서 언제 중국 정부가 추구하는 국가적 프로파간다에 동조할지 모르는 에이전트’라고 바라보는 한국 사회의 뿌리 깊은 인종차별이 반영된 결과다.


제작사 쪽은 논란이 커지자 박계옥 작가는 조선족이 아니라고 밝혔다. 1995년 <돈을 갖고 튀어라> 각본 작업에 참여한 것을 시작으로 꾸준히 엔터테인먼트 산업에 종사한 커리어를 생각해 보면, 그가 ‘오랜 세월 정체를 숨긴 채 때를 기다렸다가 동북공정이 시작되자 역사왜곡 콘텐츠를 선보인 작가’라는 가설보다는, ‘한국 엔터테인먼트 산업에 본격적으로 차이나머니가 유입되기 시작한 시기를 노려 중국 관련 콘텐츠 생산에 박차를 가한 작가’라는 가설이 좀 더 합리적인 추측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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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시를 보고는 칼을 들고 백성들을 도륙하는 태종(감우성)이나, 충녕대군(장동윤)이 자신의 6대조인 목조의 삼척 정착 과정을 ‘기생 때문에 야반도주’한 것으로 축약하며 비아냥대는 장면 앞에서 적잖은 시청자들이 움찔했다. 에스비에스 제공

그러나 과연 작가의 출신지가 중요할까? 설령 박계옥 작가가 조선족이라고 한들, 그건 박계옥 작가 개인이 역사를 대하는 태도가 못마땅한 사람이라는 의미이지, ‘조선족이기 때문에 중국 정부의 역사 프로파간다에 동참하고 있다’는 추론을 정당화해주진 않는다.


그리고 언론은 이와 같은 ‘조선족 논란’이 인종주의적 선동이라는 걸 지적하거나 경고하기는커녕, 온라인 커뮤니티상의 무분별한 의혹 제기를 스포츠 경기 중계하듯 기사로 출고하며 인종주의 장사에 숟가락을 얹었다.


한술 더 떠 여론은 작품에 출연한 배우들에게도 책임을 묻는가 하면, 작가의 전작이자 비슷한 역사왜곡 논란이 있었던 <철인왕후>에 출연한 신혜선을 모델로 기용한 마스크 회사에 모델 교체를 요구하고 나섰다. 역사왜곡의 소지가 있는 콘텐츠에 참여한 이들이라면 경중을 따지지 않고 무조건적으로 책임을 묻는 이와 같은 태도는, 대화나 논의 대신 ‘너는 어느 편이냐’라는 선택을 강요하는 이분법적인 폭력이다. 그리고 이렇게 국민과 비국민을 가르는 국가주의적 선동에 대해서도, 상당수의 언론은 경고나 지적 대신 사안을 단순 스트레이트 보도하는 쪽을 택했다.

‘한국의 오늘’ 집약된 사태

역사왜곡에 대한 문제 제기를 넘어 인종주의적·국가주의적 선동까지 넘나드는 여론과, 그에 제대로 된 문제 제기를 하지 못한 언론에 더해, 방송사 또한 사태를 악화하는 데 일조했다. 그동안 한국의 방송사들은 드라마나 코미디 속의 불필요한 폭력 묘사나 소수자 집단에 대한 편견과 차별을 조장하는 설정, 여성 혐오 등의 문제가 제기될 때마다 ‘창작의 자유’를 이야기하고 ‘그럴 의도가 아니었으나 보시는 분들이 불편하셨다면 깊게 사과드린다’는 말로 일관해왔다.


방송사들이 작품을 향해 제기되는 문제에 관해 적극적으로 대화에 나서 창작물 속 재현의 윤리에 관한 시대적 합의를 도출하는 작업을 해왔더라면, <조선구마사>를 둘러싼 논쟁 또한 ‘판타지 사극 속 역사 재현의 윤리’에 대한 생산적인 논의로 이어졌을지 모른다. 그러나 늘 ‘불편하셨다면 죄송하다’는 핑계로 그 숙제를 미뤄왔던 방송사는, 광고주와 협찬사가 빠져나가자 부랴부랴 한주 만에 드라마를 폐지하는 것 말고는 남은 선택지가 없었다. 옳고 그름의 문제에 반응한 것이 아니라, 힘과 자본의 논리에 반응한 것이다.


에스비에스 입장에서야 빗발치는 여론 앞에서 폐지 말고는 답이 없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는 “말로는 문제를 해결하거나 생산적인 논의를 도출할 수 없으며, 세를 불려 돈으로 압박하는 것이 답이다”라는 안 좋은 시그널을 보내는 결과를 남겼다. 제작진은 해야 할 검토를 안 했고, 여론은 해야 할 자제를 안 했고, 언론은 해야 할 지적을 안 했고, 방송사는 그간 해야 했던 숙제를 안 했던 탓에 대화가 아닌 힘과 자본의 논리가 답이라는 쓸쓸한 결과를 도출했다. 역사 속의 조선을 심각하게 왜곡한 <조선구마사>를 둘러싼 일련의 사태는, 이처럼 역설적이게도 오늘날의 한국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 티브이 칼럼니스트. 정신 차려 보니 티브이(TV)를 보는 게 생업이 된 동네 흔한 글쟁이. 담당 기자가 처음 ‘술탄 오브 더 티브이’라는 코너명을 제안했을 때 당혹스러웠지만, 지금은 그러려니 한다. 굳이 코너명의 이유를 붙이자면, 엔터테인먼트 산업 안에서 무시되거나 간과되기 쉬운 이들을 한명 한명 술탄처럼 모시겠다는 각오 정도로 읽어주시길.

2021.04.02원문링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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