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뻘건 눈에 흉기를 든... 학대 아동이 그린 '아빠의 얼굴'

[이슈]by 한국일보

학대 아동들이 그린 그림 속 '어두운 풍경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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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대 당한 아이들의 스케치북엔 절망에 가까운 풍경들이 가득하다. 바움심리상담센터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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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저는 밤에 잠을 못 자서 언제나 슬프고 힘들어요” 아버지로부터 상습적으로 신체적으로 학대를 당한 5세 아동 A군은 자신의 모습을 ‘눈물을 흘리는 모습’으로 묘사했다. 밤마다 아버지가 흉기를 휘두르며 어머니와 싸우는 모습을 너무 자주 보였기 때문에, A군은 잠을 이룰 수 없었다고 한다. 바움심리상담센터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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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 가정에서 자란 7세 여자 아이의 그림. 집이 거친 소용돌이 속에 둘러싸여 있다.

거친 회오리 속에 고립된 집, 눈물을 뚝뚝 흘리는 소년... 섬뜩한 느낌의 그림들은 놀랍게도 열 살이 채 안된 아이들의 작품이다. 형형색색 무지개나 눈부시게 푸른 하늘이 이들의 그림 속엔 없다. 외로움과 불안, 자신과 세상에 대한 적개심으로 가득한 이 그림들은 ‘학대’가 남긴 흔적이다.


지난해 아동 학대로 숨진 아이가 43명, 학대 건수는 3만 건을 훌쩍 넘었다. 안타까운 소식은 최근 한 달 사이에도 잇따라 전해졌다. 쇠사슬에 묶인 채 감금돼 있던 아홉 살 아이가 가까스로 탈출해 목숨을 구했고, 동갑내기 아이는 여행 가방에 7시간이나 갇혀 있다 끝내 고통스럽게 생을 마감했다. 아동 학대 사건 대부분이 친부모에 의해 일어난다는 점을 고려하면 학대 피해 아동의 수는 이보다 훨씬 더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학대받는 아이들은 대개 ‘징후’를 보인다. 온몸으로 ‘살려 달라’는 신호를 보낸다. 우울증이나 주위산만, 행동장애로 그림 치료를 받는 아이들 대부분이 가정폭력 피해 경험이 있다. 언어로 감정을 풀어내는 데 익숙지 않은 아이들에게 가장 고마운 도구는 그림이다. 서툰 말로 미처 다 전하지 못한 아이들의 절규가, 이들이 그려 낸 그림 속엔 있다. 한국일보 뷰엔(View&)팀이 아동 그림 치료 전문가인 조영숙 바움심리상담센터장과 함께 학대 피해 아동들의 그림을, 그 거친 마음 속의 풍경을 들여다봤다.

“선생님, 저는 제가 싫어요” 그림에 나타난 깊은 자기혐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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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대 피해를 당하고 있던 7세 아동이 그린 자화상. 얼굴 한가운데 검은 구멍이 뚫려 있고, 두 눈은 새까맣게 텅 비어 있다. 세상과의 접촉을 상징하는 두 손은 아예 묘사가 생략돼 있다. 바움심리상담센터 제공

학대 피해 아동들은 대개 그림 그리기를 두려워한다. 특히, 가해자가 포함된 ‘가족’의 그림을 회피한다. 고통스러운 상황이 재현될까 두려워서다. 위 그림을 그린 7세 아동도 마찬가지였다. 아이는 자기 자신의 모습을 그려 보라는 말에 식은땀을 줄줄 흘렸다. 거침없이 그리는 친구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선생님, 도저히 못 그리겠어요”라며 끝내 거부했다.


아이가 어렵사리 그린 자신의 모습은 입에 새카만 구멍이 뚫려 있고 두 손은 통째로 잘려 나갔다. “손과 입의 묘사가 생략된 것은 외부 세계와의 소통 단절을 의미해요. 어린 아이들은 세상을 탐색할 때 무엇이든 일단 손으로 만져 보는데, 그런 접촉 자체가 아예 불가능한 상태로 볼 수 있는 거죠.” 비슷한 또래가 그린 그림에 비해 형태가 극히 단순하고 자세한 묘사가 생략된 것은 자신의 신체에 대한 자신감이 매우 낮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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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생활 중 폭력적인 이상행동을 보이던 중학교 남학생들이 그린 자화상. 우스꽝스럽고 추한 모습으로 자신의 모습을 묘사했다. 이들은 모두 가정 내 신체 학대, 정서 학대의 피해자들이었다. 바움심리상담센터 제공

아이들은 보통 자신에 대해 느끼는 ‘감정’을 반영해 인간상을 만들어 낸다. 그래서 누군가에게 신체적, 감정적으로 학대를 받는 아이들은 자기 자신에 대한 노골적 혐오감을 그림으로 표현하곤 한다. 왼쪽 그림은 교실에서 난동을 부린 중학생의 그림이다. 벌거벗은 모습으로 자신을 비하했다. 자신의 얼굴 대부분을 검은색 크레파스로 거칠게 칠한 남학생의 그림(오른쪽)도 마찬가지다.


“두 아이 모두 가정에서 심한 정서적 학대를 받아 온 것으로 의심됐어요. 사실 정서적 학대는 어느 부모나 한 번쯤 자신도 모르게 했을 거예요. ‘내가 너를 낳고 미역국을 먹었다니’ ‘행동이 칠칠치 못하면 얼굴이라도 예뻐야지’ 이런 언어 폭력도 정서 학대에 포함됩니다.”

아이들이 겪는 우울은 소리 없이 덮친다

학대받는 아이들은 우울하다. 하지만 무력감을 감정에 드러내는 어른들과 달리 아이들의 우울은 종잡기가 힘들다. 울다가도 금세 웃어버리는 게 아이들이다. 대소변 가리기에 어려움(유분증ᆞ야뇨증)을 보이거나, 동물을 괴롭히는 등의 행동장애로 우울감이 발현되기도 한다. 충분히 사랑받지 못해서 생기는 아이들의 우울감은 말과 행동보다 그림을 통해 선명히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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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로부터 학대당하다 버려진 경험이 있는 중학교 여학생이 그린 '집' 그림, 도끼를 든 채 나무를 내리찍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그려 넣었다. 바움심리상담센터 제공

여기, 화폭 한가운데 소녀가 있다. 얼굴엔 눈, 코, 입이 없다. 그림의 주제 ‘집’과는 아무 상관 없는 나무를 여러 그루 그리고는 도끼로 사정없이 내리치는 모습을 그려 넣었다. 부모에게 심한 신체적 학대를 받다 버려진 중학교 2학년 여학생의 그림이다. “그림 속의 나무는 무의식적인 자화상이라고 할 수 있어요. 나무를 도끼로 자르면서 ‘자기 파괴적’인 모습을 보인 거죠.” 심한 우울증을 앓던 아이는 ‘자살 고위험군’으로 판단돼 집중 상담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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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감을 느끼는 아이들에게 ‘이야기가 있는 그림’을 그리게 하면, 대체로 그림 속 대상은 철저히 고립돼 있거나 죽음 직전에 처해 있다. 바움심리상담센터 제공

‘주의력결핍 행동장애(ADHD)’ 판정을 받은 9세 남자아이의 ‘풍경화’에선 아이가 겪고 있는 극도의 우울감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곧 폭발할 것처럼 빨갛게 달아오른 산속에 사람이 갇혀 있고, 오른쪽으로는 폐허처럼 부서진 집이 보인다. 무섭게 범람한 강물은 캔버스의 절반을 채우고 있다. “아이가 ‘엄마가 밤마다 너무 심하게 때려서 아파 죽을 것 같다’고 털어놓기 시작하더라고요.” 또래 아이들에 비해 산만한 태도는 결국 학대로 인한 ‘정신질환’으로 드러났다.

“아빠가 무섭다, 엄마가 밉다…” ‘끓는 분노’로 그려 낸 그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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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로부터 신체적, 정서적 학대를 당한 5세 남아 A군이 그린 가족그림. 화면 중앙에 커다랗게 그려진 동생을 부모가 방망이와 주먹으로 공격하고 있는 모습이다. 바움심리상담센터 제공

가정폭력에 노출돼 있는 아동들은 부모의 폭력에 분노하는 한편, 그의 행동을 그대로 모방하는 이중적 ‘양가 감정’을 갖게 된다. 그래서 폭력 가정에서 자라난 아이들이 나중에 성인이 되면 가정폭력을 세대 간에 그대로 전승하게 되는 결과를 낳기도 한다.


아버지로부터 심한 신체적 학대를 당한 5세 남자아이 A군의 그림을 보면, 한가운데 여동생이 있고, 아래쪽에는 방망이를 든 아버지가, 오른쪽에는 긴 작대기를 든 어머니가 있다. “A군의 경우도, 아버지로부터 학대를 학습해 동생에게 똑같이 모방한 경우였어요. 'OO는 왜 없니’ 하고 물었더니 아이가 설명하기를 자기는 왕발차기로 여동생을 때리고 있다고 하더라고요. 대다수 가정폭력 가해자들이 어린 시절 가정폭력의 피해자였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폭력은 대물림될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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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군의 B아동이 그린 '술에 취한 채 흉기를 휘두르는 아빠’의 모습. 바움심리상담센터 제공

A군의 동생 B아동은 아버지에 대한 감정을 더 노골적으로 표현했다. “A군을 따라온 B아동에게 무엇이든 자유롭게 그려 보라고 했더니, 술에 취한 아버지의 얼굴을 그렸어요. 벌겋게 충혈된 눈으로 이를 무시무시하게 드러낸 모습이었죠. 실제보다 훨씬 과장되게 표현함으로써 아버지에 대한 적개심을 강하게 드러낸 거죠.”


B아동은 부모가 폭력을 휘두르는 장면을 직접적으로 묘사하기도 했다. 아래 그림은 아버지가 휘두른 병에 맞고 가족들이 피를 흘리는 모습이다. “친척들이 크게 다치자 119 구급대원들이 출동했다는 이야기를 아이가 담담하게 하는 모습을 보고 적잖이 놀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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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군의 동생 B아동이 그린 '친척을 찌르는 아빠의 모습. 바움심리상담센터 제공

‘늦지 않게 구해달라’는 절규에 귀 기울일 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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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대피해아동 A군이 그린 친구들과 자신의 모습. 친구들의 얼굴은 노란색, 파란색 등 밝은 원색 계열로 알록달록 표현한 반면, 오른쪽 하단에 그린 본인의 얼굴은 '까만 색'으로 색칠했다. 크기도 친구들에 비해 현저히 작다. 바움심리상담센터제공

‘자기표현’에는 치유의 힘이 있다. 손쓸 수 없을 정도로 깊게 상처를 입은 것처럼 보이던 아이들도 그것을 용기 내 꺼내 보이는 순간부터 치료가 시작된다. 위아래의 두 그림은 A군의 극적인 변화를 보여 준다. 위 그림은 치료 초기에 그린 그림으로, 친구들과 어울리는 자신을 가장 구석진 곳에, 가장 작게 표현했다. 두 눈 위를 검게 칠하는 등 타인과의 관계에서 크게 위축된 모습을 보여 줬다.


반면 치료가 어느정도 진행된 시기에 그린 아래 ‘가족화’에선 활짝 웃는 자신의 모습을 가운데에 그려 넣었다. 가족 모두가 웃고 있고, 그림에 쓴 색깔과 형태도 다양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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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년에 걸친 그림상담치료가 종료될 때쯤 A군이 그린 가족사진. 본인이 캔버스 한가운데(왼쪽에서 두번째)로 이동했다. 부모님과 동생 모두가 활짝 웃고 있는 모습이다. 바움심리상담센터 제공

“아이들의 회복탄력성은 어른들보다 훨씬 좋아요, 놀라울 정도죠. 학대 경험이 오랫동안 심리적 외상으로 남기도 하지만 제때 치료만 된다면 빠르게 회복할 수 있어요.” 이럴 때 아이들은 어른보다 훨씬 강하다.


체코의 테레진 지역에 위치한 나치의 난민수용소엔 이곳에서 정신적 외상을 입은 아이들의 그림이 보존돼 있다. 부모와 형제가 끔찍하게 고문당하다 목숨을 잃는 장면을 목격한 아이들은 그곳을 대개 ‘지옥’으로 그려 냈지만, 새와 나비, 동물이 뛰노는 아름다운 상상 속 풍경으로 묘사하기도 했다. 연구자들은 아이들의 그림에 대해 이렇게 정의했다. “재난에 움츠러들었다가도, 마침내 살아남고야 마는 아이들의 생명력은 가히 대단했다”고.


‘늦지 않게 구해 달라’는 아이들의 절규엔 대체로 ‘언어’가 없다. 그래서 각별히 마음을 기울여야 한다. “학대 피해 아동들 대부분이 처음에는 주저하지만 함께 그림을 그리다 보면 누구보다 자신의 아픔에 대해 알리고 싶어 해요. 더 이상 아프기 싫다고, 사랑받고 싶다고요.” 제때 손 내밀 수만 있다면, 아이들은 언제든 ‘다시 강해질’ 준비가 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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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래 아동들과의 관계형성에 큰 어려움을 겪던 A군이 그린 고립된 자신의 모습. 바움심리상담센터 제공

박지윤 기자 luce_jyun@hankookilbo.com

김주영 기자 will@hankookilbo.com

2020.07.07원문링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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