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인의 눈으로 현장을 보다... 과학수사대 감식 요원들

[테크]by 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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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일 서울 광나루 드론체험장에서 서울경찰청 과학수사대 현장감식반이 30여종 100여개의 장비를 펼치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홍인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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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일 서울 광나루 드론체험장에서 서울경찰청 과학수사대 현장감식반이 30여종 100여개의 장비를 펼친 후 사람의 뼈를 찾는 모습을 재현하고 있다. 서재훈기자

범인이 완전범죄를 꿈꿀수록 범행의 수법은 날로 교묘해진다. 하지만 어떤 범죄 현장이든 반드시 흔적은 남기 마련, 과학수사대는 티끌만 한 흔적도 찾아내고 감식해 범행의 전모를 밝혀낸다.


지난 26일 서울경찰청 과학수사대 현장감식 요원들을 광진구 광나루 드론 체험장에서 만났다. 전날 밤 11시에 발생한 사건을 처리하느라 1시간 밖에 못 잤다는 요원들의 표정에서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혈흔 분석용 시약 키트 등 각종 감식 장비를 펼쳐 설명하는 동안 그들의 눈은 초롱초롱 빛이 났다.


요원들은 이날 드론 촬영을 위해 30여 종 100개가 넘는 감식장비를 펼쳐 보였다. 변사자의 체온을 측정할 수 있는 디지털 직장 온도계와 화재현장 등 어둠 속 감식에 필요한 화재 감식용 탐조등, 부패한 사체에서 발견된 곤충을 분석해 사후 경과 시간을 추정할 수 있는 법곤충학 키트 등 전문 장비가 먼저 모습을 드러냈다. 그 뒤 매장된 사체 발굴용 호미와 모종삽, 줄자, 나침반 등 일반적인 작업 도구들도 두 대의 차량에서 잇따라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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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경찰청 과학수사대 현장감식반 장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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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경찰청 과학수사대 현장감식반 장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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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2월 말 정신과 진료 상담 중이던 의사가 환자에게 흉기에 찔려 사망한 서울 종로구 강북삼성병원에서 경찰과학수사대 요원들이 현장 감식을 하기 위해 보호복을 입고 있다. 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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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월 22일 청량리 청과물시장 화재 현장에서 경찰과학수사대와 국립과학수사연구원 등 유관 기관 관계자들이 합동 감식을 하고있다. 연합뉴스

발로 뛰며 범인을 검거하는 형사와 달리 과학수사대는 현장감식을 통해 증거를 수집하고 분석해 범행을 입증하고 진범을 확정한다. 범죄현장에 떨어진 머리카락이나 옷에서 분리된 작은 실오라기는 물론이고, 육안으로 잘 보이지 않는 아주 작은 숨은 증거도 샅샅이 찾아내는 것이 이들의 역할이다. 피해자의 손톱 끝에 묻은 혈흔이나 사체 및 물건에 남은 지문, 체세포, 땀과 같은 각종 분비물, 곰팡이, 먼지 등 현장에서 확보한 미세한 증거물이 범행의 전모를 밝히는 열쇠가 된다.


“'역지사지'로 범인의 입장에서 현장을 보는 것이 감식요원의 기본 수사 방법이죠.” 과학수사대 경력 20년 차 박성우(48) 경위는 절도 사건을 처리하는 과정을 이렇게 설명했다. 범행 장소에 도착한 감식요원들은 집안으로 바로 들어가지 않고 집 주변을 먼저 살핀다. 절도범의 침입 경로를 찾기 위해서다. 만약 2층 창문 방범창이 뜯겨져 있다면, 요원들은 이 위치를 범행의 출발점으로 가정한 뒤 안방과 작은방, 거실 순으로 범행 동선을 그린다.


요원들이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살피는 것은 바닥. 범행 현장을 자유롭게 이동하며 감식을 벌이기 위해선 바닥에서 범인의 족적을 먼저 확보해야 한다. 요원들은 이 같은 족적 확보 작업을 '지뢰제거'라고 부른다. 그 후 출입문이나 화장대 등 범행의 흔적이 남을만 한 위치로 이동하며 순차적으로 증거를 수집한다.


범죄의 세계가 요지경이다 보니 황당한 상황과 맞닥뜨리기도 한다. 절도 사건 현장에 도착해 피해자의 진술을 듣고 현장감식을 진행하던 요원들이 미처 도주하지 못하고 방안에 숨어 있던 범인을 발견해 현장에서 체포한 경우도 있었다.


현장감식 과정에서 뜻밖에 결정적인 증거물을 발견하기도 한다. 절도 피해자를 가장해 회사 공금을 유용하려던 범인이 차 트렁크 아래 거액의 현금을 숨겨둔 것을 과학수사 요원이 현장감식 도중 찾아내 자작극임을 밝혀낸 사례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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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80년대 과학수사 사진. 과학수사 관계자들이 주민등록증 발급신청서에 날인된 지문을 분석하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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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의 과학수사 장비. 경찰 과학수사 관계자들이 범죄현장에서 수집한 미세증거에 대해 현미경으로 분석하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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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구로 호프집 여주인 강도살인 사건 당시 수배사진과 서울 남부경찰서(현 금천경찰서)가 만들어 배포한 범인 몽타주. 한국일보 자료사진

날로 발달하는 감식장비와 분석 기법 덕분에 장기 미제 사건이 하나둘씩 해결되고 있다. 지난 2002년 12월에 발생한 구로구 호프집 여주인 살해 사건의 범인이 15년 만에 검거됐는데, 맥주병에 남은 ‘쪽지문(일부만 남은 지문)’이 결정적 증거가 됐다. 15년 전 감식이 불가능했던 불완전한 증거물이 장비와 분석 기법이 발달하면서 사건 해결의 실마리가 된 셈이다.


현장감식, 나아가 범행의 결정적 증거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사건 현장의 보존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과거에는 이 같은 개념이 희박했던 데 반해 지금은 피해자 등 일반 시민들도 범행 현장을 훼손하는 경우가 많이 줄었다. 이 같은 변화는 과학수사대의 지속적인 홍보 외에도 미국 과학수사대의 활약을 그린 인기 드라마 ‘CSI시리즈’도 한몫을 했다.


그런데, 드라마를 통해 얻은 지식이 오히려 감식 업무를 방해하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면, 현장에서 지문 감식을 하고 있는 요원에게 피해자가 드라마에서 본 유전자 감식을 요구하는 경우다. 요원들은 지문 감식과 유전자 감식을 피해자에게 설명하느라 진땀을 빼기도 한다.


현장감식반 6년 차 조영훈(40) 경사는 “지문 감식과 유전자 감식을 상황에 띠라 사용한다”며 "얼마 전 지문을 남기지 않기 위해 장갑을 끼고 편의점에서 물건을 훔친 범인을 검거했는데, 범행 후 쓰레기통에 버린 장갑에서는 유전자를 채취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끔직한 사건 현장에서 정신적 충격에 자주 노출되다 보니 현장감식 요원들은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 Post-traumatic Stress Disorder)'를 겪을 가능성이 높다. 박 경위는 “요원들은 일반인보다 강한 멘탈이 필요하다”며 “PTSD를 막기 위해 사건 현장에서는 감식에 몰두하지만, 일을 마치면 가급적 현장을 잊으려고 노력한다”고 말했다. 조 경사는 아울러, "요즘엔 코로나19 전염 위험성 때문에 더 경각심을 가지고 현장감식에 임한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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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7월 서울 종로구 종각역 부근에서 한 남성이 현금수송차량을 탈취하려다 도주해 경찰이 수사에 나섰다. 사진은 종로경찰서에서 과학수사 요원이 탈취당한 차량을 감식하는 모습. 한국일보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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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12월 서울 중구 초록우산 어린이재단 대회의실에서 입양됐던 이정미씨(현 윤정미)가 40년만에 친어머니인 최숙자씨를 극적으로 상봉하고 있다. 이번 두 모녀의 만남은 경찰 과학수사대 현장감식반이 채취된 유전자를 국립과학수사원에 보내 99.9% 일치로 친자관계를 확인돼 상봉이 성사됐다. 배우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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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경찰청 과학수사대 현장감식반 요원들이 컵에 묻은 지문을 감식하고 있는 모습. 한국일보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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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경찰청 과학수사대 현장감식반 요원들이 취재를 마치고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왼쪽부터 이제우 경위, 최평엽 경사, 박성우 경위, 조영훈 경사. 서재훈 기자

홍인기 기자 hongik@hankookilbo.com

서재훈 기자 spring@hankookilbo.com


2020.11.03원문링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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