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핵폐기물” 극단까지 간 양준일을 다시 빛나게 한 힘

[컬처]by 한국일보

[김지은의 ‘삶도’ 인터뷰] <49>양준일


국내 활동 복귀 후 첫 언론 인터뷰

“바닥? 내가 누운 곳일 뿐” 두려움 없어

미국선 발톱 빠지도록 청소 노동에 서빙

“날 서 있게 하는 땅이자 수호자는 팬들”

소속사 찾는 대신 최근 1인 기획사 설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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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준일’이라는 심연에 들어가는 일은 만만치 않았다. 아마도, 나는 잔잔한 바닷속을 상상했나 보다. 그가 지난해 12월 TV에 ‘슈가맨’으로 소환됐을 때 20대의 자신에게 이런 편지를 보낸 걸 보고서다. “준일아, 네 뜻대로 아무것도 이뤄지지 않는다는 걸 내가 알아. 하지만 걱정하지 마. 모든 것은 완벽하게 이뤄질 수밖에 없어.”


명징하면서도 담담한 이 말에 많은 이들이 위로를 받았다고 했다. 알고 보니 그건 그의 안에서 한바탕 폭풍우와 비바람이 휩쓸고 난 뒤 찾아온 평화였다. ‘꿈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희망의 말이 아니라, ‘결국 누구나 끝은 다 똑같다’는 해탈의 의미였다. ‘나는 존재 자체로 피해만 주는 toxic waste(핵폐기물 같은 유독성 폐기물)인가. 아니야. ‘아마도’ 이것이 내 인생의 전부는 아닐 거야.’ 자신의 마음의 문을 붙잡은 채, 싸우고 버티기를 반복해 어렵사리 얻은 고요였다. “재활용도 안 되는 쓰레기라는 쓰레기 같은 생각을 버리지 않으면 정말 스스로 죽어버릴 것 같았거든요.”


열 살 때 미국으로 이주해 살다가 스무 살 때 한국에서 가수로 데뷔한 양준일(51). 12년 간 세 장의 앨범을 내는 동안 활동한 건 단 3년, 수익은 거의 무일푼이었다. 무대에 선 그를 환영하는 이들도 거의 없었다. 오히려 멸시와 냉대가 친숙했다. ‘쟤, 뭐야’ 하는 시선을 받고 싶지 않아 평소에도 그는 집에 숨어 있기를 즐겼다. 가수 일을 접고 14년 간 영어 공부방을 하다가 미국으로 다시 건너갔지만, 거기서도 자신의 쓸모를 찾을 수 없었다. 갓 태어난 아들은 쑥쑥 커갔고 월세 내야 할 날은 꼬박꼬박 돌아왔다. 환영은 바라지도 않았고 그저 숨이나 쉴 곳을 찾아 헤맸으나, 실패. 결국 ‘나는 어디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 존재구나’라는 생각이 그의 숨통을 죈 것이다.


초등학교 때 체구도 작고 영어도 못하는 그에게 무작정 덤볐던 백인 친구들의 차별에 그저 서있을지언정 굽히지 않았던 것처럼, 그러나 그는 자신과의 싸움에서도 수그리지 않았다. 젊은 시절 사슴 같던 눈망울이 지금은 깊이를 알 수 없는 호수 같아진 이유였다.


30년 만에 그를 다시 불러낸 대중의 심리엔 칭송과 반가움, 미안함과 고마움이 뒤섞여있다. 하지만 인기도 인생처럼 롤러코스터 같은 것. 또다시 실패할 지 모른다는 두려움은 없었을까.


“바닥을 하도 쳐 바닥은 그저 누울 곳이라는 생각이 든다”는 양준일을 11일 서울 중구 세종대로 한국일보사에서 만났다. 뮤지션도, 아티스트도, 패셔니스타도 아닌, 상처를 입었기에 삶의 가치를 알게 된 한 영혼이 걸어 들어왔다.


활동이 왕성해진 그는 새 소속사를 찾는 대신 가족의 이름으로 최근 설립한 1인 기획사 XBe에 들어갔다. 14일엔 첫 책 ‘양준일 MAYBE_너와 나의 암호말’(모비딕북스)을 펴냈다. 예약 판매만으로 출간도 전에 2쇄를 찍었다. 그는 “문화의 힘으로 자신이 갔던 정말 어두운 곳, 그곳에 아무도 가지 않도록 돕는 존재가 되고 싶다”고 했다.

중학교 때 이미 댄싱 스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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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몽이 꽃사슴이라고요.


“네, 아버지 꿈에서 꽃사슴이 달려들더래요. 그래서 아버지가 양손으로 뿔을 잡으셨다고 해요.”


-눈망울이 사슴 같다는 얘기가 많았잖아요.


“제 눈빛을 요즘 사진(화보)을 찍으면서 처음 봤어요. 얼마 전에 CF 촬영할 땐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들어서 눈만 뜨는 장면을 찍었는데 스태프들이 눈에서 인생이 보인다는 말을 하더라고요.”


-열 살 때 미국으로 이민을 갔죠. 미국에서 자라는 건 어떤 일이었나요.


“70년대 말 한국과 미국의 차이는 어마어마했어요. 한국에서는 바나나 같은 건 ‘그림의 떡’이었는데, 미국에 가니 양손에 들고 먹을 수가 있는 거예요. 지금도 미국에서 첫 날이 기억 나는데 너무 배가 부른데도 한 손엔 바나나, 다른 한 손엔 오렌지를 들고 내려놓질 않았죠. ‘디즈니랜드’ 같은 나라였죠.”


-동양인으로서 차별을 겪지는 않았나요.


“안 좋은 일도 많이 있었지만, 좋은 일을 기억하는 편이에요. 학교에서 무시 당하거나 말을 못 알아들어서 수업을 제대로 못 듣거나 하는 일이 있었지만요. 당시에 (미국 아이들보다) 덩치도 키도 작으니까 뭐든 나한테 빼앗아갈 수 있다고 생각했나 봐요. 그래서 싸우게 되는, 음, 싸운다기보다 내 자신을 위해 선다는 게 맞겠네요.”


-무슨 뜻이죠.


“I stand up for myself. 다른 아이가 도전해올 때 수그리지 않는 거죠. 맞서 싸운다기보다 버티고 서는 거죠. 굽히면 당하니까요. 영어를 못할 때니까 ‘뭐, 어쩌자고’ 싶지만 눈빛으로 아는 거잖아요. 그렇게 버티면 도전해오는 애들이 줄어들더라고요. 생각해보면 그 깡이 무대에 설 때 그 깡인 것 같아요.”


-춤에 빠지게 된 계기는요.


“7학년(중1) 때 장기자랑 같은 행사가 있었어요. 그때 한 선배가 팝핀 공연을 하는데 마이클 잭슨의 ‘문 워크’를 추는 거예요. 그것을 보고 나는 무슨 마술인 줄 알았어요. 누가 뒤에서 무대 바닥을 당기나 싶었죠. 하하. 저뿐 아니라 그때 온 학교 애들이 다 뒤집어졌죠. 그 이후부터 모든 애들이 자발적으로 그 춤 연습을 했어요.”


-언제까지 빠져 지냈나요.


“팝핀은 중학교 때까지였어요. 온통 그 춤 생각 밖에 없었죠. 하하. 고등학교 올라가서는 저만의 춤을 추기 시작했어요.”


그걸 계기로 그는 중학교 시절 이미 춤으로 지역에서는 유명 인사가 됐다. 중2 때 생긴 댄스 콘테스트에 매년 학교 대표로 뽑혀 나갔고 그 대회에서 1등을 했다.


-고등학교 때는 노래도 했다고요.


“코러스 클래스에 들어갔거든요. 1년에 한번씩 노래를 하면서 여러 도시를 도는 프로그램이 있었는데 그걸 하고 싶어서 들어갔죠. 1년에 한번씩 콘서트도 했는데 그때 제 친구랑 디노(Dino)라는 가수의 ‘서머걸스(Summergirls)’라는 노래를 부르면서 춤을 췄어요. 그걸로 인기 폭발이었죠.”


-무대에서 노래 부르며 춤을 춘 건 그때가 처음인가요.


“처음이죠. 그런데 노래보다는 내가 무대에 서서 춤을 출 수 있는 게 더 중요했어요. 메이비(아마도), 내 인생에서 그때가 춤을 제일 잘 췄을 때일 거예요.”


-그 시절에 춤이란 자신에게 뭐였나요?


“나의 identity(정체성)였죠.”

가수 데뷔 전 창업하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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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데뷔 계기가 된 일화도 궁금했다. 배우였던 고 오순택씨가 그와 그의 가족에게 식사를 청하며 “준일이가 한국에 있었으면 연예인이 됐을 거다”, “그럴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라는 얘기를 했다는 것이다. 그가 열여섯 살 때였다. 일주일에 한 번, 한인 교회에서 본 게 다였는데 오순택씨는 왜 그런 말을 했을까.


-그 말을 듣고 어땠나요.


“처음에는 그냥 ‘아, 네’하면서 넘겨 들었죠. 그런데 그 뒤로 거의 1, 2년 동안 내 머릿속에 박힐 때까지 그 말을 하셨어요. 사실 작년에 ‘슈가맨’ 출연하고 다시 미국에 돌아갔을 때 오 선생님을 찾아 뵈려고 했어요. ‘왜 내가 연예인이 됐지’ 생각을 하다가 오 선생님이 떠오른 거예요. 도대체 나한테서 뭘 봤길래 그런 말씀을 하셨는지 궁금해서 물어보고 싶었죠. 그런데 2018년에 돌아가셨더라고요.”


-데뷔는 대학에 들어간 뒤인데요.


“맞아요. 뭘 특별히 하고 싶은 게 없어서 헤매다가 고3 때는 창업도 했어요. 대학 가기 싫어서 졸업하자마자 회사를 차렸죠.”


-무슨 회사인가요.


“UNI(Universal Novelty Inc.)라는 회사인데 제품 아이디어가 있었거든요. 해변에서 놀다가 비치 의자로 돌아오면 물기에 모래에 몸이 엉망이잖아요. 의자에 묻으니까 커다란 티셔츠에, 큰 타월도 깔아 두고 눕거든요. 티랑 타월이 합쳐진 게 있으면 살 텐데 없더라고요. 그런 제품을 만들면 되겠다 싶어서 비치 의자에 뒤집어 씌울 수 있는 커다란 타월을 생각해냈죠. 그 제품을 단독으로 파는 게 아니라 맥도날드 해피밀을 사면 캐릭터 장난감을 주는 것처럼 브랜드와 제휴를 맺으려고 했어요. 만약 코카콜라에 판매할 거면 등에는 코카콜라 캔을 그려 넣고 아래 앉는 쪽에는 경쟁사의 찌그러진 깡통을 새기는 아이디어도 고안했죠. 실제로 1988년에 이걸 만들려고 한국에 왔는데 당시 서울올림픽 때문에 단가가 올라가서 실패했어요.”


창업은 접고 대학에 입학했다. 그래도 당시 법적으로 만들어둔 이 회사는 나중에 1집의 기획사가 됐다.


-한국엔 어떻게 오게 됐나요.


“아버지의 친구가 한국에서 유명한 작곡가가 왔다면서 소개를 시켜주셨어요. 이범희 선생님이었죠. 제가 노래 부르고 춤 추는 걸 보시더니 ‘양준일이 한국에 들어오면 (댄스 그룹) 소방차, (댄스 가수) 박남정은 끝났다’고 하시더라고요. 하하.”


작곡가 이범희씨가 그래서 그의 1집 전곡을 작곡하고 개인 스튜디오에서 앨범도 녹음했다.


-한국에서 첫 무대 기억 나나요.


“MBC ‘토토즐(토요일 토요일은 즐거워)’로 기억하는데, 발라드 ‘겨울나그네’를 불렀어요.”


-그 곡으로 얼마나 활동했나요.


“한 번 부르고 끝.”


-왜요?


“음질이 좋지 않아서 방송할 수가 없다고 하더군요. 발라드는 라디오에서 많이 나와야 뜨거든요. 그 다음 방송 때 신인가수들 소개하는 코너에서 부른 게 ‘리베카’였고요. 사실 1집 전체가 방송에서 제대로 틀 수가 없는 수준이었어요. 무슨 활동이고 뭐고 시작하기 전에 제가 들어보고 이거 다시 녹음해야 한다고 어머니한테 말할 정도였으니까요. 어머니가 그 돈을 어떻게 또 들이냐고 하셨죠.”


-제작비가 얼마였나요.


“8,000만원요. 당시 압구정 현대아파트 두 채를 살 수 있는 돈이었죠.”


-그래서 어떻게 했어요?


“1집을 아세아레코드에서 발매했는데, 음반이 안 나간다고 하더군요. 결국 한이 맺혀서 미국으로 돌아갔죠.”

1집의 창피함이 2집의 동력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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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11월 1집을 내고, 이듬해부터 활동을 하기 시작해 1년도 안된 시점이었다.


-돌아가는 비행기 안에서 어떤 생각을 했나요.


“실패라고 생각을 했죠. 2집은 무슨 일이 있어도 음질은 최고로 뽑아서 돌아오겠다고 마음 먹었어요. 그만 둘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죠. 너무 창피해서 멈출 수가 없었어요. 회복해서 이겨내고 싶다는 느낌이었죠.”


-게다가 한국에서도 차별을 겪었잖아요.


“처음에 미국에서 데뷔하러 한국에 올 때 ‘최소한 인간적인 차별을 당하지는 않겠구나’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와 보니 더 심했죠.”


그의 생김새, 긴 머리, 옷차림까지 모두 조롱의 대상이었다. 야외 무대에서 노래를 부르다 돌이 날아온 경험, 출입국 사무소 직원의 “너 같은 사람이 한국에 있는 것이 싫다. 내가 이 자리에 있는 동안 (비자 갱신) 도장을 찍어주지 않을 거다”란 말을 들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그래도 그는 1집을 낸 곳에서 승부를 보자는 생각으로 2집을 들고 한국 무대에 복귀했다. 작곡가 겸 프로듀서 P.B. Floyd와 작업해 최고의 녹음실에서 제작한 결과였다. ‘댄스 위드 미(DANCE WITH ME) 아가씨’ ‘가나다라마바사’가 여기 실렸다. 작사, 작곡도 그가 했다.


-2집을 들고 컴백하면서 반응이 다를 거라고 기대도 했을 텐데요.


“그 보다 뿌듯한 마음이었어요. 자랑스러웠죠. 반응도 좋았어요. ‘댄스 위드 미 아가씨’가 초반부터 순위권에 오르기 시작했죠. 그런데 (가사에 영어가 많다고) 방송 정지를 당했어요. 그래서 (타이틀곡 대신) ‘가나다라마바사’로 활동을 한 거죠.”


-1집은 2집에 비하면 어땠나요.


“대성공을 했죠, 내 마음 속에선.”


-물질적으로는요.


“똑같았어요.”


-안 팔렸나요?


“2집은 이야기가 복잡해요.”


1집을 낸 아세아레코드와 2집을 제작한 서울음반, 그리고 그의 대리인을 자처한 사람까지 끼어 들어 아직도 법적인 분쟁 거리를 남긴 사연이었다. 어쨌든 결론은.


“2집도 (금전적으로는) 쫄딱 망했죠. 그래도 창피하진 않았어요.”


-2집에서 그만두지 않고 3집을 들고 돌아온 이유는 뭔가요.


“음악적으로 더 깊이 들어가보고, 노래도 더 잘하고 싶었죠.”


프레임21이라는 기획사 소속 가수 V2로 활동명을 바꾼 그는 2001년 새 앨범 ‘판타지’로 무대에 복귀했다.


-그때는 어땠나요.


“반응이 정말 좋았어요. 그때는 인기가 있으면 길거리 리어카에서 노래가 흘러나오던 시절인데 ‘판타지’가 그랬죠. 어디를 가도 내 노래가 나왔어요.”


-잘 됐으니 물질적인 보상도 따랐겠죠?


“전혀 없었어요.”

만족스러웠던 3집, 이번엔 소속사가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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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왜요.


“소속사가 돈을 안 줬죠. 심지어 그때 나는 대중교통을 타고 다녔어요. 한번은 (지하철) 3호선 끝인 대화역까지 가야 하는데 시간이 늦어져서 구파발역에서 끊긴 거예요. 돈은 없고요. 주위에 보니 술 한잔 한 아저씨들도 함께 지하철에서 내려서 택시를 잡으려고 하더라고요. ‘제가 차비가 없어서 그러는데 태워주실 수 있나요’ 해서 얻어 탄 적도 있죠. ‘뭘 하는데 돈이 없느냐’기에 ‘가수 하려고 미국에서 왔다’고 ‘제가 노래 불러드릴까요’ 해서 택시 안에서 부르기도 했어요. 집 앞까지 태워다 주시더라고요. 하하.”


이번엔 소속사가 부당한 계약으로 그를 옭아맨 거였다. 정산(손익분기점을 넘을 때 이뤄지는 수익 분배)이 안된 건 물론이고, 심지어 7, 8만원 정도 했던 방송 출연료도 그의 통장이 아닌 다른 곳에 입금됐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았다. 한국에서 다시 활동을 시작하게 된 그가, 다른 회사 대신 가족이 만든 XBe라는 1인 기획사에 관리를 맡긴 이유도 이런 과거 때문이다. XBe는 그가 지은 이름이다. 과거(ex), 미지의 존재 즉 미래(X), 현재(Be)라는 의미를 담았다. 회사라고는 하나, 아직 아무것도 없으니 요즘도 그는 방송 출연이나 촬영을 하러 갈 때 택시나 ‘타다’를 타고 다닌다. 이날도 그는 배낭을 멘 채 매니저와 서너 개의 짐을 들고 타다에서 내렸다.


-내 잘못도 아닌데 왜 잇따라 그런 일을 당해야 하나 원망이 들었을 법 한데요.


“다행이라고 생각했어요. 무대에 늘 선글라스를 끼고 섰기 때문에 지하철에서도 아무도 나를 못 알아봤거든요. 그런데 지하철이나 버스를 타고 다니는 건 저한테 중요하지 않았어요. 3집 활동으로 창피한 것도, 음악적으로 더 깊이 들어가고 싶다는 바람도 없었고요. 충분히 내가 표현하고 싶은 걸 표현했으니 음반을 더 내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죠. 내 자신한테 스스로 더 증명해 보여야 할 게 없었어요.”


그렇지만 미국으로 돌아가고 싶진 않았다. 어머니와 경기 고양시 일산에서 영어 공부방을 차렸다. ‘코리아헤럴드’ 기자 출신인 어머니는 문법을, 그는 회화를 맡았다. 많을 땐 한 달에 학생이 50명 정도나 됐다. 14년 가까이 영어를 가르쳤다.


-그 시간이 준 것은 무엇인가요.


“평화 그리고 행복.”


-어디서 온 평화와 행복이었나요.


“아이들이 나한테 사기를 치지는 않잖아요.”


서글픈 답이었다. 평화의 시간은 오래 가지 않았다. 2015년 6월, 결혼 9년 만에 그의 아들이 태어났고 그 해 12월 그는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게 된다. 공부방 학부모 한 명이 “자식을 키우는 공간에서 다른 아이들을 예전처럼 가르칠 수는 없을 것”이라며 다른 학부모들까지 부추겼고 결국 학생이 세 명으로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무릎 나가도 서빙 일이 감사했던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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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 가서는 어떻게 살았나요.


“처음에는 일자리를 잡기가 어려웠어요. 경험도 없고, 나이는 찼고요. 할 수 있는 게 한국음식점 ‘반찬 보이’였죠. 주방에서 음식이 나오면 주문표를 보고 테이블에 배정하는 일이에요. 그걸 10일 하고 나서 무릎이 빠졌죠.”


-뼈에 문제가 생긴 거예요?


“네, 걷지를 못했어요. 하루는 다리를 질질 끌면서 출근했더니, 이 모양인데 왜 출근했느냐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안 나오면 일자리를 잃어버릴까 봐 그렇다고 답했죠. 1년이나 찾아 헤매다가 겨우 잡은 일자리였으니까요. 이런 일로 쉰다고 아무도 당신 자르지 않는다고 나은 다음에 오라고 하더군요. 하지만 무릎이 빨리 낫지 않았어요. 싼 곳을 찾아서 멕시코인이 하는 침방에 가서 침도 맞았는데. 하하.”


다음 일자리는 창고 정리였다. 하지만 그 시급으로는 생활비를 감당할 수 없었다. 또다시 한국 음식점 서빙 자리를 구해 “발톱이 빠질 지경까지” 일했다. 350명이 일하는 콜센터 사무실 청소도 했다. 콜센터라 진공청소기를 쓸 수 없어 카페트 바닥을 늘 빗자루로 쓸어야 했다. 단 2곳뿐이라 더 쉽게 더러워지는 화장실 청소도 그의 몫이었다. 매일 생일파티가 열리는 통에 카페트 바닥에 떨어진 금박가루 떼는 일이 그렇게 어렵다는 걸 그때 체험했다. 그렇게 노동해서 버는 돈은 한 달에 2,000달러(한화 235만원) 남짓. 월세가 1,460달러(172만원)였으니 생활은 계속 어려웠다. 다시 한국음식점 일자리를 구해 일하기 시작하던 차에 한국의 방송사 여기저기서 그를 찾기 시작했던 거다. 유튜브에서 ‘시간여행자’로 인기가 역주행해서다.


-JTBC ‘투유 프로젝트-슈가맨3’에서 연락을 받고 어땠나요.


“작년 10월쯤이었는데, 저한테 바로 온 게 아니었어요. 연락이 안되니까 제 팬클럽 사이트를 통해서 도움을 구한 거였죠. 그 전에도 다른 방송사들로부터 나와 달라는 연락이 왔지만 (생계 때문에) 갈 수 없는 상황이라고 거절했거든요. ‘슈가맨’에도 그런 사정을 말하니, 다 해결해주겠다는 거예요. 그래서 여행 간다는 마음으로 출연을 한 거죠.”


-인생의 바닥과 정점을 생각해본 적이 있나요.


“인생은 업 앤 다운(up and down)이 반복되는 롤러코스터 같다고 생각해요. 희망을 찾으면 바닥을 치고, 다시 기회를 기다려 오르길 기대했는데 또 바닥을 치고, 그래도 또 뭘 할 수 있을까 준비했지만 바닥을 쳤잖아요. 아침에 일어나서 갈 곳이 없다는 것처럼 괴로운 게 없어요. 아이가 있는데. 그때가 내 자신이 제일 어두웠어요.”


-그래도 아이돌이었는데, 미국에서 서빙이나 청소일을 하는 게 심적으로 힘들지는 않았나요.


“그게 왜 힘들 거라고 생각하는 지 잘 이해가 안 돼요. 나는 아이가 있는데. 내가 옛날에 했던 일이 뭐가 중요해요. 옛날에는 그렇게 모든 활동을 열심히 해도 나한테 한 푼도 안 줬는데! 서빙은 힘들어도 그날 받은 팁을 내가 주머니에 넣고 집에 갈 수가 있어요. 너무 감사했어요. 일을 하는데 돈을 주잖아요.”


-‘슈가맨’으로 엄청나게 이슈가 됐고, 미국에 돌아갔다가 다시 한국에 오게 됐잖아요. 한국행을 결정하면서 또 실패할 수 있다는 두려움은 들지 않았나요.


“나는 그런 걱정 안 해요. 하도 바닥을 쳐서 바닥이 익숙해진 삶이거든요. 바닥이 뭔데? 내가 누워있는 게 바닥이지.”


그의 유머에 나는 웃었지만 슬펐다.

한국행은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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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행을 마음 먹게 한 동력이 뭔가요?


“한국을 떠날 때도 떠나기 싫었지만 어쩔 수 없이 간 거였거든요. 돌아올 때도 저에게는 선택이 아니라 올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어요. 서빙 일 자체에 미래가 없으니까요. 거기서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커가는 내 아이를 제대로 키우기는 어렵겠죠.”


-한국으로 이주한다고 생각하고 온 거죠?


“아뇨. 처음에는 팬클럽 미팅(지난해 12월 31일) 때문에 온 거였어요. 그런데 그 사이에 CF가 들어왔고 큰 돈은 아니지만, 한국에서 살 집 보증금을 마련할 수 있었어요. 미국으로 돌아갈 생각이었기 때문에 아직 미국 집도 정리 못한 상태죠.”


-책도 냈죠.


“(공동저자인) ‘아이스크림’(필명)은 내 오랜 팬이에요. 안 지가 20년 됐죠. 미국에서도 계속 연락하며 지냈고, 한국에 와서도 여러 가지를 상의하면서 나를 도와주고 있어요. 아이스크림이 그러더라고요. 내가 해준 얘기가 힘들 때 큰 도움이 되더라고, 책으로 내보면 어떻겠냐고요. 아이스크림이 나와 함께 다니면서 나한테 들은 얘기로 책을 쓰기 시작해서 나오게 됐어요.”


그의 책 ‘양준일 MAYBE’는 그의 인생사전 같은 책이다. 91개의 열쇳말을 자신의 경험을 녹여 재해석했다. 제목의 ‘MAYBE’도 그가 실제 많이 쓰고 좋아하기도 하는 단어다. 예약판매만으로 3만부가 넘게 팔렸다.


-자신의 인생에서 팬들은 어떤 의미인가요.


“저한테 팬들은 내가 설 수 있게 하는 땅이에요. 나의 보디가드이기도 하죠. 저는 정치보다도 문화가 우리 삶에 더 큰 영향을 준다고 생각해요. 그런 일에 제가 참여할 수 있도록 팬들이 문을 활짝 열어놓고 닫히지 않게 꽉 잡아주고 있어요.”


-이름 앞에 수식어를 붙인다면요.


“나는 아무것도 아니에요. 나를 소개할 때 스스로 ‘가수 양준일’이라고 하지도 않죠. 그저 내가 나눌 수 있는 것을 나눌 뿐이에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지키려고 한 삶의 도가 있다면 뭘까요.


“그간 내가 존재할 수 있는 곳을 찾아 다녔지만 찾지 못했어요. 그럼 숨어 지낼 곳이라도 찾아 헤맸지만 그것도 실패했죠. 그러다가 내가 나 자신을 너무 미워하는 상황까지 갔어요. 내 아이를 책임지지 못한다는 건 경험해보지 않으면 모르는 일이죠. 그래서 (안 좋은 생각들을) 끊임없이 버려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됐죠.”


-버리는 일, 곧 비움이군요. 생각한 계기가 있나요.


“그렇죠.”


갑자기 그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죽고 싶었기에…”


예상하지 못한 말이 그의 입에서 나왔다. 그가 힘겹게 말을 이어갔다.


“그 생각을 버리지 않으면 내가 죽을 것 같아서… 스스로 목숨을 끊고 싶은 거예요. 책임감과 부담감 때문에. 내 자신뿐 아니라 아내와 아이까지… 내가 없으면 이들이 어떻게 존재하겠나 싶어서. 그러니 아예 다 지우고 가자…”


그의 눈에서 눈물이 후두둑 떨어졌다.

아마도 이게 끝은 아닐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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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마음을, 어떻게 버릴 수 있었나요.


“힘들게… 왜냐면, 비우지 않으면 진짜로 죽을 것 같았거든요. 내 (안의) 문을 잡고 흔들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아무리 버리고 버려도 더 쉽게 채워지는 건 그런 쓰레기 같은 생각이었어요.”


-감정의 쓰레기나 나쁜 생각이요.


“그렇죠. 나쁜 생각, 어두운 생각, 내 자신에 대한 판단. (그때) 내 자신을 표현하는 단어는 쓰레기도 아니고 toxic waste(유독성 폐기물)였어요. 원자로에서 나오는 핵폐기물.”


-재활용도 안 되는 존재로 여겼다는 뜻인가요.


“네, 쓰레기는 버리면 끝나는 건데 나 같은 존재는 어디 가면 부담이 되는 거죠. 제가 그래서 핵폐기물이라는 단어를 안 써요. 그 단어를 쓰면 무너지기 때문에.”


그가 연신 눈물을 닦았다.


한국에서도, 미국에서도 어디에서도 환영 받지 못하는 나날들이 그의 안에서 감정의 폐기물로 잔뜩 쌓였던 것이다.


-영혼의 문을 잡고 무슨 생각으로 자신을 다잡았나요.


“이게 전부일 수 없다고 생각했죠. 그러면 안 된다고, 나를 붙잡고 싸우는 거죠.”


-외부의 도움은요.


“누구한테 도움도 받기 싫었어요. 그 순간 진짜 내가 toxic waste가 되는 거니까요. 누구한테 기대서 존재해야 하는.”


-그래서 그게 삶의 도가 된 거군요.


“네, 오래되지 않았죠. 지금도 저는 매일 많은 걸 버리려고 해요. 내가 아무리 풀려고 해도 나의 상황이 내 목을 조르고 있었죠. 그런데 ‘슈가맨’으로 이렇게 되면서 그 상황 자체가 풀렸어요. 그래서 팬들에게 이렇게 고마운 거예요.”


-아직도 계속 싸우고 있는 거네요.


“비움은 영원히 해야 하는 일 같아요.”


-그래도 지금은 자신이 toxic waste라는 생각은.


“없어졌죠. 팬들이 없애줬어요.”


그렇게 말하는 그의 눈에서 커다란 눈물 한 방울이 반짝 떨어졌다. 마치 인생의 선물 같은 비밀처럼 느껴졌다. 그는 자신의 이름 앞에 붙일 수식어가 없다고 했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그는, ‘스타’다. 스스로 빛을 내며, 존재 자체로 누군가에게 꿈을 꾸게 하는 힘을 지닌 별 말이다. 팬들이 그의 곁에 없었을 때에도, 양준일은 그 자리에 그렇게 있었다. 주위의 칠흑 같은 어둠이 그를 빨아들이려 했을지라도, 그의 영혼은 잠식되지 않았다. 팬들이 엄청난 태양이 되어 빛을 쏴주는 지금, 그가 비로소 반짝이고 있다. 인생은 어둡지 않은 거라고, 아마도, 지금이 끝이 아닐 거라고, 그 별이 말하고 있다.


김지은 논설위원 luna@hankookilbo.com

2020.02.25원문링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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