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 가기

[ 여행 ]

그냥 그렇게 있어줘 고마운 ‘벽지노선 열차’

by한국일보

“벽지노선(僻地路線)을 아시나요.”

 

열차를 한 번 운행할 때마다 나가는 돈이 들어오는 돈보다 두 배 이상 많다면 이 노선은 살아남을 수 있을까. 누군가에게 열차는 낭만이지만, 어떤 이에겐 돈을 벌어야 하는 수익사업이니 말이다. 경제 논리는 차갑지만 거부할 수도 없는 게 엄연한 현실. 하지만 이런 논리가 무시되는 곳이 설핏 눈에 띌 때가 있다. 왜 그게 가능한지 따져볼까 싶다가도 ‘그냥 그렇게 있어줘서 고맙다’는 마음만 가지면 되는 곳. 굳이 비유하면 코 흘리던 시절 문지방이 닳도록 드나들던 초등학교 앞 문방구가 십수년이 지나도록 용케 문을 닫지 않고 있는 모습을 봤을 때 가지는 애틋함이라고나 할까.

 

대한민국엔 현재 7개 벽지노선이 있다. ‘홀로 뚝 떨어져 있는 궁벽한 땅’이라는 벽지가 가진 사전적 의미처럼 손익분기점에 미치지 못하는 승객을 태운 채 막대한 적자(운행비용이 수익의 2배)를 안고 오지를 달리는 열차들이다. 지역주민의 발(교통수단)이 되기도, 추억의 여행상품이 되기도 한다는 벽지노선 열차에 본보 견습기자들이 몸을 실어보기로 했다. 10월의 가을날 열차(7개 노선 중 5개)를 타고 강원, 경상, 전라도의 낯선 풍경 아래 사람들을 만나고, 짬짬이 간이역에 내려 주변 풍경을 둘러본 그들은 한마디로 경험을 전했다. ‘마냥 좋았다’고.

영동선, 오지에서 만나는 산타클로스

11일 오전 10시30분, 양원역에 도착한 백두대간협곡열차(V-train)에서 내린 관광객들이 역 주변의 장터를 구경하고 있다. 양원역에는 기차 도착시간에 맞춰 마을 주민들이 떡과 전병 등 기차여행의 필수품, 주전부리를 파는 장이 열린다. 오세훈 기자

강원 강릉역과 경북 영주역을 잇는 영동선의 묘미는 누가 뭐래도 태백산맥의 골짜기와 낙동강의 굽이굽이를 갈지(之)자로 달리며 청정한 숲의 숨결을 느낄 수 있다는 데 있다. 그래서 7개 벽지노선 중 가장 오지인 강원과 경북 두메산골을 지날 때면 고개를 들어 창 밖을 봐야 하고, 창문 틈으로 스며드는 은은한 숲의 향기를 조금이라도 더 맡기 위해 심호흡을 해야만 한다. 일제강점기던 1940년 석탄 등 자원을 운반하던 산업철도로 만들어진 노선이 현재는 승객 대부분을 산악 트레킹 애호가들로 채우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강릉역에서 출발한 기차는 동해역을 지나 태백산맥으로 진입한 뒤에도 한 시간이나 더 달려 경북 봉화군 승부역에 도착했다. 승부역은 봉화군 일대 영동선의 오지마을 3역(승부 양원 분천역)을 잇는 트레킹 코스 ‘낙동정맥트레일’과 ‘낙동강세평하늘길’의 시작점. 낙동정맥트레일은 승부역 남쪽 배바위산을 넘어가는 10㎞의 산악 코스로 산속을 흐르는 개울소리와 풀내음이 일품이며, 낙동강세평하늘길은 낙동강 상류 비경이 일품인 12㎞의 평지 코스다. 두 코스를 모두 정복했다는 민경숙(45)씨는 “나만의 비밀 장소로 남겨두고 싶을 정도로 고요하고 풍경이 좋다”고 활짝 웃었다. 단짝 친구와 함께 이 곳에 사흘째 푹 빠져 있다는 말과 함께.

 

승부역에서 길을 따라 남쪽으로 5㎞쯤 걷다 보면 양원역이 반겨준다. 양원역은 과거 마을에 역이 없어 옆마을에서 걸어 다녀야 했던 주민들이 1988년 승강장, 대합실, 명판까지 직접 만든 국내 유일의 민간 역사로 유명하다. 그만큼 주민들에게는 역 자체가 자부심이다. 이곳에서 나고 자란 노명자(70)씨는 “사람들이 대추 팔아서 번 돈으로 (역을) 만들었다”고 했다. 지금은 마을 할머니들이 역 주변에 판을 벌리고 떡과 전병, 막걸리 등을 팔아, 걷다 지친 여행객이 땀을 식히는 쉼터 노릇을 하고 있다.

 

분천역은 양원역에서 6㎞ 떨어진 트레킹 코스의 종착지로, 코레일과 봉화군이 손잡고 2014년 ‘산타’ 테마로 리모델링했다. 역사의 빨간 굴뚝과 주변의 산타, 루돌프 썰매 조각상이 북유럽에 온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김덕기 분천역 부역장은 “매년 여름과 겨울, 두 번 산타마을 축제가 열리는데 가족 단위 여행객도 많이 찾는다“고 했다.

정선선, 우리 소리가 깃든 풍경

청량리로 향하는 정선아리랑열차(A-train)가 12일 오후 6시쯤 선평역으로 들어오고 있다. 선평역에는 2015년부터 주민들이 관광객을 대상으로 장터를 열었지만, 관광객이 줄어들면서 모든 가게가 문을 닫았다. 승객 하나 없는 선평역에는 고요함만 가득하다. 오세훈 기자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정선아리랑’의 발상지, 강원 정선군 일대 6개역(민둥산 별어곡 선평 정선 나진 아우라지역)을 관통하는 정선선은 벽지노선 중 운행 거리(45.9㎞)가 가장 짧다. 영동선처럼 자원 개발 목적으로 1966년 개통한 뒤 석탄산업 몰락과 함께 위기를 맞았지만, 최근 우리 소리에 관심 많은 관광객이 몰려들면서 재도약을 시도하고 있다.

 

기차는 민둥산역을 출발해 선평역을 지나 정선역에 도착했다. 역에서 15분을 걷자, 아리랑의 A부터 Z까지 체험할 수 있는 ‘아리랑센터’가 모습을 드러냈다. 정선역을 떠나 20분이면 도착하는 종착지 아우라지역. 태백에서 흘러온 골지천, 정선을 지나온 송천이 한데 어우러지는 곳이라 해서 아우라지라 이름 붙은 이곳은 초승달다리에서 바라본 남한강 물결이 특유의 아름다움을 뽐낸다. 아내와 손을 꼭 잡고 다리를 건넌 윤정식(66)씨는 “우연히 들렀는데 강물에 비치는 햇빛도 예쁘다”고 감탄했다.

 

이곳은 조선시대 뗏목꾼(뗏꾼)들이 태백산맥의 목재를 한양으로 운반하던 뗏목터로도 알려져 있다. 멀리 떠난 뗏꾼들을 그리워하는 아낙네들의 사연이 바로 정선아리랑 애정편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아리랑 고개고개로 나를 넘겨주게~ 우리들 연애는 솔방울 연애인지~ 바람만 간시랑 불어도 뚝 떨어진다~’ 어색한 음정과 박자로 아리랑 한 가락을 읊조리다 보면 강가 나룻터에는 이를 기리고자 만든 정자 여송정과 떠난 임을 그리워하는 아우라지처녀상이 보인다. 아우라지역 바로 옆 정선아리랑 전수관에서 만난 창예능보유자 김형조(66)씨는 “어린 학생부터 외국인까지 누구나 우리 소리와 역사를 체험할 수 있는 곳이 바로 정선선”이라고 했다.

서부경전선, 느림보 기찻길

10일 오후 2시20분, 전남 보성군 득량면 득량역에서 내려 강골마을 입구로 가는 길에 찍은 경전선 강동2건널목. 건널목 뒤로 벼가 누렇게 익은 황금 들판이 펼쳐져 있다. 벽지노선 인근 논길에서는 바로 옆으로 기차가 지나는 모습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최나실 기자

‘경’상도와 ‘전’라도를 가로 질러서 ‘경전선’, 그 중에 서쪽 노선인 광주송정역과 순천역 사이 116.5㎞를 오가는 서부경전선은 바삐 사는 법만 배워온 이들에게 느림의 미학을 가르치는 곳이다. 현대화가 이뤄진 동부경전선(순천역-삼랑진역)과 달리 서부경전선은 여전히 1930년 깔린 단선•비전철의 옛 모습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88년 전의 시간을 조금이나마 느껴볼 수 있다는 얘기다. 광주에서 부산까지 무려 5시간40분이 걸리는 이유기도 하다. 구불구불 곡선 구간과 고갯길을 지날 때면 속도가 시속 30㎞쯤까지 떨어지는 느림보지만, 삶의 여유를 찾는 여행자라면 들녘 풍경을 천천히 즐길 수 있으니, 도전해볼 만하다.

 

광주송정역에서 1시간 반쯤 달려 전남 보성군 득량역에 도착하면 7080 복고거리와 19세기에 지어진 옛집들을 볼 수 있다. 역 앞 ‘추억의 거리‘에는 시간이 멈춘 듯 ‘역전로울러장’ ‘행운다방’ 등 향수를 자극하는 간판이 늘어서 있다. ‘꾸러기문구사’ 앞에서 친구들과 사진을 찍던 박윤자(53)씨는 “어린 시절 학교 다닐 때가 생각난다”며 여고생처럼 까르르 웃었다.

 

역에서 30분쯤 걸으면 조선 후기 전통가옥의 모습이 오롯이 남아있는 강골마을에 닿는다. 16세기 후반 광주 이씨 일족이 모여 살기 시작한 후, 마을 사람들은 대를 이어가며 19세기 말, 20세기 초 지어진 한옥의 모습을 보존해왔다. 고택을 지나 돌담과 실개울을 따라 오르면 작은 연못을 낀 숲 속 정자, 열화정에 도착한다.

 

조정래 작가의 대하소설 ‘태백산맥‘의 배경으로도 유명한 보성군 벌교역에서는 소설 속 장소 23곳을 지나는 ‘문학기행길’ 코스를 만날 수 있다. 소설에서 ‘남도여관’이란 이름으로 토벌대장 임만수와 대원들의 거처로 쓰였던 보성여관은 한옥과 일식이 혼합된 일본식 여관으로, 지금도 1층에 객실을 운영하고 있다. 넓은 갈대밭이 운치 있는 중도방죽은 벌교의 백미다.

동해남부선, 바닷길도 간이역도 이젠 안녕

울산광역시 울주군 온양읍에 위치한 동해남부선 남창역 북쪽의 고산터널. 이한호 기자

사라지는 것들은 괜히 애틋하다. 대구와 부산, 두 개의 대도시 사이 147.8㎞를 오가는 동해남부선은 현대화 작업이 한창이다. 2013년부터 단선 철도를 전철이 달릴 수 있는 복선으로 바꾸고 새 역사를 짓는 것. 완공이 되는 2019년 말이면 교통은 더 편리해지겠지만, 바다 바로 옆으로 철마가 달리는 벽지노선의 이색 풍경과 소박한 간이역은 더 이상 볼 수 없게 된다. 동대구역에서 기차를 타고 경주역, 불국사역을 지나 2시간10분쯤 달리면 외고산 옹기마을로 유명한 남창역에 도착한다. 역에서 30분쯤 걸으면 장작 타는 내음이 코를 간질인다. 방금 가마에서 나온 따끈따끈한 옹기 냄새다. 전국 옹기 생산량의 절반을 맡는 곳답게 마을 곳곳이 옹기로 꾸며져 있다. 매달 3일과 8일, 5일장 옹기종기시장도 열린다.

 

남창역과 바로 이어진 부산 기장군 월내역와 좌천역 사이를 기차가 달리면, 동해바다를 맘껏 볼 수 있다. 역사를 나서 마주한 가을바다에 관광객들은 일제히 “와, 어촌마을이다”라고 외쳐댔다. 해안을 따라 걸으면 푸른 수평선과 철로가 함께 보이는 월내건널목을 거쳐 임랑해수욕장에 도착한다. 내려오던 길을 따라 30분쯤 더 걸으면 복선화 공사 중에도 꿋꿋이 살아남아 사람 냄새를 풍기는 소박하고 정겨운 모습의 좌천역이 나온다. 공사가 끝나면 월내역과 좌천역 모두 철거될 운명이다.

경북선, 기차역의 생과 사를 한꺼번에

경북선에는 폐역 말고도 방문할 만한 간이역들이 있다. 12일 청룡상과 알록달록한 소품들로 꾸며둔 용궁역이 가을 햇살을 받고 있다. 2004년 무인화된 이후, 전래동화 별주부전을 이용해 역을 꾸미면서 관광객이 늘었다. 김현종 기자

경북 영주시와 김천시를 잇는 115㎞ 단선 철도 경북선은 유난히 폐역이 많아서 기차역의 생사를 한번에 느낄 수 있다. 여객 수요가 적어 26개 역 중 14개가 이미 문을 닫았다. 쓸쓸한 풍경이 도리어 타지인의 마음을 끌었다. 그렇다고 함부로 들어가서는 안 된다. 경북 상주시 백원역만 안전요원 동행 등 허락을 받아 조건부로 안을 들여다 볼 수 있다.

 

김현종 기자 choikk999@hankookilbo.com

이승엽 기자 sylee@hankookilbo.com

최나실 기자 verite@hankook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