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문 넘어 도망친 노인’ 북한 핵을 훔쳐 달아나다

[컬처]by 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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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의 한 장면

세상에서 가장 ‘겁 없는’ 존재는 누구일까. 핵무기 하나로 전 세계와 맞짱 뜨는 김정은일까, 말 한마디로 전쟁을 일으킬 수도, 막을 수도 있는 세계 최강대국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일까. 어쩌면 살만큼 살아서 죽음이 더 이상 두렵지 않은 ‘101세’ 노인이 아닐까. 그런데 이 노인이 그냥 노인이 아니라, 근현대사의 굵직한 사건에 의도치 않게 ‘끼어들어’ 세계 역사를 바꾼 전적이 있는 노인이라면? 무엇이 됐든 그가 치는 ‘사고’가 보통의 스케일이 아닐 것임은 충분히 짐작 가능하다.


‘창문을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으로 전 세계 1,000만부 이상 판매라는 대히트를 친 스웨덴 작가 요나스 요나손이 2탄으로 돌아왔다. 전작이 100세 생일날 양로원의 창문을 넘어 탈출했다 우연히 갱단의 돈가방을 손에 넣게 된 노인 알란의 이야기라면, 이번에는 알란이 한 살 더 먹은 만큼 훔친 물건의 스케일도 한층 커진 내용이다. 101세 생일날 열기구를 타다가 바다에 불시착한 알란은 우연히 농축 우라늄을 몰래 운반하고 있던 북한 화물선에 구조되고, 핵개발을 준비하는 북한으로부터 농축 우라늄 4㎏을 훔쳐 달아난다. 전작에서는 세계사의 한 장면으로 잠깐 등장했던 북한과 김정은이 이번에는 소설의 주요 무대이자 인물로 격상했다.


전작이 스탈린, 마오쩌둥, 트루먼, 김일성 등 20세기 정치 지도자들을 풍자의 대상으로 삼았다면, 이번에는 김정은, 트럼프, 앙겔라 메르켈, 블라디미르 푸틴 등 21세기 정치 지도자들을 등장시켜 풍자의 수위를 한층 높였다. 핵, 군축, 난민, 네오나치 등 현재 국제 정세의 가장 민감하고도 첨예한 이슈를 소설의 한 대목으로 만들어버리고 이를 우스꽝스럽게 비트는 데서 오는 쾌감이 소설의 가장 큰 매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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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의 한 장면

알란의 얼토당토않은 거짓말과 어깃장이 먹힐 수 있는 것은 그가 거쳐가는 이 세계가 애초에 상식만으로 이해하기에는 기이하게 구성된 사회이기 때문이다. 소설은 역설적으로 작금의 국제정세 자체가 얼마나 소설적인지 알란이라는 비현실적 인물을 통해 보여준다. 그러나 이는 동시에 ‘멀리서 보면 희극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비극’인 인생처럼, 상황은 우스울 수 있지만 현실의 결과는 참혹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체제 선전물을 떼가려 했다는 이유만으로 북한에 구금됐다가 고문으로 사망한 미국인 청년의 일화처럼. 그리고 그 희극과 비극의 한끝차이는 70년째 분단된 국가에 살고 있는 한국 독자들이 누구보다 실감할 수밖에 없다.


이번에도 세계 역사를 약간 비튼 한바탕의 소동극 뒤, 알란은 다시 평화로운 일상으로 되돌아간다. 물론 여전히 북한의 핵 위협은 멈추지 않았고, 난민 혐오와 백인우월주의도 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살아오면서 암울한 때가 여러 번 있었는데, 아직도 이렇게 멀쩡히 살아 있잖아? 자, 진득하게 기다려 보자고. 바람의 방향이 바뀔 테니까. 아니면 다른 일이 일어날 수도 있고”라는 알란의 말처럼, 101년이라는 세월이 증명하는 낙관에 잠시 기대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책을 읽을 이유는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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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을 들고 도망친 101세 노인

 

요나스 요나손 지음ㆍ임호경 옮김
열린책들 발행ㆍ528쪽ㆍ1만4,800원

한소범 기자 beom@hankookilbo.com

2019.10.01원문링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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