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없이 펼쳐진 지평선… 산이 안 보이네

[여행]by 한국일보

김제 만경평야

‘미즈노씨네 트리하우스’에선 어릴 적 꿈이 되살아나요

끝없이 펼쳐진 지평선… 산이 안 보이

만경평야의 가장 큰 자산은 드넓은 논과 하늘이다. 지평선을 이룬 성덕면의 일직선 도로로 차들이 달리고 있다. 김제=최흥수기자

김제 만경평야는 넓고도 좁다. 만경읍을 기준으로 진봉, 광활, 성덕, 죽산면 소재지까지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드넓게 평야가 펼쳐져 있지만, 차로 이동하면 10~20분 정도 밖에 걸리지 않는다. 그 흔한 고갯길 하나 없이 도로가 일직선으로 뻗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동차가 없던 시절 이야기는 다르다. ‘그 끝이 하늘과 맞닿아 있는 넓디나 넓은 들녘은 어느 누구나 기를 쓰고 걸어도 언제나 제자리에서 헛걸음질을 하고 있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게 만들었다.’ 조정래의 대하소설 ‘아리랑’에서 묘사한 ‘징게 멩갱 외에밋들’이다. ‘징게 맹갱’은 김제와 만경, ‘외에밋들’은 하나로 이어진 넓은 들판이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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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내버스가 만경평야의 일직선 도로를 달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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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넓은 만경평야 위를 철새들이 날고 있다.

김제시는 대하소설 ‘아리랑’이 시작되는 곳임을 기려 부량면 벽골제 맞은편에 ‘조정래 아리랑문학관’을 지었다. 만경평야의 모습뿐만 아니라 중국, 러시아, 일본, 하와이 등 일제강점기 민족의 수난과 항쟁의 현장을 직접 찾아간 작가의 취재 여정도 함께 보여준다. 1993년부터 한국일보에 연재한 소설을 일일이 오려 붙이고, 책으로 엮기 전 꼼꼼하게 수정한 스크랩도 전시하고 있다. 대작을 완성하기 위한 작가의 열정과 치밀함을 엿볼 수 있는 공간이다.


이곳에서 4km 떨어진 죽산면 홍산리에는 소설 속 등장 인물과 공간을 재현한 ‘아리랑 문학마을’을 조성했다. 일제의 수탈기관 건물, 소설의 시작 무대인 내촌과 외리 마을을 재현해 놓았다. 주요 등장 인물인 감골댁, 송수익, 지삼출, 손판석의 가옥은 당시 민초의 생활상을 보여 준다. 2층 규모의 하얼빈역은 실물의 60% 비율로 지었다. 내부엔 일제강점기 항거의 역사를 전시하고, 외부에는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는 장면을 재현해 놓았다. 인근 죽산면 소재지에는 당시 일본인 지주 ‘하시모토 농장사무소’ 건물이 남아 있다. 하시모토는 일제 강점기 죽산면의 절반을 소유한 농장주였다. 민족의 수난과 항거를 주제로 한 소설의 첫 장면이 왜 만경평야인지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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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량면의 ‘조정래 아리랑문학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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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관 내부 전시물. 한국일보에 연재한 소설을 오려 붙인 스크랩에 친필로 꼼꼼하게 수정한 모습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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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랑문학마을의 하얼빈 역사. 실물의 60% 크기로 재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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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뒤편에는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는 조형물을 세웠다.

아리랑문학관 맞은편의 벽골제는 김제의 상징적 관광지다. 백제 비류왕 27년(330)에 축조한 벽골제 제방은 약 3.3km로 추정되지만, 현재 2.5km 제방에 두 개의 수문 유적, 조선시대 중수비만 남아 있다. 당연히 있어야 할 저수지는 농경지로 변했다. 이 사실을 모르고 가면 다소 당황스럽다. 대신 제방 주변을 산책하기 좋은 공원으로 꾸몄다. 신라시대 김제 태수의 딸 단야낭자와 고려시대 김제 조씨 조연벽 장군의 설화를 바탕으로 만든 쌍룡 조형물이 벽골제의 상징처럼 세워져 있다. 입장료는 3,000원이다.


뭐니뭐니해도 만경평야 제일의 볼거리는 끝없는 지평선이다. 간척지로 조성된 광활면은 전국에서 유일하게 산이 전혀 없는 들판이다. 이름처럼 광활하다. 만경평야의 야산은 산이라 부르기에 애매한 수준이다. 진봉면의 봉화산(82.0m), 진봉산(61.3m), 나성산(60.9m)이 그나마 높은 축에 속하는데, 해발고도에 소수점까지 표시할 정도로 한 치가 아쉬운 높이다. 가도 가도 끝없는 길을 드라이브하는 것은 만경평야에서만 가능한 색다른 경험인데, 기준으로 삼을 지형지물이 없어 외지인은 내비게이션이 필수다. 일직선으로 뻗은 도로변엔 전봇대만 듬성듬성 꽂혀 있을 뿐이고, 성덕면의 메타세쿼이아 가로수가 그나마 원근감의 풍경을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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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골제의 쌍룡 조형물. 현재 벽골제는 제방만 남았고 저수지는 농경지로 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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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경읍 능제저수지의 일출 풍경. 모악산 자락으로 해가 떠오른다.

겨울에는 아침저녁으로 무리 지어 들판을 날아가는 철새가 장관이다. 능제저수지는 지평선 일몰이 아름다운 만경에서 일출이 돋보이는 곳이다. 전주와 김제의 경계인 모악산(794m)도 이때야 존재감을 드러낸다. 산등성이에서 솟아 오른 햇살이 저수지에 비칠 무렵이면, 수많은 철새가 밤새 웅크렸던 날개를 펼치며 붉게 물든 하늘을 가로지른다.

미즈노씨의 꿈꾸는 ‘트리하우스’

능제저수지에서 가까운 ‘미즈노씨네 트리하우스’는 내세울 만한 카페 하나 없는 만경에서 명물이 됐다. 삿포로가 고향인 미즈노(52)씨는 2009년 아내의 고향인 김제로 이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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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경읍 대동리 ‘미즈노씨네 트리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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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즈노씨의 어릴 적 꿈이 서린 집이다.

5년이나 방치된 폐가를 수리하고 집 뒤의 200년 된 느티나무에 동화에나 나올 법한 트리하우스를 지었다. 서점에서 우연히 발견한 책 표지를 보고, 잊고 살았던 어릴 적 꿈이 되살아났다. 기술도 없고 재산도 없는, 게다가 자식 다섯을 거느린 45세의 아버지가 자신의 꿈에만 매달리기는 쉽지 않았다. “꿈과 동경은 비슷하지만 달라요. 동경은 부정하거나 가지를 잘라내면 끝이지만, 꿈은 뿌리가 있어요. 아무리 잘라내도 다시 솟아 나와요. 그리고 그 꿈에 대한 확신이 서면 자신을 믿어야 해요. 이 과정이 가장 힘들어요. 스스로에게 절대 ‘안 돼’ ‘하지 마’라고 해선 안 돼요.” 트리하우스 작업은 아마 평생 계속될 듯하다고 덧붙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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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즈노씨네 트리하우스의 안채 카페 입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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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즈노씨가 안채 카페에서 커피를 내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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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문객들에게 차를 내고 가족처럼 대화하는 것이 ‘미즈노씨네 트리하우스’의 시골 한옥체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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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마 방문객들이 트리하우스에서 창 밖을 내다보고 있다.

트리하우스가 여러 매체에 소개되고 찾아오는 이들이 늘어나자, 2년 전부터는 집 전체를 체험학습장으로 활용하고 있다. 체험비는 ‘정성껏’이다. 트리하우스를 통과해 뒷마당을 지나면 안채가 나온다. 출입구에는 꾸민 듯 아닌 듯 넝쿨식물이 늘어져 있다. 동네 개구쟁이들이 뒷동산에 지은 ‘아지트’ 같다. 내부도 미즈노씨의 손을 거친 아기자기한 장식으로 가득하다. 그곳에서 그는 찾아오는 손님을 위해 커피를 내리고, 사과와 오미자차를 내놓는다. “만경의 매력은 넓은 하늘과 논이죠. 그런데 만경 사람들은 늘 보는 풍경이어서 특별한 줄 몰라요. 가족과 끝없는 논길을 걸으면 집 안에서 하지 못한 대화가 술술 나와요.” 가볍게 시작한 손님과 주인 간의 대화는 자연스럽게 인생 철학으로 이어지고, 오래된 이웃처럼 서로의 고민도 털어 놓는다. 트리하우스를 방문한 날은 정읍에 사는 다둥이 가족이 먼저 와 있었다. 시골에서 아이 키우는 이야기로 두 아버지의 대화가 끊임없이 이어졌다. 벽난로의 온기가 방안 가득 퍼졌다.


김제=글ㆍ사진 최흥수기자 choissoo@hankookilbo.com

2019.01.09원문링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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