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구찌'로 밀레니얼 세대의 명품 브랜드 재창조

[비즈]by 한국일보

프랑수아 앙리 피노 케어링그룹 회장

'젊은 구찌'로 밀레니얼 세대의 명품

명품 그룹 케어링의 프랑수아 앙리 피노 회장. 라파엘 라브 촬영

“명품 시장은 큰 변화를 겪고 있다. 과거 핵심이던 오랜 전통과 명성, 장인정신은 이제 당연한 조건이 됐다. 젊은 소비자들은 독창성에서 나오는 감성을 원한다.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는 뜻이다. 구찌의 변신을 보라. 우리는 구찌를 재정의했고, 지금 그 결과를 보고 있다.”


구찌 브랜드로 대표되는 프랑스 명품기업 케어링 그룹을 이끌고 있는 프랑수아 앙리 피노 회장은 최근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명품 시장의 변화에 주목하며 이렇게 말했다. 피노 회장은 “젊은 세대에게 무게 중심을 옮겨 가고 있다는 것이야말로 매우 중요한 변화”라고 강조했다. 구찌는 급변하는 명품 시장에 맞춰 브랜드가 어떻게 바뀌어야 하는지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구찌의 부활은 최근 수년간 명품 업계의 최고 뉴스였다. 3~4년 전만 해도 구찌는 한물간 브랜드로 여겨지며 매출 감소로 위기를 겪었으나 밀레니얼 세대(1980년대 초반부터 2000년대 초반에 출생한 세대)를 성공적으로 공략한 결과, 지난해 에르메스를 제치고 루이비통에 이어 매출 기준 세계 2위 명품 브랜드로 떠올랐다. 피노 회장의 지휘 아래, 2015년 최고경영자(CEO)로 부임한 마르코 비자리와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알레산드로 미켈레는 파격적인 디자인과 SNS 마케팅, 스트리트 패션 브랜드와의 협업 등을 통해 구찌를 ‘젊은 브랜드’로 탈바꿈시켜놓았다. 지난해 매출은 전년 대비 무려 80% 늘어난 62억유로(약 7조9,900억원)를 기록했다. 피노 회장은 소비자와의 소통을 가장 중요하게 여긴 결과라고 말한다.

유통기업 피노, 구찌를 손에 넣다

케어링 그룹은 피노 회장의 아버지인 프랑수아 피노 명예회장이 1963년 27세에 창업한 목재ㆍ건축자재 판매 회사를 모태로 성장했다. 이후 가구 유통업체 콘포라마, 프랭탕 백화점, 서점 및 전자용품 판매점 프낙, 통신판매 회사 라 르두트, 와이너리 샤토 라투르, 경매회사 크리스티 등을 잇따라 인수하며 프랑스 유통업계의 일인자가 됐다. 창업주의 이름을 따 ‘피노’로 불리던 회사는 대형 유통업체들을 합병하면서 1994년 ‘피노-프랭탕-르두트(PPR)’로 사명을 바꿨다.


피노 명예회장은 기개가 대단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프랑스가 독일에 점령당했을 때 일곱 살 소년이었던 그는 집 근처에 숨어있던 연합군을 돕다가 발각됐는데 독일군이 자신의 아버지를 폭행하며 위협했는데도 끝내 연합군의 소재를 밝히지 않았다고 한다.


피노 명예회장의 뚝심과 결단력은 이탈리아 브랜드인 구찌 인수 과정에서도 잘 드러난다. 1990년대 후반 구찌는 창업자 구치 가문의 암투와 분쟁으로 파산 직전까지 갔다가 변호사 출신 도메니코 데 솔레와 디자이너 톰 포드에 의해 가까스로 되살아나고 있었다. 당시 구찌를 노리고 있던 이는 젊은 나이에 디올을 인수하고 루이비통으로 대표되는 명품 그룹 루이비통 모엣헤네시(LVMH)를 집어 삼긴 베르나르 아르노 회장이었다. 1999년 아르노 회장이 구찌의 주식을 야금야금 사들이며 지분을 늘려 가자 데 솔레와 포드는 경영권 보호를 위해 피노 초대 회장에게 도움을 청했다.


‘캐시미어를 두른 늑대’라는 별명처럼 인수ㆍ합병(M&A)에 있어 잔인할 정도로 집요했던 아르노 회장에 맞서 싸운다는 건 고달픈 전쟁과 다르지 않았다. 피노 명예회장은 구찌 경영진과 손잡고 비밀리에 지분을 사들이는 데는 성공했으나, 탄탄한 자금력과 대형 로펌을 등에 업고 공세를 멈추지 않았던 아르노 회장과 2년여간 싸우느라 녹초가 됐다. 구찌 지분 매입에 적잖은 자금을 동원하느라 부채도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법원이 PPR의 손을 들어준 덕에 피노 초대 회장은 2001년 LVMH가 갖고 있던 구찌 지분을 사들이며 구찌의 주인이 됐고, 구찌 그룹이 갖고 있던 이브 생 로랑(2014년 생 로랑으로 이름 변경), 보테가 베네타, 스텔라 매카트니, 알렉산더 매퀸, 발렌시아가 등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PPR은 2004년 구찌의 지분을 99.4%까지 늘리며 경영권을 완전히 장악했다.

유통에서 명품기업으로 변신한 PPR

피노 명예회장은 경영권에 집착하는 기업가는 아니었다. 적절한 시기에 은퇴한 뒤 아들에게 회사를 넘겨줄 요량이었다. 아들 앙리 피노는 학생 시절 패션보다 컴퓨터 공학 같은 신기술에 관심이 많았다. 프랑스 HEC경영대를 다니며 컴퓨터 소프트웨어 개발에 빠져 지내다 파리 휴렛패커드(HP) 지사에서 인턴으로 근무하기도 했고 대학 동기들과 정보통신(IT) 스타트업 회사도 만들었다. 이 같은 경험은 훗날 PPR 또는 케어링그룹의 디지털 전략에 적잖은 영향을 미쳤다.


창업자인 아버지의 뜻에 따라 1987년 PPR에 입사한 피노 회장은 상품구매 부서에서 근무하며 경력을 쌓기 시작해 1993년 유통업체 CFAO 회장, 1997년 프낙 CEO를 지냈다. 피노 명예회장은 아들이 PPR을 경영할 그릇이 되는지 확인해보고 싶어 여러 회사에서 다양한 경험을 하도록 했다. 그는 “아들이 그룹 경영권 승계를 당연한 권리로 여기지 않고 노력해서 따내길 바랐다”고 했다. 경영 전문가들로 구성한 위원회가 10년간 아들이 후계자로 적절한지 평가하도록 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피노 회장은 2003년 PPR의 부회장 및 PPR의 지주회사인 아르테미스의 회장 자리에 올랐다. 2년 뒤인 2005년에는 마흔셋의 나이에 아버지의 뒤를 이어 PPR의 회장 및 CEO가 됐다. 경영권을 넘겨받은 뒤 그는 차근차근 구조조정을 단행했다. 유통과 패션으로 양분돼 있던 사업 영역을 패션 중심으로 재편하면서 프랭탕백화점(2006년), 콘포라마(2011년), CFAOㆍ프낙(2012년), 라 르부트(2014년) 등 유통 부문을 매각하거나 독립 회사로 분리했다. 이렇게 확보한 자금으로 스위스의 시계 제조업체 지라르 페르고, 이탈리아 남성복 브랜드 브리오니, 홍콩 주얼리 브랜드 키린 등의 명품 브랜드를 사들이고 라이프스타일 브랜드 푸마, 볼컴 등을 인수하며 포트폴리오를 확대해 나갔다.


유통 기업에서 명품 기업으로 탈바꿈시키려는 피노 회장의 시도는 아버지의 뜻과 무관하지 않았다. 피노 명예회장이 무리하게 자금을 끌어오면서까지 구찌를 인수했던 건 유통 사업으론 회사를 빠르게 성장시키기도, 세계적 기업으로 발돋움시키기도 어렵다고 판단해서였다. 피노 회장의 판단은 옳았다. 2006년 179억유로였던 PPR그룹의 매출은 2012년 97억유로로 절반 가까이 급감했지만 영업이익은 오히려 13억유로에서 18억유로로 늘었다. 구찌의 성장에 힘입어 지난해 그룹 전체 매출은 155억유로, 영업이익은 29억유로를 기록했다.

'젊은 구찌'로 밀레니얼 세대의 명품

LVMH의 유일한 라이벌로 떠오르다

PPR은 그룹명에서 두번째 ‘P’에 해당하는 프랭탕백화점을 매각하고도 오랫동안 사명을 바꾸지 않았다. 그러나 라 르부트 매각까지 결정되자 첫 글자인 ‘피노’의 P만 남게 된 이름을 더는 유지할 수 없게 됐다. 피노 회장은 2013년 명품 전문기업으로의 변신을 마무리하는 차원에서 기존 이름을 버리고 ‘보살피다’는 뜻의 ‘caring’과 발음이 같은 ‘케어링’으로 바꿨다. 여기에는 고향 브르타뉴에 대한 자긍심이 담겨 있는데 ‘Kering’의 ‘Ker’는 브르타뉴 말로 ‘가족’이라는 뜻이 있다고 한다. 고객과 브랜드를 지키고 사회적 책임을 소홀히 하지 않겠다는 중의적인 의미도 있다. 엠블럼은 어둠 속에서도 앞을 내다보는 비전을 가진 기업이 되겠다는 뜻에서 피노 회장이 가장 좋아하는 동물인 부엉이를 형상화했다.


피노 회장의 지휘 아래 케어링은 명품 기업으로 완벽하게 변신할 수 있었고 세계 최대 명품그룹 LVMH의 강력한 라이벌로 급부상했다. 그는 뿌리가 다른 여러 브랜드를 하나의 그룹으로 경영하면서 유기적인 연결과 독립적인 책임 경영에 초점을 맞췄다. 그룹 차원에서 인재와 물류, 시스템 등을 지원하되 각 브랜드 내에선 CEO와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에게 전권을 부여했다. 그러나 실적이 기대에 미치지 못하거나, 실적이 좋더라도 방향성이 맞지 않다고 판단되면 가차 없이 교체했다.


구찌를 위기에서 구해내며 명품업계의 톱스타로 떠오른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톰 포드와 2004년 미련 없이 작별했고, 생 로랑의 스테파노 필라티를 내보낸 대신 에디 슬리만을 기용해 변화를 시도했다. 발레시아가를 15년간 지키며 인기 명품 브랜드로 변화시켜 승승장구하던 니콜라 제스키에르 대신 2012년 알렉산더 왕을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앉힌 것도 당시로선 큰 뉴스였다.


구찌가 명품 브랜드 경쟁에서 밀리는 듯하자 과감하게 경영진을 쇄신한 건 신의 한 수였다. 스텔라 매카트니, 보테가 베네타에서 실력을 증명한 마르코 비자리를 CEO로 앉히고 외부 디자이너 대신 내부 인력이었던 알레산드로 미켈레를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기용했다. 미켈레는 꽃과 나비, 뱀 등 현란한 장식과 과장된 복고풍에 현대적 감성을 결합한 독특한 디자인으로 단숨에 젊은 소비자들을 사로잡았다.


피노 회장은 케어링을 순수 명품 기업으로 만들기 위한 구조조정도 계속 이어가고 있다. 올 들어 스텔라 매카트니, 크리스토퍼 케인, 볼컴, 푸마 등을 잇따라 매각하기로 한 것이다. 구찌, 생 로랑, 발렌시아가 등 기존 명품 브랜드에 더욱 집중하기 위한 결정으로 풀이된다.

'젊은 구찌'로 밀레니얼 세대의 명품

지난 9월 프랑스 파리의 테아트르 르 팔라스에서 열린 2019 구찌 봄/여름 패션쇼에 참석한 프랑수아 앙리 피노(왼쪽부터) 케어링 그룹 회장, 프랑스 영화감독 아네스 바르다, 이탈리아 유명 셰프 마시모 보투라, 피노 회장의 아내인 배우 셀마 하이에크, 배우 겸 음악가 제러드 레토, 마르코 비자리 구찌 최고경영자. 구찌 홈페이지

환경ㆍ여성인권 보호에도 앞장

피노 회장은 환경 문제나 여성 인권 문제 등에 깊은 관심을 드러내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의 뜻에 따라 케어링 그룹은 2025년까지 탄소 배출을 50% 감축하는 등 환경에 미치는 부정적 영향을 기존 대비 40% 이상 줄이겠다고 밝혔다. 구찌를 통해선 더 이상 모피 제품을 생산하지 않겠다고 선언했고, 가죽 제품 제조 공정에서 크롬 등 금속 물질을 사용하지 않겠다고도 했다.


피노 회장은 2006년 멕시코 출신의 할리우드 배우 셀마 하이에크(2009년 결혼)와 만나면서부터 여성에 대한 폭력이 후진국은 물론 선진국에서도 심각하다는 것을 깨닫고 적극적으로 관련 사회운동단체를 후원하고 있다. 미국 내 대학에서 여성에게 가해지는 폭력을 막고 남성들의 잘못된 인식을 바꾸는 활동을 하는 ‘시빅 네이션’에 36만5,000유로를 지원했고, 폭력에 노출된 여성을 보호하는 공간인 ‘여성의 집’(프랑스) 운영에 23만5,000유로를 후원하는 등 유럽, 미국, 아시아 등지에서 다양한 후원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피노 회장은 이렇게 말한다. “큰 기업은 사회에 적잖은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기업가가 환경 문제 등 사회적 책임을 다하지 않는다면 절대 비즈니스에서 성공할 수 없다. 회사 대표로서 사회에 기여하려면 회사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문제에 헌신해야 한다. 케어링 제품 소비자의 80% 이상이 여성이고 직원 60% 이상이 여성이다. 케어링이 한 가지 사회문제에 집중해야 한다면 그건 여성의 인권을 지키는 것이다.”


고경석 기자 kave@hankookilbo.com

2018.11.30원문링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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