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결코 패셔너블하지 않겠다"
![]() 수트 차림의 이세돌(왼쪽) 바둑기사와 캐주얼한 후디 차림의 세르게이 브린 구글 창업자. IT천재들이 만든 건 인공지능만이 아니다. 그들은 새로운 패션코드 'IT시크'도 유포시키고 있다. 구글 제공 |
프로 바둑기사 이세돌 9단이 마침내 구글의 바둑 인공지능 프로그램 알파고를 꺾은 날. 한 장의 사진이 한반도를 강타했다.
세르게이 브린 구글 공동창업자가 두 손으로 이 9단의 손을 꼭 쥔 채 깍듯하게 인사하는 모습의 사진이다. 승리와 패배를 대하는 인간 태도의 품격을 보여준다는 의미에서 역사적 한 장면이라 부를 만한 사진이었지만, 수트 차림의 이 9단과 덥수룩한 머리에 회색 후디(모자 달린 캐주얼 재킷)를 입은 브린의 대조적 차림새도 강렬한 콘트라스트를 이뤘다. ‘다수에게 모습을 드러내는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반드시 격식을 갖추어 옷을 입어야 한다’는 한국사회의 강고한 규율은 이 순간, 전혀 가동되지 않았다. IT업계가 세계에 끼친 영향은 비단 인터넷과 인공지능만이 아니다.
면 티셔츠ㆍ청바지ㆍ스니커즈 ‘IT 시크’
주기적으로 세계 패션계를 호령하는 프랑스의 패션 코드는 ‘프렌치 시크’다. ‘무심한 듯 시크하게’라는 의미의 이 말은 공들여 꾸민 것 같지는 않지만, 온 몸에서 세련됨이 뿜어져 나오는 차림새를 말한다. 방금 미용실에 다녀온 듯한 머리, 메이크업 아티스트의 손길을 거친 것 같은 화장, ‘신상’으로 빼 입은 듯한 옷차림을 비웃는 듯한 뉘앙스의 용어다. ‘나 멋 부렸어요’가 가장 멋없다는 이 프랑스적 애티튜드의 단어는 이제부터라도 멋쟁이가 되고 싶은 패션 입문자에게는 들을수록 신경질이 나는 말이기도 하다.
![]() 테크 유니폼을 재해석한 막스 마라의 지난해 ‘기키 시크’ 컬렉션 |
프렌치 시크를 실리콘밸리가 재해석한 걸까. 감지 않은 머리, 밀지 않은 수염, 갈아입지 않는(것처럼 보이는) 면 티셔츠와 바지, 무심하게 걸친 후디…. ‘패션의 교황’ 칼 라거펠트가 마주쳤다면 준엄하게 꾸짖었어야 마땅한, ‘패션’이라 부를 수 없는 이 패션은 그러나 이제 엄연한 패션코드로 자리잡았다. ‘테크 유니폼’이라는 비아냥을 받을 정도로 획일적인 패션코드로 시작했지만, 럭셔리 디자이너 브랜드의 런웨이에서도 뿔테 안경에 회색 면 드레스, 굽 낮은 로퍼를 신은 ‘기키 시크 룩(geeky chic look)’의 모델을 종종 마주칠 수 있다. 괴짜를 뜻하는 ‘긱(geek)’과 ‘공부 잘하는 얼간이’를 일컫던 ‘너드(nerd)’는 실리콘밸리의 IT 벤처기업가들 덕분에 제2의 긍정적 의미항을 사전에 추가 등재했다. ‘컴퓨터밖에 모르는 괴짜 천재.’ 그 앞에 ‘패션 따위는 관심도 없는’이라는 의미가 괄호 안에 묶여 있지만, 이제는 패션에 대한 그 태도마저 하나의 패션이 돼 ‘너디 시크’, ‘기키 시크’ 등으로 불리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테크룩’이란 구체적으로 어떤 차림새일까. 웹 테크놀로지 블로그인 ‘리드라이트(ReadWrite)’가 시각화한 ‘테크 유니폼’에 따르면, “머리는 ‘나 방금 일어났어요’ 스타일에, 수염은 턱수염 중심으로 숱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면 티셔츠에 바지는 진한 워싱 청바지를 입는다. 티셔츠 위에 걸치는 후디는 회사 로고가 박힌 걸로 입어 미묘하게 ‘나는 중요한 일 하는 사람’임을 알린다. 신발은 스니커즈를 신는데, 달리지는 않아서 흙 같은 건 안 묻어 있다.” 여성의 상투적 패션코드에서 ‘명품백’의 위상을 차지하는 건 손목에 찬 각종 웨어러블 기기. 애플워치부터 페블워치, 핏빗 만보계까지 각종 스마트워치가 필수다. 접이식 자전거 픽시, 다양한 IT기기들을 담고 다닐 메신저백, 테이크아웃 커피도 빼놓을 수 없다.
![]() <참조: IT 블로그 '리드라이트'의 '테크 유니폼'> 삽화 박구원기자 |
젊음과 성공에 대한 숭배가 ‘IT 시크’ 낳아
그렇다면 한국의 IT맨들은 어떨까. 국내 대표적 IT기업인 A게임개발업체와 B전자기업의 직장인에게 출근 옷차림에 대해 물었다. A사는 스트라이프 남방이나 면티에 회사 후디를 입고, 아디다스 삼선 슬리퍼 대신 크록스를 신는 게 ‘교복 차림’이라고 했다. B사는 흔히 ‘폴로 셔츠’라고 부르는 칼라 달린 면티 ‘피케 셔츠’에 ‘베이지색 면 바지’가 유니폼이라고 한다. 실리콘밸리의 테크 유니폼보다 조금 더 격식을 갖춘 차림새지만, 큰 틀에서는 대동소이하다. 왜일까. 이런 옷은 입기만 하면 창의성이 봇물 터지듯 절로 터져 나오는 걸까.
![]() '실리콘밸리 시크'의 전도사들. 왼쪽부터 세르게이 브린 구글 공동창업자, 일론 머스크 테슬라모터스 대표, 마크 저커버그 페이스북 대표, 작고한 스티브 잡스 전 애플 대표 |
패션의 완성은 얼굴도 몸도 아닌 성공?
인류를 위한 새로운 도구를 창조해내겠다는 지적 의지와 검박한 삶의 태도는 일종의 패키지로 인간의 뇌내에서 작동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반전의 기미가 없는 만성적 경제위기가 패션에 대한 근원적 피로를 촉발하고 있기 때문일 수도 있다. 꾸민 듯 안 꾸민 듯 평범한 ‘놈코어’ 코드의 강력한 위력도 ‘IT시크’와 접속된다. 테크업계의 옷차림이 멋있다고 생각하든, 멋없다고 생각하든, ‘IT시크’가 기술만능시대의 의미망 속에서 강력한 패션코드로 자리잡은 것만은 확실하다. 이런 옷차림을 소개하는 미국 대중 언론 기사의 제목은 언제나 ‘실리콘밸리 엘리트처럼 입는 법’이다. 테크 유니폼을 입은 채 칸트의 ‘판단력비판’을 읽고 있는 사람을 상상해 보면 ‘IT’와 ‘실리콘밸리’가 생성하는 의미망이 얼마나 강력한 지 금세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