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대세는 대구 음식…맛없는 맛, 언제 적 얘기죠?

[푸드]by 한겨레

커버스토리·대구 미식 기행


육개장·국수·동인동찜갈비 등 외지인이 즐겨 찾는 향토음식

50년 이상 노포 즐비하고 ‘추억의 맛’에 눈물짓는 손님도

맵고 짜기만 하다는 건 편견, ‘매운맛’ 선호 MZ세대 호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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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중구 큰장로 서문시장 1지구와 4지구 사이 국수 노점들. 대구/이정용 선임기자 lee312@hani.co.kr

“대구 음식은 뭘 해도 맛이 없지. 맵고 짜고 자극적이잖아.” “대구 음식이 맛있다고요? 음식은 호남 아니에요?”

대구 미식 기행을 쓰겠다고 하자, 부서 회의에서 나온 첫 반응이었다. 요즘 인플루언서들이 너도나도 대구 음식을 택배 주문하고, 대구에 “먹으러 간다”는 말을 해도 믿지 않으니 할 수 없다. 발로 뛰어 대구의 맛을 보여주는 수밖에.


취재 첫날이었던 5월10일은 윤석열 제20대 대한민국 대통령의 취임식 날이었다. 앞서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 후보는 대구·경북에서 각각 75.1%, 72.7%의 지지를 받았다. 전국 17개 시도 가운데 가장 높은 득표율이었다. 식당 벽에 붙은 거대한 텔레비전들에서 취임식 장면이 되풀이되고 있었고, 시내 분위기는 여유로웠다.


대구광역시 중구에 위치한 서문시장은 정치인들이 선거 캠페인 때마다 꼭 찾는 전통시장이다. 조선시대 관찰사가 기거하던 경상감영 서쪽 문이 있던 자리에 위치해 ‘서문시장’으로 불렸다. 조선 후기 삼남(충청·경상·전라도)에서 가장 큰 시장으로, 1919년 3월8일엔 장꾼들 사이에서 만세운동 거사가 일어나기도 했다. 지금의 자리는 1922년 일제가 공설시장 허가를 내주면서 옮긴 곳이다. 비좁다는 이유였지만 사실은 군중의 운집을 막으려는 것이었다.


서문시장엔 국수 문화가 발달했다. 상인과 손님 모두 빨리, 맛있게 팔고 먹을 수 있는 음식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시장 1지구와 4지구 사이 줄지어 선 20여개 국수 노점들이 장관을 이룬다. 대구는 국수 소비량이 전국에서 가장 많은 ‘국수의 도시’. 1933년 설립해 전국에서 가장 오래된 국수 회사(풍국면)가 있다. 원도심인 중구 교동, 삼덕동만 해도 전통을 자랑하는 옛날 우동집, 칼국수집 들이 즐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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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중구 큰장로 서문시장 손칼국수 노점들. 대구/이정용 선임기자 lee312@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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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중구 큰장로 서문시장 손칼국수 노점들. 국수나 수제비를 먹을 때 꼭 풋고추를 된장에 찍어 함께 먹는다. 대구/이정용 선임기자 lee312@hani.co.kr

“건진 드실랍니까, 칼국수 드실랍니까?”


서문시장 손칼국수골목의 원조 격인 ‘합천할매손칼국수’에 들어가 앉으니 국수를 삶던 강병태(74) 2대 사장이 물었다. 3대 강민호(33) 사장의 아버지이자, 합천 출신 1대 방점이(93) 사장의 아들이다. 경상도 지역에서는 면 색이 누런 손칼국수를 ‘누른국수’라 일컫는다. 손칼국수를 삶은 뒤 물에 씻어 육수에 말아 낸 것은 ‘건진국수’다. 건진국수의 육수는 일반 잔치국수 국물보다 밍밍하고 옅은 맛이다. 면은 밀가루에 콩가루를 섞어 반죽한다. 누른보다 건진 쪽이 콩가루 향도 진하고, 훌훌 먹기 편하다. 국물과 고명은 철 따라 각종 호박(주키니, 둥근호박)과 채소(봄동, 유채나물, 부추)를 아낌없이 넣는다. 양념은 파, 간장, 고춧가루를 섞은 것인데 잔뜩 끼얹어도 많이 짜지 않다. 반찬은 김치와 된장에 찍어먹는 풋고추. 산뜻하고 개운하다.


“옛날에는 우리밀 빻아가지고, 좋은 거는 국수 만들고, 나쁜 거는 누룩 만들고, 여름에는 ‘건진국수’ 많이 나가고, 콩국수도 되고, 뜨거운 거는 경상도 말로 ‘누른국수’라, 여름에도 뜨거운 거 먹고 싶은 사람들은 먹고. 국수의 시조는 대구라. 삼성 이병철 회장님이 말 구루마에 싣고 다녔던 게 첫째라. 빨리 묵고 마이 묵고, 하루 몇그릇 나가는지는 데이터도 못 내요.”


쉼표를 이어가며 강병태 사장이 빠른 속도로 말했다. 손칼국수는 5000원, 잔치국수는 4000원인데 모든 메뉴는 1000원을 추가할 때 곱배기로 준다. 멀리서 100살쯤 되어 보이는 할아버지가 국숫가락을 건지며 들으라는 듯 말했다. “내 옛날에는 곱배기 아이마(아니면) 묵도 안 했다. (배우) 최불암이도 왔다 갔다 아이가.” 손님들도 ‘국수 부심’이 대단하다.(합천할매손칼국수: 대구 중구 큰장로28길 23, 053-252-25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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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중구 큰장로 서문시장 내 손칼국수골목에 있는 합천할매손칼국수의 건진국수. 국물이 맑다. 대구/이정용 선임기자 lee312@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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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중구 큰장로 서문시장 손칼국수골목에서 강병태 사장이 국수를 건져 씻고 있다. 대구/이정용 선임기자 lee312@hani.co.kr

최남선은 <조선상식문답>(1946)에서 대구의 대표 음식이 ‘육개장’이라고 적었다. 일제강점기엔 육개장을 ‘대구탕’이라고도 불렀다. 1929년 잡지 <별건곤> 24호에 ‘달성인’이란 필명의 인물이 ‘대구의 자랑 대구의 대구탕반, 진품·명품·천하명식 팔도명식물예찬’이라는 제목의 글을 발표했다. “대구탕반은 본명이 육개장이다.” 본디 이 음식은 ‘개장국’에서 유래했는데, 개고기를 먹지 못하는 사람들의 사정을 살펴 소를 개장국처럼 만든 것이라는 설명이었다. 가장 큰 특징은 “커다란 파가 둥실둥실 뜨고 기름이 뚝뚝 뜻는 고음국”이라는 것인데, 그 원형을 대구에서 맛볼 수 있다. 대구 육개장은 크게 선지의 유무, 고기의 종류로 나뉜다. 예전 대구 사람들은 선지해장국을 ‘소피국’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닭을 넣은 닭개장을 파는 유명 노포도 여럿이다.


중구 달성공원 근처 오래된 골목길 안쪽 옛집식당은 1948년 문을 연 육개장 노포다. 현재 2대 김광자(79) 사장과 그의 아들인 박무득(53) 사장이 운영 중이다. 1대 차천수 사장(1995년 작고)은 남편이 일본에 징용 갔다 돌아오지 못하자 식당을 열었다. 처음엔 장작 파는 상인 대상으로 국수도 말았지만 나중에 육개장 전문점이 됐다. 1963년 결혼해 대구로 온 성주 출신 며느리 김광자 사장은 60년째 한자리에서 얼큰한 육개장을 끓이고 있다. “시어머니는 차바가(성격이 차가워서) 요래해라 조래해라 하도(말도) 안 했다. 어깨너머로 배운 거지.” 비결은 별게 없다고 했다. “그냥 물 펄펄 끼리가(끓여서), 큰 솥에다가 파하고 고기하고 깨끗이 손질해가, 여가, 삶아가, 건지가, 써리가(넣고 삶고 건지고 썰어서) 만들지. 고기를 지름(기름)에 볶고 그라믄 안 돼. 깔끔하고 정갈하게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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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중구 시장북로 옛집식당 육개장 한상 차림. 다진 마늘과 금방 무친 쪽파를 넣어 먹는다. 삭힌 고추무침이 별미다. 대구/이정용 선임기자 lee312@hani.co.kr

3대 박 사장은 대학에서 조리과를 나와 호텔 식당에서 10년 동안 근무했다. 그가 운영을 맡아 전국 택배 주문을 받기 시작하면서 식당은 더 바빠졌다. “가게에 따라 따로국밥이라고도 하고 소고깃국이라고도 하는데 우리 집은 할머니 때부터 그냥 육개장이라고 불렀으니까예. 일본에서 동포들은 지금도 대구탕이라 부른다고 들었어예.” 알려진 내용을 종합하면, ‘따로국밥’은 양반들이 식당에서 국밥의 국과 밥을 따로 달라고 요구하면서 유래한 명칭이라고 한다. 선지가 들어간 따로국밥은 1946년 설립한 중구의 국일따로국밥과 남구의 대덕식당 등이 유명하다.


‘옛집’은 처음부터 선지를 넣지 않았다. 예전엔 국내산 한우 양지머리를 재료로 썼지만 지금은 한우 사태를 쓴다. 건강을 이유로 손님들이 점점 기름진 것을 싫어하게 됐기 때문이다. <별건곤>에 나왔다시피 이곳 육개장에도 기름이 둥둥 뜨지만 국물이 깔끔하고 담백해서 먹고 나서도 입속이 텁텁하지 않다. 대파, 토란을 넣지만 무는 끓일수록 뭉크러져 국물을 뻑뻑하게 하므로 넣지 않는다. 중요한 재료인 대파는 흰 부분이 많은 것을 골라 미끌미끌한 진액을 제거하고 끓인다. 조선요리 모음집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초판 1924)의 육개장 편에도 파를 데쳐 물에 씻으라는 부분이 나오는데, 이와 비슷하다. 먹기 직전에 다진 마늘과 쪽파무침을 넣어 먹으면 더 맛있다. 쪽파는 썰어놓았다가 주문이 들어올 때마다 분량만큼 양념에 무친다. “미리 무쳐놓으면 숨이 죽고 맛이 없다”고 김 사장은 말했다. 반찬으로 나오는 삭힌 고추무침은 소금물에 고추를 넣고 1년 이상 저장해두었다가 양념한 것이다. 짭조름한 간이 예술이다.


“(번거롭지만) 일 안 하고 우예 돈을 버노. 시골에서 우리 클 적에는 되게 못살았어. 엄마가 외동딸 굶지 말라고 식당 하는 집에 시집을 보냈는데 식당집은 일이 더 많잖아. 여수(여우) 피하니 호랭이 만난다 카디, 그 말 똑 맞지. 그만하고 빨리 잡사(잡수시라). 훌빈하민(허전하면) 또 밥 먹으러 오고.” (옛집식당: 대구 중구 달성공원로6길 48-5, 053-554-44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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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중구 시장북로 옛집식당 2대 김광자(앉은 이) 사장과 그의 아들인 3대 박무득 사장. 대구/이정용 선임기자 lee312@hani.co.kr

요즘 엠제트(MZ)세대가 열광하는 ‘전국 대세 매운맛’은 ‘동인동 찜갈비’다. 일반적인 소갈비찜이 간장 양념이라면, 대구의 매운 찜갈비는 혀가 얼얼하도록 매운 고춧가루를 넣고 그것도 모자라 다진 마늘을 국자 가득 듬뿍 올린다. 찌그러진 양은 냄비에 나오는 것도 특징. ‘동인동 찜갈비’는 1970년대부터 대구 중구에 골목을 형성했다.


처음엔 단층 대폿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골목을 이루고 있었지만 지금은 대표 식당 몇이 옆 가게 서너곳을 인수하는 식으로 규모를 키워 살아남았다. 유명 노포로는 낙영찜갈비, 봉산찜갈비, 실비찜갈비 등이 있다. 이 중 봉산찜갈비 1대 이순남(80) 사장은 지금도 가끔 나와 오랜 손님들에게 인사를 한다. 주방장은 47년, 부주방장은 40년 근속했고 직원 8명이 모두 오랜 식구들과 같다. 서울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패션회사에서 승승장구하다가 가업을 이어받은 2대 최병열(53) 사장은 말했다. “어렸을 때 이모들이 손잡아서 저를 학교 데려다줬거든요. 지금은 제가 사장이랍시고 이래라저래라 하니까 이모들도 격세지감 느끼고 가끔 괴로워하실 낍니더.(웃음) 살림집이 식당이라 저도 손님들 옆에서 많이 잤어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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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중구 동덕로 동인동 매운갈비찜. 대구/이정용 선임기자 lee312@hani.co.kr

1960년대 말 이 식당은 처음 국수를 말아 팔았는데 막일꾼들이 보양식을 요구해 마늘과 고춧가루를 잔뜩 넣은 찜갈비를 만들었다고 한다. “갈비살 포 뜨다 보면 ‘기레빠시’라고 자투리가 남잖아예. 그걸 모아서 처음 끓인 거라고 들었습니다. 막일하면 힘드니까 염분, 단백질이 필요했던 기라예. 지금은 전보다 덜 짜고 단맛이 좀 더 많아졌지예.”


맵기는 4단계로 조절이 되며 아이들을 위해서는 간장 양념으로 주문하면 된다. “주로 서울 사람들은 매운 것을 못 먹는 편이고, 목포나 부산 등지의 손님들은 매운 것을 좋아한다”고 한다. 주말엔 외지인들이 많이 찾고, 전국으로 하루 10~15박스가 택배로 팔려 나간다. 공동구매 주문이 열리면 한번에 1000~2000인분씩 팔리기도 한다. 수입(오스트레일리아 또는 미국산)은 1인분 2만원, 국내산(한우)은 3만원, 찌개 7000원. 수입과 국내산 모두 맛의 차이가 크지 않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독일 이민 간 손님이 계신데, 여기 와서 많이 울어예. 아버지 생각에 그러신 거 같아예. 그런 분들 만나니까 사명감이 생기더라고예. 추억을 지켜갈 수 있겠다, 그렇게 생각했지예.” (봉산찜갈비: 대구 중구 동덕로36길 9-18, 053-425-4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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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남구 대명로 막창골목 안지랑마당 곱창과 막창구이. 대구/이정용 선임기자 lee312@hani.co.kr

2012년 문화체육관광부 선정 전국 5대 음식테마거리 중 하나인 남구 안지랑 곱창골목은 40여년에 걸쳐 서서히 만들어졌다. 1979년 안지랑시장에 곱창을 팔던 ‘충북식당’이 처음 자리 잡았고, 대대적으로 곱창골목을 형성하기 시작한 것은 아이엠에프(IMF) 구제금융 시기인 1990년대 후반부터였다. 안지랑오거리에서 안지랑 시장가의 500m 남짓한 거리에 지금은 40여개 상가가 자리 잡고 있다.


막창구이는 대구에서 시작해 전국으로 퍼진 음식이다. 소 막창은 소의 네번째 위 부위인 홍창, 돼지 막창은 창자의 마지막 직장 부위를 가리킨다. 예전엔 집집마다 내장을 치대가며 씻고 삶아 연탄불에 구웠다. 하지만 연탄 연기와 곱창 삶는 불쾌한 냄새로 주민 민원이 심해 15년 전부터 식당들이 곱창 가공을 공동 위탁해 생산하고, 연탄불로 굽는 방식도 사라졌다고 한다. “드시는 분들은 추억일지 몰라도 하시는 분들은 고통이거든요.” 2012년부터 막창 전문 식당 안지랑마당을 운영 중인 최원목(57) 사장은 말했다. “내장을 잘 삶기 위해 전국 각지 안 다닌 데가 없다”고 그는 덧붙였다.


안지랑 곱창골목은 식당들이 현대화하는 동시에 호객행위 등 불필요한 경쟁을 하지 않으면서 골목 분위기가 살고 ‘젊음의 거리’라는 별명도 얻었다. 코로나 이전엔 주말에만 2만~2만5000명 정도가 골목을 찾아 어깨를 부딪칠 정도였지만 지금은 절반가량으로 손님이 줄었다. 요즘 차차 경기가 살아나 주말 손님 60~70%가 외국인 포함 외지인이라고 한다. 최 사장은 “막창은 동의보감에서 기력 보충을 한다는 설명이 있다. 여름 보양식으로 어른들도 많이 드신다”고 설명했다. 곱창, 막창은 불판에 올려 익힐수록 기름기가 쪽쪽 빠져 바삭해졌다. 육류의 내장만이 낼 수 있는 풍부하고 진한 맛은 ‘고소하다’는 말로는 부족하다. 맛뿐 아니라 ‘가성비’가 좋은 것이 최고의 장점. 곱창 한바가지(500g)에 1만4000원, 곱창과 막창을 섞으면 2만7000원. 술과 안주가 서로를 애타게 불러댄다. (안지랑마당: 대구 남구 대명로36길 9, 053-654-0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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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남구 대명로 막창골목 안지랑마당 곱창과 막창구이 한상 차림. 대구/이정용 선임기자 lee312@hani.co.kr

대구/이유진 기자 frog@hani.co.kr

2022.06.10원문링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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