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박자박 소읍탐방] 오고생이(그대로의) 숲길, 가베또롱(가볍게) 걸어 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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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박자박 소읍탐방]<65>한라산 중산간에 숨겨진 원시림, 서귀포 치유의 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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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라산 남측 중산간에 위치한 서귀포 치유의 숲은 하루 300명으로 입장객을 제한하고 있어 코로나19 시대에 거리 두기에 적합한 휴식처다. 녹색으로 가득한 원시림을 걷고 나면 자연으로부터 푸짐하게 대접받은 느낌을 받는다. 서귀포=최흥수 기자

겉으로 드러난 생채기는 쉽게 아물지만, 마음의 상처는 오래 남는다. 끝이 보이지 않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인한 스트레스가 길고도 깊다. ‘마음 치유’라는 말이 요즘처럼 절실히 와닿는 때도 없을 듯하다. ‘서귀포 치유의 숲’은 다른 지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관광객이 붐비는 제주에서 잠시나마 ‘코로나 우울증’을 떨쳐내기 좋은 곳이다. 한라산 남측 해발 500m 언저리의 원시림으로 예약을 통해 하루 300명만 입장할 수 있다.


◇놀멍쉬멍(놀면서 쉬면서) 엄부랑(엄청난) 치유 숲길


숲에서 맞는 가랑비는 녹색 샤워다. 이른 장마가 시작된 지난 11일 비 예보에 걱정 반, 기대 반으로 서귀포 치유의 숲(이하 치유의 숲)을 찾았다. 안개비라도 뿌리면 숲의 분위기가 더욱 좋지 않을까 기대했지만 4시간을 머무는 동안 비는 한 방울도 내리지 않았다. 태풍이 아니면 제주의 일기예보는 참고사항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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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어로 쓴 치유의 숲 안내판. 탐방로 명칭도 모두 정감 어린 제주어로 지어 하나씩 그 뜻을 새겨보는 것도 재미다.

치유의 숲 입구에서 가장 먼저 만나는 건 낯선 제주어 안내판이다. ‘뎅기는 질 아니우다’ ‘셋도질 허지 말게양’ 등의 표지판은 ‘탐방로 아님’ ‘정문 매표소를 통해 입장하세요’라는 공식적인 표현보다 살갑고 정감이 넘친다.


이 정도면 감을 잡겠는데, 치유의 숲 안내도를 보면 잠시 혼란스럽다. 산책로가 많을 뿐만 아니라 모든 숲길 명칭이 제주어로만 쓰여 있다. 방문자센터에서 힐링센터까지 약 1.9km 가멍오멍(가며 오며) 숲길을 중심으로 여러 갈래의 샛길이 연결돼 있다. 가베또롱(가뿐한), 벤조롱(산뜻한), 오고생이(있는 그대로), 엄부랑(엄청난), 산도록(시원한) 숲길…. 단어는 입에 착착 감기지만 어감으로 그 뜻을 유추하기는 쉽지 않다. 본격적으로 숲길 산책을 하기 전 방문자센터에서 꼭 안내책자를 챙기는 게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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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 입구의 치유샘. 통나무 홈통에 고인 물에 팔과 얼굴을 담그는 것이 치유의 숲과의 첫만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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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나무 홈통에 고인 물에 두 팔을 담그면 청량한 기운이 온몸으로 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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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유의 숲 입구의 일부 구간엔 무장애 목재 탐방로가 조성돼 있다. 숲 체험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맛보기 코스다.

입구 오른편으로 들어서면 250m 가량 목재 덱 산책로가 조성돼 있다. 무장애 탐방 시설이자 숲 치유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맛보기 숲이다. 가장 먼저 돌 틈 사이 호스에서 조르륵 떨어지는 ‘치유샘’을 만난다. 대나무 호스에서 떨어진 물은 여물통처럼 커다란 통나무 홈통을 타고 흐른다. 두 팔 걷어붙이고 홈통에 팔꿈치와 얼굴을 담근다. 치유의 숲과의 첫 만남이다. 그런 다음 두 손 모아 샘물을 받아 마신다. 목을 넘긴 청량함이 온몸으로 번진다. 숲의 기운을 제대로 받기 위한 일종의 준비 의식이다.


힐링센터까지 이어지는 가멍오멍 숲길은 차량이 지날 수 있을 정도로 넓고 편안하다. 1.9km를 걸으며 해발고도가 160m가량 높아지는 완만한 길이다. 산책로가 많지만 치유의 숲은 걷기보다 쉬기에 더 신경을 쓴 휴식처다. 중간중간에 쉼팡(쉼터)이 있다. 아름드리 편백과 삼나무 그늘 아래 통나무 의자나 누워 쉴 수 있는 나무 벤치가 놓여 있다. 숲속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살갗을 간질이고, 하늘을 덮은 나뭇가지에서 초록이 뚝뚝 떨어진다. 나무와 한 몸이 된 바위에도 생명이 가득하다. 마삭줄과 콩짜개덩굴이 뒤덮은 화산암은 어떤 조각가도 만들어 낼 수 없는 정원석이다. 숲 전체가 거대한 자연 정원이나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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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론에서 본 치유의 숲. 가장 넓은 가멍오멍 숲길도 실오라기처럼 보인다. 다른 탐방로에는 거의 햇빛이 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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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귀포 치유의 숲은 걷기보다 쉬기 좋은 곳이다. 탐방로 곳곳에 앉거나 누울 수 있는 쉼팡(쉼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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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화벽으로 쌓은 돌담을 따라 걷는 가베또롱 숲길. 실제는 사진보다 어두컴컴하다.

가멍오멍 숲길에서 샛길로 빠지면 비밀의 숲처럼 한라산의 원시림이 펼쳐진다. 방문자센터에서 약 1km 지점에서 연결된 가베또롱과 엄부랑 숲길은 놓치지 말고 꼭 가봐야 할 코스다.


가베또롱 숲길은 길다란 잣성(돌담)을 따라 연결된다. 100여년 전만 해도 이 숲에는 사람이 살았다. 나무를 잘라 버섯을 기르고, 숯을 굽고, 말을 친 흔적이 곳곳에 돌담으로 남아 있다. 가베또롱 숲길의 돌담은 일직선에 가깝다. 산불이 발생할 경우 저지선 역할을 하는 일종의 방화벽이다. 마을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둥그런 돌담 안에는 키 큰 삼나무가 자라고 현재 쉼팡으로 이용된다.


방문자센터 벽면에 걸개그림으로 장식된 ‘엄부랑할망낭’도 이 숲길에 있다. ‘엄청나게 큰 할머니 나무’라는 뜻으로 수령 200년 정도된 붉가시나무다. 한라산 중산간의 식생을 가장 잘 보여주는 나무이기 때문에 치유의 숲에서 상징적인 존재로 여긴다. 화산암석에 뿌리 내린 줄기는 2~3m 높이에서 춤을 추듯 가지를 뻗고 있다. 양은영 서귀포시 산림치유지도사는 “하늘과 대지의 기운을 연결해주는 숲의 정령”이라고 표현한다. 따로 표지판을 세워놓지 않아 찾기가 어렵지만 주변을 지난다면 틀림없이 ‘바로 이 나무구나’라고 단박에 알아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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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베또롱과 엄부랑 숲길 사이의 엄부랑할망낭. 치유의 숲에서는 숲과 대지를 이어주는 상징적인 나무로 꼽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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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드리 삼나무 사이를 걷는 엄부랑 숲길. 엄청나게 큰 숲이라는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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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줄기를 감싸고 있는 초록 이끼가 신비로움을 더한다. 밀림에 가까워 길을 잃을까 걱정되는데 야자 매트가 깔린 산책로만 따라 걸으면 큰길과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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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고생이 숲길과 엄부랑 숲길이 교차하는 곳. 이름처럼 있는 그대로의 엄청난 숲이다.

엄부랑 숲길은 가베또롱 숲길에서 갈래를 친다. 이름처럼 엄청나게 큰 삼나무가 숲을 형성하고 있는 곳이다. 1930년대에 심은 것으로 추정되지만 사람의 간섭을 최소화한 오고생이(있는 그대로) 숲이다. 하늘로 쭉쭉 뻗은 줄기엔 초록 이끼가 얇게 감싸고 있어 신비스러운 분위기가 고스란히 전해진다. 숲 한쪽 ‘숨골’에선 끊임없이 냉기가 스며 나와 바닥에 엷은 안개가 퍼진다. 숨골은 용암동굴의 천장이 무너지면서 지하 공간과 지표가 연결된 일종의 숨구멍이다. 흙보다 바위가 많은 화산섬 제주의 특징이 잘 드러나는 지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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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민들이 거주했던 원형 돌담 안에도 삼나무가 하늘 높이 자랐다. 지금은 쉼팡으로 이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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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부랑 숲길 초입의 숨골. 서늘한 냉기가 뿜어져 나와 주변에 옅은 안개가 깔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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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갈래의 탐방로는 결국 가장 큰길인 가멍오멍 숲길과 만난다. 쉽고 편한 길이지만 치유의 숲을 제대로 느끼려면 샛길을 선택하는 편이 낫다.

이 숲길에 들어서면 해뜨기 전 새벽녘처럼 어두컴컴하다. 동백을 비롯해 조록나무, 붉가시나무, 황칠나무, 굴거리나무 군락이 하늘을 가려 햇볕이 거의 들지 않는다. 진하게 풍기는 특유의 숲 내음 속에 이따금 달콤함이 코끝을 스친다. 이맘때면 마삭줄과 이나무의 하얀 꽃 향기가 섞여 있다.


엄부랑, 가베또롱, 오고생이 숲길 안에는 이정표가 거의 없어 혹시라도 길을 잃지 않을까 슬며시 걱정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야자 매트 산책길만 따라 걸으면 곧 큰길과 만나게 된다. 이렇게 두어 시간 숲길 산책이 끝나면 몸은 가뿐해지고 마음은 뿌듯해진다. 자연으로부터 큰 대접을 받은 듯하다.


◇치유의 숲의 화룡점정 ‘차롱밥상’


그늘 짙은 녹색 숲에서 도시락을 먹는 기분은 어떨까? ‘차롱치유밥상’은 서귀포 치유의 숲에서만 맛볼 수 있는 특별한 음식이다.


차롱은 대나무로 만든 그릇으로 뚜껑이 있는 게 특징이다. 밭이나 숲에 갈 때 음식을 담아 가면 통풍이 잘 돼 쉬지 않았고, 나무에 걸어두면 벌레가 꼬이는 것도 막을 수 있었다. 일종의 대나무 도시락인 셈이다. 차롱보다 큰 ‘구덕’은 물건을 담거나 운반할 때 사용했다. 육지의 대바구니와 달리 직육면체 모양으로 바닥이 깊어 애기를 눕히고 재우는 ‘애기구덕’도 있다. 그만큼 제주 주민들의 생활과 밀접한 물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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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특유의 대바구니인 차롱에 정성스럽게 담긴 ‘차롱치유밥상’. 서귀포 치유의 숲에서만 맛볼 수 있는 호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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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롱은 거의 자취를 감췄다가 치유의 숲에서 ‘차롱치유밥상’을 기획하면서 기능보유자인 김창희씨에 의해 부활했다.

그러나 2014년 치유의 숲에서 차롱밥상을 준비할 무렵에는 값싼 플라스틱 제품에 밀려 차롱이 거의 자취를 감춘 상태였다. 차롱을 만들 수 있는 사람도 단 한 명뿐이었다. 단순해 보이지만 만드는 과정이 까탈스럽다. 음력 10월부터 이듬해 정월 사이, 그것도 물때가 조금일 때 벤 대나무를 두 달이나 말려야 재료가 확보된다. 보통 대바구니는 5년을 넘기기 힘들지만, 이렇게 제작한 차롱은 80년까지 간다고 한다. 유일한 차롱 기능보유자인 김희창(84)씨는 현재 무형문화재에 이름을 올렸다.


차롱밥상이 더 특별한 이유는 주민들과 나누기 때문이다. 차롱밥상의 음식은 모두 인근 포근동 주민회에서 만든다. 치유의 숲이 관광객과 주민을 연결하는 매개인 셈이다. 뚜껑을 열면 제주 전통 빙떡과 전복꼬치구이, 삶은 고구마, 호박전, 귤, 계란말이와 주먹밥까지 제주의 맛이 차곡차곡 들어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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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롱 맨 아래에 각기 다른 재료로 뭉친 주먹밥 세 덩어리가 놓여 있다. 마음까지 든든해지는 밥상이다.

제일 위에 얹은 빙떡은 딱히 맛이 어떻다고 표현하기 애매하다. 묽은 메밀가루 반죽에 무채나물을 얹어 말았으니 그냥 심심하다고 할 밖에 없는데, 제주 주민들은 그 오묘한 맛이 중독성이 있다고 한다. 앞 접시 대용으로 쓰는 뚜껑에 내용물을 하나씩 꺼내 놓으면 맨 아래에 세 덩어리 주먹밥이 보물처럼 놓여 있다. 각기 다른 곡물로 조리해 깻잎으로 감쌌다. 여기에 된장국과 깍두기가 별도로 제공된다. 맛도 맛이지만 그 정성이 고스란히 전해져 마음까지 든든해진다.


차롱치유밥상을 맛보려면 최소 3일 전에 예약(064-739-1939)해야 한다. 하나에 1만7,000원이다. 숲 탐방 예약은 인터넷(eticket.seogwipo.go.kr)에서 할 수 있다. 성인 1,000원이다. 기본적으로 모든 코스에 마을해설사가 동행하지만, 현재는 코로나19로 인해 일부 코스만 동행한다. 나무 체조, 숲 놀이, 명상과 호흡 등으로 구성된 산림치유프로그램은 1인 2만원이다.


◇서귀포의 새 명물, 새연교와 올레시장


치유의 숲에서 서귀포 시내까지는 약 8km 거리다. 서귀포항과 바로 앞 새섬을 연결하는 도보 다리인 새연교가 최근 음악분수 가동에 들어갔다. 매일 오후 8시30분부터 20분간 경쾌한 음악에 맞춰 다리 하단에서 항구로 시원하게 물줄기를 뿜는다. 새연교는 한국관광공사의 ‘야간관광 100선’에도 선정된 곳이다. 해질 무렵 범섬 주위로 펼쳐지는 노을도 아름답다. ‘새로운 인연을 만들어 가는 다리’라는 해석답게 분위기 내기 좋은 산책 코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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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귀포항에서 새섬으로 연결된 새연교에서 매일 밤 음악분수 쇼가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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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연교 음악분수는 다리 하단에서 서귀포항으로 시원하게 물줄기를 뿜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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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귀포 올레시장에서 맛볼 수 있는 꽁치김밥.

인근 서귀포 올레시장은 관광객에 특화된 시장이다. 대게모듬튀김, 꽁치김밥, 제주감귤타르트 등 제주에서만 맛볼 수 있는 간식거리가 가득하다. 렌터카 여행객이 많은 점을 감안해 시장과 바로 연결된 주차장을 갖췄고, 숙소에서 먹을 수 있도록 회를 포장 판매하는 점포도 많다.


서귀포=글ㆍ사진 최흥수 기자 choissoo@hankookilbo.com


2020.07.01원문링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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