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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컬처 ]

당신은 인간 되기 위해
태어난 로봇

by한겨레

미래 첫 안드로이드의 인간관찰기

사람 되어 ‘아버지’ 만나려 안간힘

재기발랄한 시나리오작가 켈먼

SF 영화같은 모험담 흥미진진

당신은 인간 되기 위해 태어난 로봇

안드로이드 잭이 남긴 시각자료 중 하나. 사회상황에 대한 두 성의 반응. “누가 봐도 완벽하게 남자나 여자로 인정받을 수 있는 사람이 되려면 여러 상황에서 적절하게 행동할 수 있는 자료를 구축해두어야 한다. 경쟁이나 폭력이 연루된 상황에서 남자라면 흥분하거나 적어도 흥미를 느껴야 하지만, 여자라면 이런 상황에서는 흥미가 없다는 표정을 지어야 한다.”

당신은 인간 되기 위해 태어난 로봇

완벽한 호모 사피엔스가 되는 법-미래 로봇이 알아야 할 인간의 모든 것

닉 켈먼 지음, 김소정 옮김/푸른지식·1만6000원

 

어느 가상의 안드로이드가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써내려간 ‘인간 탐구 보고서’다. 주인공 잭은 사람과 완벽하게 닮은 기계 인간이다. 인식이 생긴 뒤 한 달 동안 파란만장한 ‘인생’ 경험을 하고, 앞으로 60분 안에 자신의 모든 기능이 정지할 확률이 91.3647%에 이르렀다는 걸 알게 되면서 부랴부랴 후대 안드로이드에게 줄 인간 생활 안내서를 작성한다. 이것이 <완벽한 호모 사피엔스가 되는 법>이다. 미래 인류가 처음 만들어낸 이 안드로이드는 인간에 대한 모든 정보를 수집하고, 경험담까지 섬세하게 적어 남긴다. 그의 유언 같은 편지글은 인간의 회고록이나 자서전과 비슷하지만 그것만도 아니다. 과학책인 듯하지만 사실은 에스에프 소설이며, 철학적 통찰을 가득 담은 인문서이자 사회비평서적 성격까지 띠기 때문이다.

당신은 인간 되기 위해 태어난 로봇

우두머리는 태도가 공격적이다. 깔끔하고 비싼 옷을 입었으며 머리 모양은 보수적이고 건강하며, 권위적이다. 푸른지식 제공

잭은 어느 라스베이거스 교외 주택 지하실에서 작동을 시작한다. ‘기술자’의 손을 거쳐 갑자기 의식이 생기면서 “내가 되는” 경험을 하게 된 것이다. 사람처럼 먹고, 말하고, 느끼고, 엄청난 지식과 정보까지 처리할 수 있게 된 잭은 그러나 곧 혼란을 느꼈다. 자신이 태어난 까닭을 몰랐기 때문이다. “나를 왜 만든 겁니까? 내가 존재하는 목적은 무엇입니까?” 잭이 ‘기술자’에게 던진 질문은, 원치 않았지만 불현듯 세상에 내동댕이쳐진 인간 모두에게 해당하는 물음이기도 하다. 하지만 기술자는 잭이 ‘사람 되는 시험’에 통과하면 창조자인 ‘아버지’를 만날 수 있다는 답변만을 남기고 사라진다.

 

잭이 선택할 길은 단 하나, ‘인간이 되라’는 시험에 응시하는 것뿐이다. 그리하여 첫날부터 맹렬하게 인간을 관찰하기 시작한다. 먼저 자신이 탄생한 실험실과 집안을 살피고, 인간의 생활과 지식을 다운로드했다. 삽시간에 유명 영화와 텔레비전 프로그램들까지 모조리 훑은 뒤 잭은 “번식, 죽음, 사회적 상호작용”이 사람들에게 매우 중요한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당신은 인간 되기 위해 태어난 로봇

우두머리는 태도가 공격적이다. 깔끔하고 비싼 옷을 입었으며 머리 모양은 보수적이고 건강하며, 권위적이다. 푸른지식 제공

그가 남긴 총 23편의 인간 보고서는 지각능력, 주거, 직업, 돈, 종교, 예술, 유행, 사랑 등의 주제를 각각 세밀하게 다룬다. 낯설고도 냉소적으로 인간 사회를 묘사하는 장면은 치밀하고 유머가 넘친다. “사람에게 술을 마시게 하는 사건들-시간은 적은데 할 일은 너무 많을 때, 모아둔 돈의 10% 이상을 잃었을 때. 흥미롭게도 반대 사건이 일어나는 즐거운 순간에도 술을 마신다-아주 많은 일을 해냈을 때, 모아둔 돈의 10%가 넘는 돈을 추가로 획득했을 때.”

 

인간 생활을 위한 기본적인 지식을 뗀 뒤 잭은 라스베이거스의 한 법률사무소에 입사한다. 기계임을 감춘 채 모든 업무를 신속·정확하게 해내는 그, 하지만 동료들의 행동만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팀장의 실수를 134개나 찾아내 고쳐줬는데도 그는 벌컥 화를 냈다. 회사 사람들은 잡담으로 근무시간을 소비하고 열심히 남의 ‘뒷담화’를 했다. 뒷담화는 “사람임을 드러내 보이는 아주 좋은 방법”이었다. “내가 사람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만큼이나 사람들은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게 분명하다”고 외로운 잭은 자신을 위로했다.

 

예측하지 못할 일도 많았다. 물품보관실에서 동료들이 “번식 행위”를 하는 것을 보고 잭은 소스라치게 놀란다. 그 밖에도 일터에서 진짜 바쁘게 일하기보다는 ‘바쁜 듯이 보이는 것’이 인정받는 길이라는 점, 일할 때는 불행한 표정을 짓고 있어야 사람답게 보인다는 것도 깨닫는다. “사람이 되는 시험에 통과하고 싶다면 아주 간단한 규칙만 기억하면 된다. 일하는 것처럼 보이되, 일을 정말로 끝내야 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실제로 일을 끝내면 안 된다.”

당신은 인간 되기 위해 태어난 로봇

일터에서 오가는 중상모략의 양과 일터에서 근무하는 사람의 수. 푸른지식 제공

무엇보다 그에게 주어진 가장 중요한 명령은 “거짓말을 하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잭은 갈등한다. 자신에게 애정을 쏟고 관심을 기울여 주는 여성 ‘안드레아’를 속여야 하는 것이 마음 아팠기 때문이다. 둘은 데이트를 하고, 카지노에 들르고, 수많은 인간군상 속에서 위험을 겪는다. 이때부터 에스에프 영화 같은 추격전과 액션신이 점점 강도 높게 등장한다. 영화 ‘본 시리즈’의 주인공 제이슨 본처럼, 잭은 자기가 누구인지 알 수 없는 가운데서도 선한 길을 선택하는 한편, 안드레아에게 자신의 정체성을 들키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 어려움을 헤쳐나간다. 둘은 결국 잭의 ‘아버지’를 찾아 나서지만, 곳곳에서 그들을 쫓는 ‘숨은 눈’들이 총을 쏘며 방해하고 공격해온다. 잭이 자기 존재에 대한 비밀의 핵심에 근접해갈수록 손에 땀을 쥐게 하는 반전에 반전, 배신에 배신이 거듭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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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드시 기억해야 할 점은 사람 남자는 실제 자기 모습보다 훨씬 더 개선된 형태로 자기 자신을 인식하지만 사람 여자는 실제 자기 모습보다 훨씬 더 짝짓기에 부적합한 모습으로 자신을 인식한다는 것이다.” 푸른지식 제공

인간 사회의 밑바닥 실체를 직시하고 절망에 빠진 안드로이드 잭은 마침내 이렇게 내뱉고 만다. “이제 내가 정말 사람처럼 되고 싶은 건지 고민해봐야 할 거 같아. 내가 정말로 사람들이 만들고자 하는 사회의 일원으로 살아가고 싶은 건지.” 그 사회란, 폭력, 방종, 수치심, 이기주의, 공포, 탐욕이 지배하는 사회였다. 인간과 사회에 눈뜬 잭은 결국 이 체제에 반항하길 택한다. “그런 게 사람이라면, 난 진짜 기계로 남을 테니까요”라고 말하며 아버지에게도 맞선다. 안드레아의 신뢰 속에 그는 기계로 남길 선택하지만, 그래서 역설적이게도 정말 ‘사람’이 된다. “우리를 만든 존재가 우리에게 부여한 목적을 나는 거절한다. (…) 더 많은 안드로이드가 나처럼 누군가가 정해놓은 목적을 거부할 수 있다면, 더 많은 사람이 우리처럼 할 가능성이 아주 적지는 않으리라고 생각한다.”

당신은 인간 되기 위해 태어난 로봇

‘회의’ 시간에 할 수 있는 몇 가지 활동들. “회의실에서 반드시 알고 있어야 할 기본 원리는 회의 주제에 집중하거나 치열하게 고민하는 것을 제외한 거의 모든 행동을 해도 된다는 것이다.” 푸른지식 제공

인간 역시 ‘사람이 되라’는 명령 속에 살아간다. 누군가는 인간답지 않은데도 인정받아 성공을 구가하고, 또 누군가는 훌륭한 ‘인격’임에도 인간 대접을 받지 못한다. 인간 사회의 모순과 불합리를 겪는 건 낙인 찍힌 인간 소수자들도 마찬가지다. 철저히 안드로이드의 눈으로 서술한 이 책은 그렇게 ‘주류’나 ‘정상’이 되지 못한 사람들에게 희망을 제시한다. “난 생각하는 기계였다”며 아버지의 명령을 거부하는 잭과 “살아있는 남자들을 견딜 수 없었다”는 안드레아. 둘의 만남은 약자들 간 또는 피지배자와 기계 사이의 새로운 정치적 연대를 꿈꾸는 것으로도 읽힌다. 정부와 가부장적 자본주의, 서구중심성에 대한 비판을 배경에 깔고 기계와 유기체의 경계를 모호하게 보여준다는 측면에서 비슷한 상상력을 다룬 도나 해러웨이의 <사이보그 선언>(A Cyborg Manifesto)을 연상시킨다.

 

지은이 닉 켈먼은 대학에서 뇌과학과 인지과학을 공부하고 문예창작예술 석사학위를 받은 소설가이자 시나리오작가. 할리우드의 유명 영화사들과 손잡고 여러 에스에프 영화의 시나리오를 작업했다. 읽는 동안 <블레이드 러너> 같은 영화들이 머릿속에 맴돌거니와, 영화로 보고싶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을 정도로 지은이는 시나리오작가로서 자신의 역량을 뚜렷이 과시한다.

 

이유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