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숙 “한달 장관 논란 때 ‘나는 끝났다’ 생각했는데…”

[컬처]by 한국일보

[24] 배우 손숙


“벼랑 끝에 진짜 배우 됐으니 인생 공짜 없다”

고난 덕에 연기도, 라디오도, 행복도 알게 돼

손숙 “한달 장관 논란 때 ‘나는 끝

배우 손숙. 14일 서울 광화문 포시즌스호텔에서 만난 그는 요즘 공연 중인 '그대를 사랑합니다'의 송이뿐처럼 여리지만 강했다. 홍인기 기자

57년 차 배우는 누구보다 깊숙이 허리를 굽혔다. 마치 오늘 처음 선 무대인 것 마냥. 공손하게 모은 손에 관객을 생각하는 마음이 고스란했다. “배우가 고마움과 예를 표할 기회는 커튼콜 뿐이니까요.”


처음부터 그랬을까. 아니다. 선배들에게 “이 작품만 하고 그만 둘 거예요”라며 투정을 부리던 시절도 있었다. 그랬던 그가 무대의 무게를 진정으로 깨달은 건, 데뷔 30년을 훌쩍 넘기고 나서다. 1999년 김대중 당시 대통령이 그를 환경부 장관에 깜짝 발탁한 게 감당하기 어려운 고통을 안길 줄이야. 장관 취임 직후 대통령의 러시아 방문 때 예정됐던 대로 연극 ‘어머니’에 출연했다. 공연을 보러 간 기업인들이 격려금을 준 게 사달이 났다. 무대 인사 때 갑작스레 건네 거절하기도 어려웠다. 봉투를 열어볼 새도 없이 극단 관계자에게 배우 밥값 등에 쓰라고 줬으니 문제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한 달이 지나 이 사건은 ‘환경부 장관, 2만 달러(2,200만원) 수수’ 사건으로 대서특필 됐다. 장관 직에 미련도 없었거니와 부친처럼 여긴 대통령에게 부담이 되기 싫어 사퇴했지만, 후폭풍은 오롯이 자신의 몫이었다.


“새벽만 되면 자다 깨서 벽을 치며 우는 나날이 계속됐어요. 너무 분해서. ‘내 인생은 이제 끝났다. 죽어버리면 이 억울함이 풀릴까’ 싶었죠.”


‘연극이고, 나발이고 다 귀찮던’ 그에게 연출가 임영웅 선생이 연락을 했다. “작품 하자.” “제가 지금 어떻게 연극을 해요…” “왜 못해? 배우가 제 자리로 돌아오는 게 당연하지. 손숙이 정치인이야? 배우지!”


그렇게 ‘그 여자의 작은 행복론’으로 손숙(75)은 무대에 다시 섰다. ‘아, 맞아. 나는 배우지.’ 무대는 그에게 위로였고 치유였다. “그때부터였어요. 연극과 새로운 사랑에 빠진 게.” 직업이 천직이 된 순간이다.


그로부터 작품을 쉰 적이 없다. 매해 한, 두 편씩 꼭 무대에 섰다. 작품이나 배역을 따지지도 않는다. “눈 뜨면 연습장에 가 있는 게 인생에서 가장 행복하고 편안한 시간이에요. 나를 구원해준 건 연극이죠.”


그의 인생에 파고가 그뿐인 것도 아니었다. 안 그래도 돈벌이와는 거리가 먼 연극배우인데, 남편이 진 빚까지 떠안아 결혼 생활의 초반은 내내 빚잔치였다. 심지어 비례대표 국회의원 제안을 받고도 “돈을 벌어야 해서 못한다”고 거절했다.


인생, 구김 없이 편하게 살 수도 있는 건데 왜 이렇게 나만 힘드나. “근데, 살아보면 다 맞는 것도, 다 틀린 것도 없어요. 그런 시절 때문에 오늘 날의 내가 있는 거죠.”


한숨과 눈물의 시간은 무대에서는 농밀한 연기, 라디오에선 깊은 공감의 밑거름이 됐다. “그러니까 인생, 공짜는 없는 거예요.”


오늘도 연극 ‘그대를 사랑합니다’의 송이뿐으로 무대에 설 수 있어 행복한 배우 손숙. 지난 14일 그의 인생 사계절을 광화문 포시즌스호텔서울에서 만나 들었다.

57년 차 배우도 첫무대선 대사를 잊었다

손숙 “한달 장관 논란 때 ‘나는 끝

요즘 그는 대학로의 ‘방탄노년단’으로 불린다. 배우 이순재ㆍ박인환ㆍ정영숙과 공연 중인 연극 ‘그대를 사랑합니다’의 인기 때문이다. 그는 무대에서 소녀 같은 노년의 여성 송이뿐을 연기한다. 홍인기 기자

-연극(‘그대를 사랑합니다’)이 끝나고 제일 깊이 고개 숙여 인사하시더군요. 아주 인상적이었어요.


“(웃음) 그랬어요? 관객에 대한 예의, 예우라고 생각해요. 이 복잡하고 바쁜 시대에, 이런 아날로그 장르를 시간과 돈을 들여 봐주러 온 관객 아니에요. 그러니 무대에 서는 배우는 그 분들에게 좋은 공연으로, 또 가장 정중한 인사로 최상의 예우를 해야지요. 게다가 무대는 관객이 만들어주는 게 크거든요.”


-예를 들면요?


“관객이 집중하면 무대와 교감도 잘 되죠. 그러면 배우는 자기가 가진 능력보다 더 힘이 나요. 반대로, 연극 볼 자세가 안돼 있는 관객이 많을 때는 배우도 제대로 연기를 하기가 쉽지 않죠. 그러니 관객과 배우는 함께 연극을 만들어 가는 관계예요. 연극이라는 장르의 매력이죠.”


-데뷔 무대 기억 나세요?


“나지요! 1963년 5월에 ‘삼각모자’라는 스페인 작품으로 연극을 시작했죠. 대학(고려대)에 들어가서 1학년 때 개교 60주년 기념으로 선ㆍ후배가 합동 공연을 했는데 운 좋게도 주인공을 맡았죠. 첫 무대니까 연습을 얼마나 많이 했겠어요. 그런데 무대에서 눈 앞이 캄캄한 거예요. 너무 당황했죠. 마당을 쓸면서 ‘여보, 어디 있어요?’ 하는 게 첫 대사였는데, 생각이 안 나서 비질만 했죠. 상대역이 (이후 남편이 된) 김성옥 선배였는데, 이미 노련한 배우였기 때문에 눈치를 채고선 ‘여보, 나 여기 있어’라고 대사를 해주더라고요. 그때야 정신이 번쩍 들었죠.”


-그 뒤에는 무사히 마쳤나요?


“네. (미소) 다행히 평도 좋았어요. 연극 공연이 귀할 때라 대학연극일지라도 신문에서도 기사로 다뤘죠. 그때 김갑순 이화여대 영문과 교수가 평을 쓰셨는데 ‘새 여배우가 한 명 탄생했다’는 구절이 있었어요. 그걸 보고서 ‘아, 배우가 됐나 보다’ 했죠. 하하.”


-첫 공연에서 마주한 관객은 어떤 느낌이었나요?


“너무 무서웠어요. 진땀만 나고. 커튼콜은 생각도 안 나고요.”


-그럼 관객의 의미를 알게 된 건 언제인가요?


“연극의 의미를 다시 인식하고, 배우로서 자부심을 진심으로 갖게 된 건 훨씬 뒤의 일이에요. 1999년도에 환경부 장관을 하기 전까지는 어떻다고 할까… 물론 연극을 쉬지 않고 했지만, 내 전부이자 죽을 때까지 할 일이라는 자각은 거의 없었어요. 그때나 지금이나 연극은 춥고 배고프고 힘든 일이니까. 언제라도 그만 둘 수 있는 일이라고도 생각했죠. 그러다가 갑자기 장관에 임명돼서 모스크바 일로 딱 한 달 장관하고 사표를 냈는데, 그건 뭐… 내 인생에서 엄청난 좌절과 절망을 안긴 사건이니까.”


인터뷰를 하기 전까지 이 일을 구체적으로 묻고 자세히 들을 생각은 없었다. 그런데 자연스럽게 초반부터 그 얘기로 흘러갔고 듣는 이도 빠져들었다. 그건 해프닝이 아닌 인생을 바꾼 전환점이었다.


“죽어버릴까 하는 극단적인 생각까지 했죠. 너무 억울하니까. 내가 아무리 양심에 나를 걸고 물어봐도 털끝만큼도 잘못한 일이 없는데. 내가 무슨 장관을 하고 싶어서 목숨 건 여자도 아니고 (그 봉투에서) 100불이라도 내가 가진 적도 없고요. 정치판도, 언론도, 이해할 수가 없었어요. 집 앞까지 기자들이 진을 치고 있었죠. 할 수만 있다면 내 속을 확 열어서 보이고 싶은데 그럴 수도 없고… 기자 앞이긴 하지만, 그때 기자들 정말 지긋지긋 했어요. 죽으면 이 억울함이 풀리려나 싶었죠. 새벽 2, 3시만 되면 깨서 벽을 치면서 울었어요.”


정치면에, 사설면에 ‘손숙 장관 2만 달러 수수’, ‘격려금 파문’으로 기사가 춤을 췄다.


“장관직에서 물러나고 나서 보름쯤 지났을 때, 제 스승인 임영웅 선생님이 전화를 했어요. 연극 하자고. 그런데 내가 그때는 연극할 상황이 아니잖아요. 연극이고 나발이고 다 귀찮지. 내 인생은 끝났다고 생각할 때니까. ‘선생님, 제가 지금 연극을 어떻게 해요’ 하니까, ‘왜 못해. 연극배우가 연극으로 돌아오는 걸 왜 못해. 빨리 와’ 하시더군요. 어른이 오라고 하시니 일단 갔어요. 대본을 하나 주시더라고요. (극작가) 차범석 선생의 ‘그 여자의 작은 행복론’이라는 작품이었죠. 제가 다시 그랬어요. ‘저 못해요, 선생님’ 그러니까 ‘왜 못해. 배우는 제 자리로 빨리 돌아와야 하는 거야. 손숙이 연극배우지, 정치인이야?’ 그 말씀에 ‘그래’ 해서 다시 시작했는데, 연극이 그렇게 위로가 되더라고요. 새로운 남자와 사랑에 빠진 것 같은 느낌이었어요. 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설렘이었죠. 수없이 했던 연습과 공연이 너무나 새롭게 다가왔어요. 손숙의 또 다른 인생이 시작된 거였죠. 그때부터는 작품을 하자고 하면 그게 어떤 것이든 그렇게 고마웠어요.”

배우로 다시 태어나게 한 ‘장관 사퇴 사건’

손숙 “한달 장관 논란 때 ‘나는 끝

나이 일흔 다섯에도 고운 얼굴과 음성을 보면 인생에 풍파는 없었을 것 같은데, 그도 한 때 절망의 나락에서 눈물로 지샌 밤들이 있었다. 홍인기 기자

-아픈 기억이긴 하지만, 당시 환경부 장관은 왜 맡게 된 건가요.


“부산에서 (연출가 이윤택 감독의) ‘어머니’라는 작품을 하고 있었어요. 그 다음 달에는 모스크바 공연까지 계약이 돼있었죠. 그런데 (청와대에서) 환경부 장관을 맡아달라는 연락을 받았어요. 내가 환경운동연합 공동대표를 했거든요. 김대중 대통령과 오랜 인연이 있기도 했고 전에 제게 ‘이제 나라 위해서 일도 좀 해야지’ 하시긴 했지만, 그게 정확히 무슨 뜻인지는 몰랐죠. 모스크바 공연 얘기까지 하면서 (직을) 받을 수 없다고 했는데, 청와대에선 되레 대통령의 러시아 국빈 방문 일정이 있으니 얼마나 좋은 기회냐며 저를 설득했죠. 고민해보겠다고 하고 전화를 끊었는데 다음날 이미 기사가 나고 임명이 돼버렸죠. 임명장 받은 뒤에 (장관이 연극 무대에 서는 것에 논란이 있을 수도 있으니) 기자들한테 모스크바 공연은 훨씬 전에 이미 예정된 것이라 취소할 수가 없다는 설명도 했어요. 그럼에도 언론에선 그게 말이 되느냐는 논조의 기사들이 나오긴 했지만.”


-격려금 사건의 전말은 뭔가요?


“모스크바 공연의 반응이 아주 대단했어요. 러시아 관객들이 모두 기립해서 박수를 치면서 ‘마마’(어머니)를 외쳤죠. 내 인생에서 그런 커튼콜은 처음이었어요. 배우는 그런 때 정말 죽어도 좋다는 생각이 들죠. 감격해서 저도 눈물이 나더라고요. 무대에서 (러시아 국립극장) 극장장과 악수를 하고 그런 정신 없는 와중에 (기업인) 두어 명이 올라와서 금일봉을 준 거예요. 나중에 들은 거지만, 대통령 수행단으로 온 기업인들이 공연을 보러 왔다가 현장에서 ‘그냥 가면 되겠느냐’고 돈을 걷어 봉투를 만든 거라더군요. 그때 무대에서 제가 통역 통해서 인사도 했어요. ‘우리나라 대통령께서 지금 국빈 방문 중인데, 푸시킨의 시를 외는 문화를 사랑하는 대통령이다. 그런데 수행단으로 온 분들이 이 공연을 보러 와서 금일봉을 줬다’고. 현장에 있던 기자들도 그 모습을 다 봤죠. 그러고 무대는 끝났고 저는 봉투를 열어보지도 않고 극단 쪽에 줬어요. 나중에 물으니 2만 불이 들었다더군요. 그때 배우들이 출연료 한 푼 받지 않고 왔는데 20여명 되니까 그들 나눠주고 남으면 밥이나 먹자고 하고 말았죠.”


기사는 한 달 뒤 터졌다.


“느닷없이 신문 기자한테 전화가 왔어요. 모스크바 가서 금일봉 받은 일이 있느냐고. 그렇다고 직후에 어딘가에 박스기사로도 났다고 했더니, ‘1만 불 받으셨다면서요’ 해요. 그래서 제가 ‘아니에요. 2만 불이에요’ 했죠. 그랬더니 그 이튿날 기사가 나기 시작하면서 ‘격려금 수수’로 사건이 터진 거죠.”


-청와대의 반응은 어땠나요.


“어떤 수석(비서관)이 날 보고 돌려주면 안 되겠느냐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그걸 누구한테 돌려주겠어요. 한 사람이 준 게 아닌데. 그리고 내가 가진 것도 아니고요. 게다가 그때 언론은 내가 무슨 뇌물을 받은 것처럼 기사를 쏟아냈는데, 돌려주면 내가 인정하는 꼴이 되잖아요. 그건 못한다고, 차라리 내가 사표를 내겠다고 하고서 다음날 바로 사퇴했죠.”


-김대중 대통령은 뭐라고 하던가요.


“기자들에게 사의를 밝히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인데 전화를 하셨어요. 대통령도 그때 많이 힘드셨을 거예요. 언론이 나를 잡으려고 그랬겠어요? 그 양반 잡으려고 한 거지. 대통령께서 ‘너무 미안하다. 연극 잘하고 있는 사람을 데려다가 말도 안 되는 난리를 겪게 만들었다. 면목이 없다’고 하시더라고요. 아니라고, 그렇게 생각한 적도 없고, 그렇게 생각하실 일이 아니라고 말씀 드렸죠. 나중에 대통령 퇴임하고 나서도 그러셨어요. ‘그때는 미친 바람이 불었을 때다. 내가 보호를 못해서 미안하다’고.”


그때 그의 답은 이렇게 달라졌다. “아니요. 저는 그걸로 인해서 얻은 게 너무 많아요. 그러니까 그런 생각 하시지 마세요.”

아버지 같던 DJ, 한때 ‘정치’ 권유도

손숙 “한달 장관 논란 때 ‘나는 끝

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까지 무대 위의 배우 손숙. 왼쪽부터 ‘담배 피우는 여자’, ‘그 여자’, ‘어머니’. 한국일보 자료사진

-김대중 대통령과는 인연이 훨씬 전부터 있었죠.


“워낙 문화예술을 아끼고 사랑하는 분이었어요. 역대 어느 지도자보다도. 소극장 공연도 시간 날 때마다 보러 오셨죠. 대통령 되기 전에 당에 계실 때는 제게 비례대표 국회의원을 하라고 권하신 적도 있어요. 라디오 방송(MBC라디오 ‘여성시대’)을 진행하면서 신문에 칼럼도 쓰면서 왕성하게 활동할 때였죠. 그때도 저는 안 한다고 그랬어요. 비례대표 순번도 당선 가능권을 주겠다는데. 정치할 생각이 없기도 했지만, 빚더미에 싸여 있을 때라 돈을 벌어야 했거든요. 그랬더니 김 전 대통령이 하루는 동교동 자택으로 불러선 ‘무슨 빚을 그렇게 졌느냐’고 하시는 거예요. 막 눈물이 나더라고요. 울면서 주절주절 하소연을 했죠. 남편이 저질렀지만 다 내 책임이 됐다고. 며칠 있다가 대통령 부부가 제 연극을 보러 오셨는데, 끝나고 이희호 여사님이 동교동에 함께 가자고 하시더라고요. 갔더니 대통령께서 방에서 봉투를 하나 들고 나오셔요. 제 손에 쥐어주시면서 ‘얼굴이 그게 뭐냐. 배우가 자기 관리를 잘 해야지. 이걸로 고기도 좀 사 먹고 해라’ 하시는 거예요. 그 돈을 받고 나오면서 대문 앞에서 펑펑 울었던 기억이 나요. 저한테는 아버지 같은 분이었어요.”


-어렸을 때부터 배우 자질이 있었나요?


“그런 생각은 못했어요. 나는 어릴 때 엄청 부끄러움도 많고 내성적이었거든요. 소풍 가서 노래 부르라고 하면 울고 그랬어요. (웃음) 그런데 혼자서는 잘 놀았죠. 장에서 할머니 치마, 저고리 꺼내다 입고서 거울 보고 흉내도 내고요. 아! 내 고향이 밀양인데, 1년에 몇 번씩 국극 공연단이나 서커스단이 왔거든요. 그러면 나팔 불며 동네를 돌아다니면서 호객행위도 하고요. 그러면 나는 공연을 가서 보고 싶어서 가슴이 두근두근 벌렁벌렁 했던 기억이 나요. 근처에 가서 숨어서는 왔다 갔다 하거나 엄마가 공연 보러 가면 쫓아가곤 했죠.”


-굉장히 부유하고도 보수적인 집안에서 자랐다고 들었어요.


“종가였죠. 배우가 되는 건 상상도 못했고요. 중ㆍ고등학교 때 꿈은 작가였죠. 한때는 기자도 되고 싶었고. 책을 엄청 많이 읽고 글 쓰는 것도 좋아했거든요.”


-그런데 어떻게 배우가 된 거예요?


“고3 때 전국고교연극경연대회란 게 있었어요. 우리 학교(서울 풍문여고)도 참가했죠. 그런데 나도 하고 싶더라고요. 배우는 오디션으로 뽑는다는데 그때 내 성격에 거기 가지는 못하고요. 가수 박인희가 1년 후배인데 춘향을, 나와 동기인 배우 김을동은 방자를 맡았죠. 나는 고민 하다가 꾀를 내서 총무를 했어요. 하하. 그리고는 예산이 잘 집행되는지 봐야 한다는 핑계로 연습장에 가서 보고는 했죠. 실제 배우들이 1명씩 파견을 와서 지도도 해줬는데, 그때 온 게 김성옥씨였어요. 말하자면 연출 선생님으로 온 거죠. 내가 총무랍시고 가 있으니까 김성옥씨가 ‘너도 이왕 여기 왔으니 뭘 좀 하라’면서 조연출을 시키더라고요. 나야 ‘얼씨구나’ 달라 붙어서 합숙 연습도 하고 두 달쯤 열심히 활동했죠. 고3이 미쳤느냐고 선생님들은 난리가 났지만. 나중에 대학에 갔더니, ‘그때 그 손숙이가 우리 학교 들어왔더라’ 하면서 선배들이 연극하자고 잡으러 왔죠. (웃음)”


-연극이 인생으로 찾아온 거네요.


“그러니까요. 나는 살면서 내가 나서서 ‘이걸 할 거야’ 한 적이 없어요.”


-그때부터 배우의 길로 접어든 건가요. 고등학교 때 공부도 잘해서 좋은 대학에 들어갔는데 배우 한다고 하니 부모님 반응은 어땠나요?


“어머니는 난리가 나셨지. 그때 목 매셨어요.”


-네?


“진짜 목을 매셨어요. (한복) 치마끈으로. 거기다 내가 1학년 때 김성옥씨를 다시 만나서 연애를 했거든요. 연극에 푹 빠져있을 때고, 그 양반은 하늘 같은 선배였으니, 선배가 하는 말은 하느님 말씀 같았죠. (웃음) 대학 3학년 되던 해 결혼 하겠다고 하니까 한복 치마를 쫙 찢으시더니 ‘너 죽고 나 죽자’면서 목을 매셨죠. 우리 어머니는 그 시골에서 딸들 공부 시키겠다고 집안 반대 무릅쓰고 서울 올라오신 분이니까. 남들 가기 어렵다는 대학 들어가놓고 결혼하겠다고 연극배우를 데려왔으니 기절 하시지. 내 딸이 그러면 죽이고 싶을 것 같아요. 하하.”


-그래서 어떻게 하셨어요?


“그래도 결혼을 하겠다는데 어떡하겠어요. 자식 이기는 부모 없으니. 또 내가 고집이 셌거든. 젊었을 적에는 싫고 좋은 게 너무나 분명했고, 사람이 면도날 같았어요. 내가 생각해도 재수 없었죠. (웃음) 지금 생각하면 너무나 어리석었지만, 그 때는 내가 판단하기에 그게 옳았던 거예요. 사랑에 조건이 왜 필요하냐면서. 그 사람 하나 보고 결혼했죠. 그런데 살아보니 어른 말이 다~ 맞어.”


-하하. 그걸 언제 깨달으셨어요?


“결혼해서 금방, 깨달았죠. 어머니는 그래서 돌아가실 때까지 우리 애기 아빠를 안 좋아했어요. 반대에도 무릅쓰고 데려갔으면 호강 시켜주지는 못할지언정 마음 고생이라도 안 시키면 좋은데 말이에요. 대학은 중퇴하고 애는 셋이나 낳아서 키워야 했고 뭐가 이쁘겠어요? 거기다 빚은 내가 다 감당하고 있으니.”


-제가 어머니 같아도 그랬을 거 같아요.


“그래서 우리 어머니한테 제일 죄송해요. 근데 살아보니 다 틀린 것도 없고 다 맞는 것도 없어요. 그때는 너무 힘들었지만 그것 때문에 오늘날의 내가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물론 지금에야 드는 생각이지만. 힘들었을 때 그런 생각했으면 성인(聖人)이지. 그때는 죽을까, 살까, 이 남자를 어떡할까 방방 뛰었죠. 그래도 안 죽고 살았으니 여기까지 왔어요. 자존심은 하늘 같아가지고 TV 드라마나 영화는 할 생각도 않고요. 늘 목을 쳐들고 다녔으니까 남 보기에는 멀쩡했겠지만. 누구한테 아쉬운 소리 할 수도 없고 그냥 죽어야 하나 했던 시절이에요. 그때 나를 구원해준 게 연극과 라디오죠.”

전국을 들썩인 ‘여성시대’ 진행의 비결

손숙 “한달 장관 논란 때 ‘나는 끝

MBC 라디오 ‘여성시대 손숙ㆍ김승현 입니다’를 진행하던 때의 손숙씨. 한국일보 자료사진

-라디오 방송 진행을 꽤 오래 하셨죠.


“국회의원도 빚 갚아야 하니까 못한다고 했던 시절인데, 갑자기 라디오 방송 PD한테 연락이 왔어요. 왜 날 보자고 하나 싶었죠. 만나서는 편지 하나를 주더니 읽어봐 달라는 거예요. 지금 생각해보면 그게 일종의 오디션이었죠. 주부의 사연이었는데 내용이 아주 슬펐어요. 그런데 나도 거의 (벼랑) 끝까지 갔던 상황, 절망의 밑바닥에 있을 때니까 그 편지를 읽는데 막 눈물이 나는 거야. 그래서 펑펑 울면서 읽었던 기억이 나요. 그러더니, 며칠 있다가 라디오 진행 하겠느냐고 연락이 와서 깜짝 놀랐죠. 그래서 시작한 ‘여성시대’가 그야말로 대박이 났죠. 전국에서 난리가 난 거예요.”


-사연 읽어주시던 음성이 아직도 기억 나요.


“그러니까 사람이 공짜는 없는 거야. 내가 고통도, 괴로움도 안 겪었다면 (사연 읽는 게) 그렇게 절절하지 않았을 거예요. 나도 절망스럽다고 생각했는데, 방송국으로 왔던 편지가 전부 나보다 더 아픈 사연들이더라고요. 고부갈등, 남편과의 문제, 경제적인 문제… 그 때 내 별명이 수도꼭지였어요. 아마 평생 울 걸 그때 다 울었을 거예요. 게다가 다 내가 겪고 있는 일들이기 때문에 아마 (사연에다 해주는) 멘트도 진심이 담길 수밖에 없었죠.”


-라디오 진행이 큰 위로가 됐군요.


“나를 치유하는 기간이었어요. ‘왜 나한테만 이런 일이 생기나’ 싶은 원망, 분노 이런 것들이 치유되기 시작했던 게 라디오 진행 덕분이었죠. 매력도 있었고요. 또 돈도 벌 수 있잖아요? 그래서 그때부터 빚을 갚기 시작했어요. 뭐, 나는 빚이 얼마였는지도 정확히 모르고 갚기만 했지만, 라디오 출연료가 생기니까 ‘그래, 한 번 갚아보자. 그럼 언젠가는 끝이 나겠지’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도 살다 보면 평생 고생하지 않고 사는 삶이 부러울 때도 있잖아요.


“그래도 실제 삶을 들여다 보면 그런 사람 많지 않아요. 평생 남편이 벌어다 주는 돈으로 다이아 반지 끼고 밍크 코트 입고 골프 하고 다니는 사람도 나 같은 사람을 부러워하더라고. 그렇게 살면 재미가 없거든. 그래서 세상은 참 공평해요.”


-인생의 깊이가 다르겠죠.


“그렇죠. 근데 이기적인 게, 내 자식들은 그렇게 (편하게) 살았으면 좋겠어…”

고인이 된 어머니가 객석에 또렷이

손숙 “한달 장관 논란 때 ‘나는 끝

그는 성실한 배우다. 지금까지 쉬지 않고 한 해 한, 두 작품씩 꼬박꼬박 연극 무대에 섰다. 시련이 새삼 무대의 의미를 자각하게 해준 덕분이다. 홍인기 기자

-연기를 하면서 특별히 염두에 두는 게 있나요?


“무대에서 품격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내 스승 이해랑 선생님이 그러셨죠. ‘거지 역할도 배우가 하면 품격이 있어야 하는 거야. 아니면 진짜 거지를 데려다 놓지.’ 그러니까 책도 많이 읽고, 남의 공연이나 인접 예술도 많이 보고 들어야 하죠. 그래서 연기 시작하는 대학생들한테 공연만 하지 말고 배낭 매고 여행도 다니고 특히 책을 많이 읽으라고 하죠.”


-잊을 수 없는 역할이 있다면 뭘까요?


“이윤택의 ‘어머니’. 그 작품 시작할 때 앞으로 20년 동안 하겠다고 했는데, 2019년 올해가 20주년 되는 해예요. 해마다 공연을 했죠. 그런데 (이윤택씨한테) 저런 일(성추행 가해 의혹)이 생겨서 작년부터 하지 못하고 올해도 20주년 공연 계획조차 못 잡고 있죠. 사람이 죄를 지었으면 벌을 받는 건 당연한데, 작품은 어떡하나요.”


-‘어머니’는 어떤 의미가 있는 작품인가요.


“한 시대를 살아낸 어머니들의 이야기죠. 일제 강점기를 겪고 한국전쟁을 겪고 그 와중에 자식을 살리려고 안간힘을 쓰고 그런 강인한 정신력을 지닌 어머니들의 얘기. 바로 내 어머니, 할머니의 얘기이기도 하죠.”


-같은 작품을 거의 20년간 했는데, 그래도 해마다 다른가요?


“다르죠~! 엄청 달라요. 나이가 들수록 나오는 경륜에서 나오는 대사들이 있죠. 그래서 나이 든 배우는 젊은 역할을 할 수가 있어요. 그런데 젊은 배우는 (머리칼에) 흰 칠을 해도 그 느낌이 안 나오죠.”


-대사 중에 혹시 각별한 게 있나요?


“극의 맨 마지막에 어머니가 죽으면서 하는 대사가 있어요. 고향 얘기를 하면서 본적을 대는데, 이윤택씨가 진짜 내 본적을 말하라고 해서 ‘경상남도 밀양군…’ 하는데, 그때마다 너무 울컥했죠. 내 어릴 때 고향의 그림이 머릿속에 휙 나오거든요. 공연하다가 정말 신기한 경험도 했죠.”


-뭔가요?


“밀양에 가서 공연을 한 적이 있어요. 어머니가 아주 보수적인 집안의 종부로서 자존심도 대단하셨거든요. 그러니 고향에서 내 딸이 ‘딴따라’라고 말하는 건 창피한 일이었죠. 나중에 사회적으로 이름이 좀 알려지고, 장관도 하고 하니까 마음을 여셨지만. 그래도 내 공연 보러는 안 오셨어요. 그런데 어머니 돌아가시고 나서 내가 나이 육십 넘어서 처음으로 고향에서 ‘어머니’를 공연하게 된 거죠. 그날은 기분이 이상하더라고요. 극의 3분의 1쯤이 지났을까 객석을 보는데 어머니가 딱 앉아 계신 거예요! 너무나 선명하게 보였어요. 하얀 치마, 저고리를 입으시고는 객석 중앙에. 돌아가신 양반이 말이죠. 그날 공연을 어떻게 했는지 모르겠어요. 끝나고 나서 엉엉 울었죠. 그런데 이윤택씨가 막 나한테 뛰어 오더니 ‘선생님, 오늘 공연 최곱니다, 최곱니다!’ 하더라고요. 내 상상인 건지, 착각인 건지, 모르겠지만.”


-어머니가 딸의 공연을 보러 오신 것 같네요.


“잠깐이긴 하지만, 오신 것 같아요. 오셨겠죠? 오셨을 거예요.”

이제 죽음을 생각해야 할 나이

손숙 “한달 장관 논란 때 ‘나는 끝

손숙씨는 요즘 틈만 나면 정리하고 버린다. 행복은 비우는 일에서 오기도 하기 때문이다. 홍인기 기자

-인상이 예전보다 부드러워졌어요.


“손을 안대니까. 늙은 얼굴은 건드리면 안돼요. 손을 대기 시작하면 나이가 주는 품위가 없어져요. 그런데 건드린(성형을 한) 사람은 인상이 세 보이죠. 그러면 노역( 役)도 안 들어와요. 배우는 나이만큼 보여야 해요.”


최근 우리는 손숙씨를 영화에서도, TV 드라마에서도 종종 본다. 영화 ‘아이 캔 스피크’에서는 미국 하원 의회의 청문회 증언을 앞두고 치매가 악화돼 가지 못한 일본군 위안부 피해 할머니 정심 역할을 했다. tvN과 JTBC 드라마 ‘나인룸’과 ‘뷰티 인사이드’에서도 주름 깊고 병든 어머니를 연기했다. 연기의 비중을 수평적으로 따진다면 조연이었을지 모르지만, 깊이로 따진다면 시청자의 마음에 강렬한 자국을 남긴 역이었다.


-최근에는 드라마에도 많이 출연하셨죠.


“예전에는 섭외가 와도 드라마는 거의 안 했어요. 한때는 잘난 척 하느라고. (웃음) 그러다 보니까 섭외가 잘 오지 않기도 했고요. 그런데 지금은 그렇지 않아요. 아무 역이든 무슨 상관이야. 역할이 크지 않아도 재미있으면 해요. 연극 스케줄과 조절만 된다면. 예전엔 한 나이가 팔십쯤 되면 은퇴를 할까도 생각했어요. 그런데 지금은 ‘왜 은퇴를 해’ 해요. 내가 연출가들한테 그러죠. ‘나는 죽을 때까지 배우를 할 거니까 대사 없는 배역을 줘도 된다’고. 돌아가신 배우 김동원 선생님이 연출가 오태석씨 연극 작품 중에 돌아 앉아서 묵묵히 국밥을 잡숫는 역할을 하신 적이 있어요. 그게 정말 멋있어 보였죠. 돌아앉은 모양새에 젊은 배우는 절대 흉내 낼 수 없는 아우라가 있었죠.”


-무대가 좋으세요?


“그럼요. 내 인생을 따져보면 반은 현실에서, 반은 무대 위에서 산 거잖아. 그러니 뭐가 내 진짜 인생이냐 가릴 수가 없는 것 같아요. 현실의 나가 나인지, 무대 위의 나가 나인지. 막이 오르기 전 깜깜한 무대는 배우 밖에 경험하지 못하는 시간과 공간이거든요. 스탠바이 하는 그 시간이 좋기도 하고 슬프기도 편하기도 하죠. 그러다가 딱 나가서 조명을 받는 순간부터 다른 인물이 되는 거잖아요. 연출가도 경험하지 못하는 일이죠.”


예상하지 못한 얘기가 그의 입에서 나왔다. 아마도 친구였던 배우 고 윤소정씨 생각이 났던 모양이다. 고인은 2017년 6월 패혈증으로 유명을 달리했다.


“우리 나이쯤 되면 떠나야 될 걸 생각해야 하거든요. 어떻게 잘 가야 할까 하는. 윤소정이 갈 때도 그런 생각 많이 했죠. 나도 준비가 필요하지 않나 싶더라고요. (경기) 파주에 가면 아주 재미있는 성당이 있어요. ‘참회와 속죄의 성당’이라는 한옥 성당이에요.”


-가본 적이 있어요.


“그래요? 거기 우리 집이 있는데!”


-집이요?


“내가 돌아갈 집. 거기에 납골당을 예약해놨어요. 누군가 알려줘서 가봤는데 아주 환해서 마음에 들더라고요. 여기다 미리 하나 해놓자고 했더니 딸이 ‘엄마, 왜 그래’ 하더라고요. 그런데 언젠가는 갈 거 아녜요? 갑자기 가면 자손들이 당황하잖아요. 그래서 예약을 해뒀더니 정말 기분이 좋더라고요. 죽으면 화장을 해서 납골당에 갈 거라고 했죠. (골분 중에) 아주 조금만 싸서 밀양의 우리 엄마 옆에 묻고.”


-따님 마음도 이해가 돼요.


“나이가 있잖아. 솔직하게 말하면, 이제 나는 언제 가도 아쉬운 나이는 아니에요. 늘 생각을 하고 준비를 해둘 필요가 있죠. 소정이가 너무나 갑자기, 느닷없이 갔어요. 가기 2주 전 여행도 함께 했는데. 소정이 딸도 배우잖아요. 오지혜. 내가 그랬어요. 너희 엄마가 부럽다고. 오래 앓지 않고 가족 고생 안 시키고 갔으니. 또 죽기에는 이쁜 나이잖아. 나는 제일 듣기 싫은 소리가 ‘100세까지 사세요’야. 그러니 나는 소정이가 이쁜 나이에 저답게 갔다고 생각해.”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건 그 동안 후회 없이 열심히 살아서 아닌가요.


“맞아요. 그리고 비우고 버려야 해요.”


-그러면 유서도 혹시 써놓으셨어요?


“네, 유언장 써놨어요. 나는 연명치료 같은 거 하기 싫다고. 억지로 (숨만) 살리는 일은 안 했으면 좋겠어.”


-세상이 어떤 사람으로 기억해주면 좋을까요.


“나 그런 거 상관 없어요. 간 다음에 어떻게 기억하느냐가 뭐가 중요해. 그냥 ‘배우 손숙’, 조금 더 붙이면 ‘열심히 살다 간다’, 그 정도면 되지 않겠어요?”

요즘의 힐링, 송이뿐

손숙 “한달 장관 논란 때 ‘나는 끝

젊은 시절 ‘도도한 도시 여자’ 이미지가 강했던 그는 요즘 한결 부드러워진 모습으로 연극 무대는 물론, 드라마나 영화에서도 얼굴을 보인다. 그의 연기에선 나이가 준 축복 같은 지혜가 묻어난다. 홍인기 기자

그는 요즘 “예쁜 나이에 자기답게 갔다”는 배우 윤소정이 주연 송이뿐 역으로 출연한 영화 ‘그대를 사랑합니다’의 연극 무대에 서고 있다. 연극의 광고 타이틀처럼 노년의 사랑을 다룬 ‘노( )맨스’ 작품이지만, 작가 강풀의 웹툰이 원작이라 20대부터 중ㆍ장년층까지 관객의 폭이 넓다. 송이뿐은 굽이굽이 삶의 고비를 넘기면서 생긴 마음의 생채기에도 소녀 같은 순수함과 나무 같은 강인함을 지닌 캐릭터다. 김만석(박인환ㆍ이순재 분)을 만나 사랑의 감정을 느끼면서 비로소 존재의 특별함도 알게 된다.


-평일 공연을 갔는데, 빈 자리가 거의 없더라고요.


“우리가 티켓파워 1위예요. 하하. 별명이 ‘대학로의 방탄노년단’이에요. 얼마나 감사해요. 이런 (노년의) 연극이 (흥행) 된다는 게.”


-송이뿐이란 역할이 무척 매력이 있지요.


“내가 송이뿐이한테 힐링을 받는 거 같아요. 대사 중에 할 때마다 늘 가슴이 짠한 게 있어요. ‘내가요, 이름이 생겼어요. 송이뿐이. 그 전에는 굉장히 보잘것없는 돌멩이 같은 노인이었는데, 이름이 생기니까 아주 특별한 사람이 된 거 같아요. 그리고요, 쓸 수도 있게 됐어요.’ 사람의 희망이 느껴지죠. 그걸 느낄 수 있다는 게 대단하죠.”


-여리고 작지만 강인한 역할이죠.


“그럼요. 강인하죠, 강인하죠. (사랑하는 사람을 만났는데도) 나중에 혼자 고향으로 돌아가 살겠다는 용기도 대단하지 않아요?”


-그런 캐릭터로도 살아볼 수 있으니, 배우란 직업이 부러워요.


“매력 있는 직업인 건 확실해요. (웃음)”


-요즘도 행복하세요? 표정이 좋아 보여서요.


“매일 행복해요. 연극 하고 있잖아요. 동료 배우들 만나서 차 마실 때도 좋고, 분장실에 앉아서 수다 떨 때도 재미있고, 애들 밥 한 끼 사줄 때도 좋고, 지방 공연 가면 기차 타고 가니 좋고요. 요샌 아주 좋아요. 행복이 뭐 특별한 건가.”


-지금까지 56년간 무대에서 산 배우 손숙이 삶의 길을 걸으며 지키고자 한 삶의 도는 무엇인가요?


“(가톨릭) 기도 중에 ‘내가 범한 모든 죄, 남이 나로 인하여 범한 죄, 이 밖에 알아내지 못한 죄도 모두 용서하여 주십시오’ 하는 게 있어요. 그 기도가 요즘 절실하게 와 닿아요. 내가 알든 모르든 살면서 나로 인해 남이 상처 받았다면 다 용서해주셨으면 좋겠어요. 남을 아프게 하는 일은 하지 말자고 생각하며 살았죠. 지금도 나는 그저 따뜻한 노인이었으면 좋겠어요. 그래서 요즘 아침에 일어나면 ‘오늘 하루도 남 욕하지 말기. 늘 웃기’ 라고 혼자 다짐해요. 품위 있는 노인이 되자고. 지금까지 살아온 게 다 감사한 일이죠. 내가 이 나이에 여기 와서 차도 마시고 인터뷰도 하고 연극 하자고 불러주는 곳도 있으니 얼마나 고맙고 행복한 일이에요? 그러니 뭐 불만이 있고 바랄 게 있겠어요.”


운이 좋았다. 손숙씨는 “요즘 인터뷰를 하지 않는다”며 “그런데 왜 하겠다고 했는지 모를 일”이라고 했다. 보이지는 않지만 존재하는 힘이 도운 것 같다. 그래서 다행스럽게도 그가 살면서 터득한 진리, 고통이 알려준 행복, 삶의 묘미를 이렇게 마주 앉아 듣고 글로도 전할 수 있게 되었다. 송이뿐의 대사를 이렇게 변주해야겠다.


‘내가요, 의미가 생겼어요. 눈물과 고난으로. 그 전에는 언제든 그만 둘 수 있는 그저 평범한 배우였는데, 절망의 끝에 다시 선 무대에서 아주 특별한 사람이 된 거 같았어요. 그리고요, 웃을 수도 있게 됐어요. 인생, 그래서 살아볼 만 하지 않나요?’


김지은 기자 luna@hankookilbo.com

2019.01.28원문링크 바로가기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 등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Copyright © ZUM internet Corp.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