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닥다닥 원룸은 가라... 목욕탕의 새로운 변신

[컬처]by 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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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동대문구 전농동 주택가에 들어선 ‘유일주택’. 2,3층에 심은 자작나무는 주택의 얼굴과도 같다. 건축가들은 공용 공간의 외부화를 통해 인근 다세대 주택과의 차별화를 꾀했다. 김주영(studio millionroses) 건축사진작가

오래된 주택가에 들어선 다세대 주택들은 벽돌로 치장한 외관부터 층층이 쌓아 올린 내부까지 천편일률적이다. 최소의 비용, 최대 면적, 높은 임대 수익, 세 박자에 최적화된 구조이다. 올해 5월 서울 동대문구 전농동에 완공된 ‘유일주택’은 이 틀을 파괴했다는 데서 주목받고 있다. 1983년 부모가 지어 운영하던 오래된 목욕탕을 허물고 여러 원룸으로 구성된 다세대 주택(대지면적 208㎡ㆍ62.92평)을 새로 지은 유정민(47)씨. “목욕탕이 오래된데다 수요가 줄면서 새로운 수입원이 필요했지만, 수익만 좇고 싶진 않았어요. 나를 비롯해 누구나 오래 살고 싶은 집을 짓고 싶었어요.”


남다른 건물을 짓고 싶었고 마침 건축주인 아버지의 이름 두 글자 또한 ‘유일’이었다. 그렇게 지어진 ‘유일주택’은 지하 1층, 지상 5층으로 전용면적 16.79~27.58㎡(5.08~8.34평)인 원룸 10개, 꼭대기 5층 유씨 부모의 집으로 구성돼 있다. 미혼으로 부모와 함께 살던 유씨는 이번에 집을 지으면서 아래층 원룸으로 홀로 옮겼다.

전용은 작게, 공용은 크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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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일주택의 2층 복도에서 바라본 이웃집 옥상의 감나무 풍경. 층마다 보이는 풍경이 달라 거주자들은 산책하듯 계단을 오르내린다. 김주영(studio millionroses) 건축사진작가

건축주가 원했던 ‘누구나 오래 살고 싶은 집’과 ‘원룸’은 양립 가능할까. 집의 모든 기능을 한데 담아 효율만을 강조하는 원룸은 지속적인 삶의 공간이라기보다 잠시 머무르는 공간에 가깝기 때문이다. 설계를 맡은 박창현(에이라운드 건축사사무소)ㆍ최하영(마인드맵 건축사사무소) 건축가는 “기존 원룸은 집을 수익 내는 상품으로만 생각하다 보니, 면적을 최대로 키우는 데만 집중했다”며 “집에 실제 사는 사람들이 어떻게 살지 고민하지 않는 게 불편함을 만들어내고 있었다”고 말했다.


방의 크기만 키우는 데는 한계가 있다. 발상의 전환이 이뤄졌다. 방 크기보다 방 밖을 최대한 활용하기로 했다. 각 방을 연결하는 복도와 층계, 층별 공간 등 공용 공간으로 다른 원룸과 차별화를 시도했다. 최하영 소장은 “집으로 들어가는 복도, 문을 열면 마주치는 공간, 계단을 오르내리는 층계참 등에서 기존 원룸과 다른 환경을 만든다면 누구나 오래 살고 싶은 원룸을 구현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했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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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은 작아도 복도와 층계 등 공용 면적이 넓어 거주자들이 다양하게 공간을 활용할 수 있다. 김주영(studio millionroses) 건축사진작가

방 면적을 최대한 크게 뽑다 보면 방들을 연결하는 복도와 계단은 어둡고 길고 좁아진다. 하지만 유일주택의 복도와 계단은 넓고, 밝고, 확 트여 있다. 바깥 공기와도 바로 접한다. 빛과 바람, 소리, 시선 등 무형의 것들이 소리 없이 수시로 드나든다.


2, 3층에 있는 4개의 원룸은 각 모서리에 배치됐고, 두 개씩 짝을 지어 마주한다. 주택의 전면(북향)과 후면(남향)에 따라 두 집씩 단(段)의 차이도 난다. 4층에는 크기가 좀 더 크고, 테라스가 있는 원룸 2개가 마주한다. 유정민씨는 “집에 들어갈 때 복도가 컴컴하면 누군가 튀어나올 것 같아서 무섭지만, 밝고 따뜻하다면 한결 집에 가는 마음이 편안해진다”고 말했다.


시선을 빼앗고 걸음을 멈추게 하는 풍경들도 곳곳에 자리한다. 주택 전면 2, 3층에 걸쳐 뚫린 공간에는 자작나무가, 주택 뒷면에는 이웃집 옥상에서 자라는 감나무가 그림처럼 걸려 있다. 복도 화단에 심은 억새와 야생화들은 층을 넘나들면서 이국적인 분위기를 더한다.


화단 맞은편에는 방에서 나와 쉴 수 있는 의자가 있고, 그 옆에 조명과 콘센트를 마련해 놨다. ‘모두를 위한 작은 거실’처럼 쓰인다. 실제 각 원룸의 공용 면적(3.60평)은 전용 면적(5.08평)의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 최하영 소장은 “공용 공간을 줄여 전용 면적에 포함시켰다면 방의 크기를 더 키울 수도 있다”라면서도 “원룸처럼 작은 공간일수록 공용 공간을 확보하고 잘 만들어 사는 이들의 주거요건을 만족시킨다면 방이 큰 것보다 삶의 질이 더 나아질 수 있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방이 작기만 한 건 아니다. 수납으로 공간을 아끼고, 창문을 늘려 채광과 환기 문제를 해결했다. 최하영 소장은 “방에 들어왔을 때 앞에 벽이 있는 것보다 창이 있으면 시야가 넓어지고, 갑갑함이 덜하다”라며 “창호 비용을 아끼고 단열을 효율적으로 하기 위해 보통의 원룸이 좁은 창을 갖고 있는 것과는 반대 방향으로 작업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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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룸에 들어서면 맞은편에 창이 뚫려 있어 답답함을 덜어준다. 창문과 수납, 조명 등 실내 인테리어도 거주자의 삶의 질을 개선하는 데 초점을 뒀다. 김주영(studio millionroses) 건축사진작가

공간이 바뀌면 거주자도 달라져

유일주택 내 10개 원룸 중 8개가 주인을 찾았다. 월세는 인근 신축 원룸 비용과 비슷한 수준이다. 근처에 서울시립대와 경희대, 고려대까지 대학이 많이 있어, 세입자들은 대개 대학생이다. 유정민씨는 “이곳에 살 사람들이 어떻게 살았으면 하는지를 상상하며 지었는데 신기하게도 그런 의도를 이미 알고 찾아오는 것 같았다”라며 “잘 차려진 밥상에 앉으면 태도가 달라지는 것처럼 이 공간에 사는 이들의 삶도 조금 달라지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이곳에 사는 이들은 원룸 문을 자연스럽게 열어 두기도 하고, 책을 들고 나와 복도에 앉아서 햇빛을 쬐면서 보기도 한다. 화단에 허브나 대파 등 작은 식물을 심기도 한다. 엘리베이터가 있지만 산책하듯 계단을 거닌다. 목소리와 발소리를 알아서 줄이고, 스스럼없이 서로 인사를 나눈다.


박창현 소장은 “철제 문고리가 차갑게 느껴질까 봐 플라스틱 한 번 더 덧대고, 호수를 표시하는 번호 서체도 좀 더 예쁘게 개발하고, 현관 번호판도 고민해서 만들었는데 이런 디테일에 반해 계약했다는 세입자가 있다는 얘길 듣고 깜짝 놀랐다”라며 “원룸이어서 아주 사소한 것에서도 차이를 느끼기 때문에 더 잘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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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룸 내부에도 단차를 두어 공간을 구획하고 변화를 줬다. 김주영(studio millionroses) 건축사진작가

유일주택은 특정 개인에 딱 맞춰진 집은 아니지만 다수의 행복을 추구하는 집이다. 최하영 소장은 “주거기간이나 가격에 상관없이 집은 누구에게나 가장 편안하고 안락한 공간이어야 한다는 게 기본적으로 지켜져야 한다”라며 “잠깐 살더라도 함께 더불어 행복하게 공간을 누렸다면 이곳을 거쳐가는 이들의 삶은 분명 달라질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박창현 소장도 “복도와 계단 등에 공을 들여 설계한 것은 원룸에 사는 이들을 바깥으로 나올 수 있게 유도하기 위해서다”라며 “원룸이 각자 자기의 공간에 틀어박히는 단절된 공간이 아니라 사람, 자연 등과 연결된 공간으로 인식된다면 다양한 사회문제들이 해결될 수 있을 것”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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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 1층에도 단풍나무와 허브를 심어 공간에 활기를 더했다. 지하 1층이지만 빛이 잘 들도록 설계했다. 김주영(studio millionroses) 건축사진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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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 1층 ‘1인 목욕실’에 큰 창을 내어 노천탕의 느낌을 냈다. 유일주택에 사는 이들이 편안하게 휴식할 수 있게 배려한 공간이다. 홍석경씨 제공

유일주택에는 비밀이 하나 더 있다. 지하 1층에 별도로 마련된 ‘1인 목욕실’이다. 부모가 30여년간 운영해 온 목욕탕에 대한 일종의 오마주다. 옛 목욕탕에서 쓰던 오래된 체중계도 이 목욕실에 가져다 두었다. 유정민씨는 “예전에는 동네 목욕탕이 만남의 장소이자, 추억을 공유하는 곳이었다”라며 “점점 사라지고 있는 그런 장소들을 작게나마 기념하고 싶었고, 원룸에 사는 이들이 편안하게 휴식할 수 있는 공간이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만들었다”고 말했다.


강지원 기자 stylo@hankookilbo.com

2019.12.21원문링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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