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자식 이혼시킨 나쁜 ×” 변호사는 화장실에 숨어야 했다

[라이프]by 한국일보

[김지은의 ‘삶도’ 인터뷰] <60>이혼전문 변호사 최유나


“드라마보다 더 막장인데 참고 살라니…

이혼은 다시 행복해지려 치르는 수업료”

한국일보

9년째 이혼전문 변호사로 일하는 최유나 변호사를 3일 서울 중구 한국일보에서 만났다. 최 변호사는 결혼과 이혼의 현실을 다룬 인스타툰 ‘메리지 레드’의 작가로도 유명하다. 배우한 기자

이혼, 삶의 동반을 약속한 사람과 헤어지는 일. 그 과정은 분명 큰 고통이다. 이혼하려고 결혼하는 사람은 없으니까. 그래서 그는 TV에서 이런 비아냥거림을 볼 때 화가 난다. “얘, 한 번 갔다 왔잖아~” “그러니까 잘했어야지” 같은. 이혼을 원했든, 당했든 당사자에게는 인생의 큰 생채기라는 걸 잘 알기 때문이다. “사별한 사람한테 웃으면서 농담하진 않잖아요?”


최유나(35) 변호사(법무법인 태성)는 이혼이라는 전장에서 당사자들과 함께해온 법률 대리인이자 우군이다. 대한변호사협회의 전문분야 등록심사를 거쳐 ‘이혼전문’이란 수식어도 얻었다. 전문성을 인정받은 일종의 훈장이지만, 세상은 이혼전문 변호사를 곱게 보지만은 않는다. “내 아들을 법정에 서게 한 나쁜 ⅹ!” 욕설과 손찌검에 화장실로 몸을 피해야 하는 수모도 당했다. 그래도 변치 않는 사실. 그는 이혼의 당사자들이 가족에게도, 친구에게도 말하지 못하는 속내를 보이는 사람이라는 거다.


의뢰인에게 이득이 되는 방향으로 이혼의 법적 절차를 집행하는 대리인. 사전적 정의는 그렇겠지만, 이혼전문 변호사의 현실은 훨씬 복잡하다. 법률 대리인일 뿐인 변호사에게 의뢰인들은 분노와 절망, 한탄, 슬픔, 괴로움 같은 감정의 응어리를 풀어놓는다. 그 모든 걸 함축하는 말은 결국 ‘왜 이혼에 이르게 됐는지’가 되겠지만. 법적인 상담과 감정적인 상담 사이의 경계를 뚜렷이 긋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그 업의 내공은 예상치 못한 데서 위력을 발휘했다. 자신의 몸과 마음이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진 위기의 순간에 말이다. 점심 시간까지 상담에 할애하면서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몰두한 변호사 업무, 퇴근해선 새벽까지 잠들 줄 모르는 아이와 씨름한 ‘독박 육아’가 가져온 ‘번아웃’이었다. 그 무렵 의뢰인들이 한 말들이 생각난 거다. “결혼생활에 너무 ‘올인’했더니, 오히려 그게 원인이 됐어” “오롯이 나에게 집중할 수 있는 일을 만들었더니 치유가 되더라” “예전엔 내가 왜 그렇게 살았을까”.


자신에게도 삶의 균형을 잡을 무언가가 필요했다. ‘나이 들어 내가 쓴 책이 열 권쯤 되면 좋겠다’는 오랜 꿈을 꺼냈다. 책을 쓰는 건 너무 거창하니, ‘인스타툰(인스타그램을 활용한 웹툰)’부터 해 보자 싶었다. 이혼전문 변호사를 하며 느낀 삶의 지혜를 나누는 게 목적이었다. 그렇게 특별히 행복하기만 한 인생도, 절대적으로 불행한 인생도 없다는 걸 말이다.


그렇게 2018년 9월 4일 인스타툰 ‘메리지 레드’의 첫 화를 내보냈다. 열흘 남짓 만에 구독자(팔로어)가 1,000명을 넘기더니 현재는 무려 25만4,000명이 애독한다. 지난해 ‘우리 이만 헤어져요’라는 단행본으로 출간한 데 이어 드라마 판권 계약까지 마치고 제작을 앞두고 있다. 결혼생활의 빨간불이란 뜻의 ‘메리지 레드’가 혼인 여부와 상관없이 독자들의 눈길을 잡는 건 그것이 삶에 관한 이야기이기 때문일 것이다.

로스쿨 들어가자마자 ‘난 망했구나’

한국일보

법학을 공부한 적 없는 ‘생비법’으로 로스쿨에 들어간 그에겐 그나마 가족법이 가장 이해가 쉬웠다. 일찌감치 ‘이혼전문 변호사’로 진로를 정한 계기가 되기도 했다. 배우한 기자

-아버지의 권유로 변호사가 된 걸로 알아요. 학부 전공도 영어통번역학이라 준비를 마음먹기까지 쉽진 않았을 것 같아요. 다른 계기도 있나요?


“네, 3학년 때까지도 방송기자와 로스쿨 진학 사이에서 고민을 했어요. 그러다가 우연히 연극을 보러 갔는데 주인공이 30대 이혼전문 변호사였죠. 극에서 그려진 변호사의 일이 무척 인상적이었어요. ‘저거다’ 싶더라고요. 어릴 때부터 남의 얘기 들어주고 공감하기를 좋아했는데, 변호사도 상담을 통해 해결책을 찾아주는 일이니 잘 맞을 것 같았고요.”


-로스쿨에 들어가보니 실제 적성에 잘 맞던가요.


“생각과는 달랐죠. 너무 가볍게 결심했나 싶었어요. 정말 어렵더라고요. 지혜가 아니라 지식을 쌓는 일이었죠. 법에 근거해야만 의뢰인에게 해결책을 제시해줄 수 있으니까요. 성적도 너무 안 좋았어요. 첫 학기에 완전 바닥을 찍었죠.”


-그 정도였어요?


“네, 인생 망했다는 생각까지 들었으니까요. 나는 그냥 인문계 쪽으로 갔어야 했는데, 방향 전환한 게 최대의 실수구나 싶었어요. 중간고사에서 재시험 대상에 든 적도 있죠. 아예 채점할 수준이 안 되니 다시 시험을 쳐야 하는 거였어요. 자신감이 떨어져서 친구들과 제대로 어울리지도 못했죠. ‘저들은 잘하는 사람들, 나는 망한 사람’이란 생각에 빠져서요.”


-왜 그토록 공부가 어려웠을까요.


“로스쿨 도입 초기라서 당시엔 사법시험 준비를 하다 진학한 사람들이 20, 30% 정도 됐어요. 또 법대 졸업생이 30, 40%, 나머지는 직장생활을 하다 온 사람들이 대부분이고요. 저는 ‘생비법’(법학을 공부해본 적 없는 로스쿨생)이었죠. 나이는 제일 어렸고요. 법을 가장 모르는 축에 속했던 거예요. 저에겐 법조문이나 법률용어가 마치 스페인어 같았죠.”


-변호사가 됐으니 극복한 건데, 어떻게 했나요.


“그냥 열심히 하는 수밖에 없었어요. 정독실에서 살았죠. 밥 먹는 시간 빼고는 공부만 했어요. 로스쿨생들도 대개 일주일 중 하루는 쉬거든요. 저는 하루가 아니라 네 시간 정도 쉬었어요. 명절에도 집에 가지 않았죠. 바닥에서 시작했으니, 하는 족족 좋아졌어요. 1년 정도 그렇게 하니까 성적도 나아지고, 자신감도 회복되더라고요.”


-이혼전문 변호사라는 진로는 언제 정한 건가요?


“로스쿨에 다닐 때부터 가족법이 가장 와 닿았어요. 이혼전문 변호사를 해볼까 싶었지만, 일단 변호사시험부터 합격하고 생각하자 했죠. 그런데 변호사시험에 붙고 나서 또 바닥을 쳤어요.”


-왜요?


“취업이 안 됐죠. 20대 여성 변호사를 원하는 로펌이 별로 없었어요. 일단 의뢰인들이 대개 나이 어린 변호사는 선호하지 않거든요. 그러니 오히려 30, 40대인 동기들은 바로 취업이 됐죠. 100군데쯤 원서를 썼는데 저는 다 떨어졌어요.”


-그럼 언제 취업이 됐나요.


“8개월쯤 지났을 때 지역을 넓혀서 인천의 로펌에도 지원을 한 거예요. 면접을 봤는데 대표 변호사님이 ‘혹시 이혼 사건도 맡을 수 있느냐’고 물으시더라고요. 알고 보니 다른 변호사들이 꺼리는 일이었죠. 제게는 차선책도 아니고 본래 하고 싶었던 일이니 인연이구나 싶더라고요.”

‘이혼전문’이라는 틈새 시장

한국일보

변호사가 되고 나니 이번엔 ‘20대 여자 변호사’라는 게 약점이 됐다. 그런데 그런 그를 선호하는 의뢰인들이 있었다. 배우한 기자

-실제 사건을 맡아보니 어땠나요.


“남들보다 빨리 전문성을 찾은 계기가 됐죠. 보통 3, 4년 정도 이런 저런 사건을 맡아보다 전문 분야를 정하거든요. 저도 초반 1년은 이혼 사건뿐 아니라 민사, 형사, 행정 사건을 두루 해 봤는데 이혼 사건이 가장 잘 맞더라고요. 예를 들면 형사 사건은 스트레스가 컸어요. 범죄자가 죄를 지어서 구속이 된 건데도, 나 때문이라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이혼 사건은 어떤 게 달랐나요.


“이혼 사건도 물론 선고 전에 제대로 못 자고 결과에 크게 책임감을 느끼는 건 비슷하지만 중간에 변호사가 노력할 여지가 많다는 차이가 있어요. 의뢰인들이 합의에 이르기도 하고, 변호사를 통해 서로의 얘기를 듣고 응어리를 푸는 일도 있죠. 변호사에게 원하는 결과도 천 명이면 천 명이 다 달라요. ‘무조건 (재산을) 100만원이라도 더 받아야 한다, 돈이고 뭐고 저 인간 얼굴만 안 보게 해달라, 나는 무조건 애만 키우면 된다’…. 반면, 민사나 형사는 대개 결과가 정해져 있죠. 민사라면 손해배상 책임의 유무를, 형사는 죄의 유무를 가리니까요.”


-의뢰인과 하는 상담도 무척 중요하겠군요.


“맞아요. ‘틈새 시장’ 같더라고요. 이혼 사건은 여자 변호사를 더 선호하는 경향이 있거든요. 무슨 얘기를 털어놔도 공감해줄 것 같고, 얘기도 더 잘 들어줄 것 같은 느낌을 주나 봐요. 대표 변호사한테 처음부터 ‘저는 여자 변호사로 해주세요’라고 요구하는 의뢰인도 있고요. 처음으로 자신감을 얻었어요. 로스쿨에선 법대생들한테 밀리고, 취업 시장에선 연륜 있는 변호사들한테 밀렸는데 변호사가 되고 나니 나를 선호하는 분야가 있었던 거예요.”


그는 변호사 2년 차부터는 아예 이혼 사건에 ‘올인’했다. 로펌에서도 그의 의욕을 믿고 이혼전문팀을 꾸려 뒷받침했다. 로펌에 들어온 사건을 배당 받는 게 아닌 상담부터 수임, 사건 완료까지 도맡아 해볼 수 있게 된 거다. 2014년 이혼전문 변호사로 등록됐을 때는 그야말로 펄쩍펄쩍 뛰었다. 그는 “변호사시험에 합격했을 때보다 더 좋았다”고 했다.


-이혼전문 변호사로 등록된 게 왜 그렇게 좋았나요.


“정말 ‘내 일’로 인정을 받은 기분이었죠. 내 소명이고 천직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미래가 보이지 않던 시절도, 남들에게 치여 살던 시기도 있었는데 말이에요. 자신감이 생겼고 더 잘하고 싶었죠. 어디 가서 소개할 때도 ‘이혼전문 변호사’라는 말이 나오고요. 그냥 변호사라고 말하는 게 일반적이잖아요. 하하.”

현실에서 맞닥뜨린 선입견의 벽

한국일보

그도 초년에는 “결혼도 안 한 사람이” ”애도 안 낳아본 사람이”라는 소리를 듣기도 했다. ‘이혼전문 변호사’로 등록된 뒤 그런 의뢰인은 거의 없다고 한다. 책상에 놓인 건 그의 책 ‘우리 이만 헤어져요’. 배우한 기자

-이혼전문 변호사라는 타이틀을 달고 나서 달라지는 것도 있던가요?


“의뢰인들이 기혼인지 아닌지 묻지 않더라고요. 심지어 결혼하고 나서도요. 그런데 좋지 않은 시선도 많이 느꼈죠. 저희 엄마부터 창피하다고 하시더라고요. ‘왜 하필 그 많은 분야 중에 이혼전문이냐’ 하시는 거죠. 친구들도 ‘영어를 전공했으니까 무역 거래나 국제법 전문을 하지’ 하고요. 그런 말을 듣기 전까지 저는 그런 생각을 한 번도 해 보지 않았거든요.”


-아마도 이혼전문 변호사를 ‘물불 안 가리고 어떻게든 이혼하게 만드는 변호사’라고 여기는 선입견이 있어서 그런 듯해요.


“소송으로 가면 맞는 말이기도 해요. 변호사는 온전히 당사자의 얘기를 듣고 법률 대응을 대행하는 사람이니까. 그런데 그 바탕에는 ‘이혼은 나쁜 것’이라는 생각이 깔려 있는 것 같아 안타까워요. 제가 만난 의뢰인들은 정말 이혼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이르러 온 분들인데, 그런 시선을 느끼니 억울했어요. 세상의 고정관념을 바꾸고 싶었죠.”


-실제 이혼을 결심하고 찾아온 의뢰인들은 대개 이유가 뭔가요?


“배우자의 외도나 폭행이 가장 많아요. 그런데도 ‘그럴 거면 왜 결혼은 했냐’ ‘참을성이 없다’ ‘애가 불쌍하다’ ‘그런데도 변호사는 돈 벌려고 이혼을 부추기냐’고 하니 이해가 안 됐죠. 의뢰인들의 눈에서 눈물이 멈추고 마음이 회복되기까지 1년 이상 걸리거든요. 행복해지려고 자기 인생에서 큰 결심을 하고 노력하는 사람들인 거예요. 그들에게 손가락질 하는 사람들에게 과연 그런 경험을 해 봤는지, 그만큼 견뎌 보고 이혼을 나쁘게 말하는 건지 물어보고 싶어요.”


-상담이 이혼이 아닌 다른 결과로 이어지는 경우도 많은가요?


“의외로 이혼을 결심하기 전에 상담을 받으러 오는 분들이 많아요. ‘내가 당장 이혼할 건 아닌데, 혹시 모르니 대비를 하려면 뭐가 필요한지 알아보려고 왔어요’ ‘이혼한다기 보다 내가 이렇게 해야 저 인간이 정신을 차릴 것 같아서’ 하시는 거죠. 아니면 남편과 대화하고 싶은데 제대로 소통이 안 돼서 변호사를 통해서 하고 싶어서 왔다거나, 결혼생활이 너무 힘들어서 상담하러 온 분들도 있죠. 실제 이혼으로 이어지는 비율은 5명 중 1명꼴쯤 돼요.”


-이혼을 결심했다가도 다른 결론에 이르는 경우도 있나요?


“그럼요. 이혼을 하려고 소장을 넣었다가도 언제든 바뀔 수 있는 게 사람 마음이니까요. 오히려 이혼 소송을 하면서 상대를 이해하게 돼서 접는 경우도 있어요. 소송을 하면 서면이 왔다 갔다 하는데 상대의 서면을 보면서 ‘아, 이래서 그런 거였어’ 하는 거죠. 내가 먼저 화해하자고 하기는 자존심 상하니까 변호사를 통해서 상대 변호사에게 철회 의사를 묻는 경우도 있고요. 변호사들끼리 의중을 전달하다가 당사자들이 대화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서 소송 취하로 이어지는 일도 있죠. 물론 그런 경우는 드물어요. 소송까지 왔다는 건 이미 심각한 파탄 지경인 경우가 대부분이니까.”

“저 이혼할까요, 말까요”

한국일보

그는 ‘이혼은 나쁜 것, 결혼은 지켜야만 하는 관계’로 여기는 사회의 고정관념이 안타깝다. 배우한 기자

-상담에서 변호사의 역할은 어디까지인가요.


“(이혼) 결정에는 관여할 수 없어요. 결정한 분들이 이후의 과정을 밟는 데 도움을 드리는 게 변호사의 역할이거든요. 하지만, 가끔 결정을 요구하는 분들도 있죠.”


-이혼할지, 말지를요?


“네. ‘이 정도면 이혼하는 게 맞죠?’ 혹은 ‘남편이 이혼하자는데 할까요, 말까요’ 물으시는 거죠. 저는 절대 대답하지 않아요. 제가 아무리 이혼 사건 경험이 많고 상담을 많이 했어도 당사자는 아니니까요. 상담하면서 의뢰인의 결정에 개입하지 않도록 굉장히 주의해요. 저는 대리인일 뿐이니 그럴 자격이 없기도 하고요.”


-결정까지 변호사에게 미루는 건 왜일까요.


“다른 사람의 시선이나 의견에 맞춰 살아 온 사람들이 의외로 많아요. ‘결혼은 엄마가 하라고 해서 했는데, 이혼은 변호사님이 하라면 하려고요’라고 말하는 분들이 진짜 있거든요. ‘이 정도면 이혼해도 욕 먹진 않겠죠’라는 분들도 있고요. 자포자기의 심정도 있는 것 같아요. 이혼을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상태인 거죠. 누군가 ‘이혼하세요’라고 말해주는 걸 기대하는 마음일 수도 있고요. 99%는 마음 먹었지만, 1%는 남이 채워주길 바라는 심리 상태요. 하지만 그 1%를 견디고 다시 행복해지는 부부도 있거든요. 이혼하고 싶은 마음이 99%까지 찼어도, 다시 30%로 떨어지기도 하는 게 부부 사이니까. 저도 결혼을 해 보니 딱 잘라 단언할 수 없는 관계란 걸 알겠더라고요.”


-이혼의 사유도 세대별로 차이가 있나요.


“60대 이상은 배우자의 폭행이 많아요. 참고 참다가 오시는 거죠. 40~50대는 배우자의 외도, 20~30대는 육아나 부모의 간섭 때문에 다투는 경우가 많고요.”


-이혼 사건 중 가장 까다로운 경우는 뭔가요.


“양육권 다툼이 가장 힘들고 치열해요. 감정이 좋지 않게 끝나는 경우가 많죠. 돈은 어떻든 결국 나눠지거든요. 하지만 아이는 그렇지 않잖아요. 소송 중에 아이가 힘들어져서 심리치료를 받는 일도 있어요. 다툼이 길어질수록 부모가 서로를 깎아 내리게 되고 아이한테도 그게 고스란히 전이되니까요. 그런 경우, 아이에게는 이혼 자체보다 과정이 더 큰 상처가 되죠.”

‘이혼변호사’의 보람은

한국일보

몸과 마음이 지칠 대로 지쳤을 때 의뢰인들이 말했던 ‘회복의 비결’이 생각났다. 배우한 기자

-이혼전문 변호사라서 겪은 설움도 있나요.


“법정에서 ‘우리 며느리는 혹은 우리 아들은 이혼할 생각이 없었는데 변호사가 부추겨서 하는 거다’라면서 따지거나 때리는 분들도 계세요. 심지어 아들이 바람을 피워서 며느리가 이혼을 하자고 한 건데도요. ‘우리 며느리는 착해서 참고 살 아이인데, 변호사를 만나더니 돌변했다’는 거죠. 억울하긴 한데, 잘 모르시고 하는 말씀에 일일이 반박하기도 어렵죠. 피하는 것 말고는 답이 없어서 화장실로 가서 문 잠가놓고 있었던 적도 있어요.”


-그런 걸 이기는 보람은 어디서 나오나요.


“이혼 상담하러 오실 때는 대부분 정신이 없으세요. 구두인지, 슬리퍼인지 모르고 신고 오시는 분들도 많고요. 그러다 시간이 흐르고 나서 다시 연락을 주는 분들이 있어요. 예를 들면, ‘몇 년 전 덕분에 양육권 소송에서 이겼는데, 이제 아이가 중3이 된다. 함께 행복하게 잘 살고 있다. 감사하다’고요. 그럴 때 누군가가 고통에서 빠져 나오는 일을 도왔다는 보람을 느끼죠.”


-이혼전문 변호사를 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때는요.


“변호사를 하고 나서 처음 몇 년간은 점심을 먹지 못했어요. 주로 점심시간을 활용해서 상담 오시는 분들이 많거든요. 저를 찾아와주시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서 평일이고, 주말이고 상관없이 몰두했죠. 하루에 7, 8건씩 상담을 했어요. 그랬더니 아이가 태어난 지 얼마 안 됐을 때는 정말 도망가고 싶더라고요.”


-육아를 도맡아 했나요.


“남편이 저보다 더 바쁠 때였거든요. 지금 생각해 보면 아이는 엄마가 퇴근하기만을 기다렸던 거예요. 엄마가 집에 오면 그때부터 함께 놀려고. 새벽 3시까지 아이가 자질 않으니까 정말 힘들더라고요. 그래도 아이가 건강한 것에 감사해야 하니까 힘든 걸 표출도 못했죠. 그러다 출근하면 점심도 먹지 못하고 상담하면서 누군가의 힘든 얘기를 듣는 일상이 반복되니까 마음이 병들어 가는 느낌이었어요. 이러다 우울증에 걸리겠다 싶었어요.”


-어떻게 회복했나요.


“유산까지 하고서 느꼈어요. 내가 좋아하는 이 일을 오래 하려면 밸런스가 정말 중요하다는 걸요. 이제는 앞뒤 가리지 않고 달리지 않죠.”


-이혼전문 변호사라는 일이 실제 결혼생활엔 어떤 영향을 미치나요. 긍정적인 면도, 부정적인 면도 있을 것 같아요.


“막장 드라마 같은 데서 나올 법한 이야기를 뛰어넘는 사건을 많이 접하거든요. ‘어떻게 인간이 그럴 수 있어’ 같은. 그래서 예전 같으면 분명히 화가 났을 일도 ‘이 정도면 됐지, 뭐’ 하면서 감사하게 되더라고요. 남편뿐 아니라 누구에게나요. ‘사람은 다 똑같다, 누구나 다 힘든 일이 있다, 누구나 다 실수할 수 있다, 사람은 그런 존재다’ 싶은 거죠.”

망가졌을 때 시작한 인스타툰

한국일보

그가 2018년 9월 시작한 인스타툰 ‘메리지 레드’는 구독자(팔로어)가 무려 25만 명에 이른다. 많은 공감을 얻는 이유는 그것이 결혼이나 이혼이 아닌 삶의 이야기라서다. 인스타그램 캡처

-변호사 일을 스토리로 만든 계기는 뭔가요?


“예전부터 책을 쓰고 싶다는 생각은 했지만 너무 바빠서 시작할 수가 없었어요. 이러다가 결국 못쓰겠다 싶어서 2018년 9월에 시작했어요. 책보다는 부담이 적은 인스타툰을 택했죠.”


-그 무렵이 일과 육아로 무척 힘들 때 아닌가요?


“맞아요. 몸과 마음이 너무 지쳐 있을 때 의뢰인들의 말이 생각나더라고요. 사람이 너무 힘들면 못 먹고, 못 자거든요. 저를 처음 찾아올 때 의뢰인들이 대개 그렇게 초췌해요. 그러다가 4, 5개월이 지나면 보통 회복하기 시작하거든요. 얼굴이 좋아졌다고 인사말을 건네면, 하시는 말씀들이 있어요. 가게를 차려서 일에 집중하고 있다거나, 뭘 배우고 있다거나, 힘들수록 몸을 움직여야 풀린다거나. 어떤 분들은 이런 말씀도 해요. ‘내가 결혼생활을 너무 열심히 했다. 그러다 보니, 내가 저 사람만 안 만났더라면 이렇게 살지 않았을 텐데 싶더라. 내 정체성을 지킬 수 있는 무언가를 놓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것 같다.’ 그런 말들이 생각나면서 나도 삶의 균형을 찾을 창구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죠. 또 이혼 사건을 맡으면서 느낀 메시지도 공유하고 싶었고요.”


-제목을 왜 ‘메리지 레드’라고 지었나요.


“제가 만든 말인데요. 어느 날 재판에 가다가 신호등을 보고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결혼생활에 빨간불이 켜지면 계속 달려선 안 됐는데 그렇지 못해 이혼에 이르는 거구나. 어느 순간엔 서로 멈췄어야 했는데 선을 넘은 거구나.’ 그래서 언젠가 책을 쓰면 결혼생활의 빨간불이란 의미로 ‘메리지 레드’라고 하려고 마음 먹었죠. 써야지 생각만 하다가는 결국 못 쓸 것 같아서 책을 염두에 두지 않고 당장 할 수 있는 방식을 택한 거예요.”


결심을 하고 바로 실행에 옮겼다. 자신이 쓴 스토리에 그림을 그려 줄 작가를 구했다. 10컷 분량의 대화를 전달하면 작가는 그림을 입혀 다시 보내오는 방식이다.


-언제 스토리를 쓰나요?


“짬짬이 써요. 법원에 좀 일찍 도착해서 시간이 남을 때나, 지방 출장을 가는 기차 안에서, 또 아이가 잠든 밤에요. 10분, 20분씩 시간이 날 때 휴대폰에 적어두죠. 원고도 카톡(카카오톡)으로 써서 그림 작가님한테 보내요. 완벽하게 쓰려고 하지도 않죠. 제가 할 수 있는 선에서 재미있게 쓰려고 해요. 내가 가진 경험이 좀 특별하니 그걸 나누는 데 목표를 둔 거죠.”


-‘메리지 레드’가 자신에게는 어떤 의미인가요.


“감정이나 생각을 표현하는 시간이라서 제게도 힐링이 되더라고요. 저도 나름 멘털이 강하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래서 안 망가질 줄 알았는데 나도 몸과 마음이 망가지는 걸 느끼고 내게도 뭔가 필요하다는 걸 깨달았어요. 제가 힘들어 봤으니 쏟아내듯 쓴 거죠. 그런 경험이 없었다면, 아마 책을 쓰기까지 더 오랜 시간이 걸렸을 거예요.”


-처음부터 인기가 좋았는데 비결이 뭐라고 생각하나요.


“예상하지 못한 반응이에요. 많아야 몇백 명 정도 보지 않을까 싶었거든요. 팔로어가 1,000명이 됐을 때 놀라서 감사 인사를 올렸었는데 그때부터 자고 일어나면 400명, 그러더니 700명, 나중에는 1,000명씩 팔로어가 늘었어요. 그만큼 책임감도 커졌죠. DM(인스타그램 다이렉트 메시지)으로 오는 피드백을 보면 ‘내 얘기 같아서 좋다’는 반응이 많아요. 사실 어느 가족이나 이혼한 사람이 한 명씩은 있잖아요. ‘부모님이 싸우는 걸 이해하지 못했는데 이제는 알 것 같다’는 청소년도 있고요. 우리 모두의 이야기였는데 금기시했던 걸 쓰니까 많이 공감하시지 않나 싶어요.”


-인스타툰에 사례가 많이 나오죠.


“네, 그렇지만 단 한 건도 그대로 쓴 건 없어요. 다른 사건들을 섞거나, 성별 같은 사실 관계를 바꾸는 식으로 각색을 해요. 실화이면서 실화가 아니죠. 사연을 알리는 게 목적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힐링이 되는 메시지를 전하는 게 목적이니까요.”


-인스타툰을 하면서 사건을 다시 생각해 보기도 할 것 같아요.


“맞아요. 과거에 맡은 사건인데도 의미를 자꾸 되짚어보게 돼요. 그 과정이 참 좋아요. 유사한 사건을 맡게 됐을 때 그 의미를 반영해서 해결할 수도 있고요.”

결혼으로 나의 반쪽을 만난다고?

한국일보

그는 “이혼도 결국은 행복한 삶을 위한 수업료이며 그렇게 만드는 건 자기 자신”이라고 말했다. 배우한 기자

-결혼이란 뭘까요.


“자아성찰의 과정인 것 같아요. 상대방이라는 거울을 통해서 끊임없이 나를 알게 되는 시간이죠. 나의 밑바닥, 단점과 강점, 모르고 사는 게 더 좋았을 면까지도요.”


-혼인관계도 결국은 그 자아성찰의 균형이 깨지면 파탄에 이르게 되는 거겠네요. 내 단점만 알게 하는 배우자라면 견디지 못할 테니까.


“맞아요. 물론 내 인내심의 한계를 테스트하는 시기가 있긴 해요. 그런데 상대방의 인성이나 성향 때문에 결혼생활 전체가 그럴 것이며, 앞으로도 고통에서 벗어날 수 없으리라는 판단이 들면 이혼을 하게 되는 거죠.”


-‘메리지 레드’를 시작하면서 ‘둘이 되어 사는 결혼 그리고 다시 하나가 되는 이혼’이라는 표현을 썼는데, 이유가 있나요. 흔히 ‘둘이 하나가 되는 결혼’이라고들 하잖아요.


“두 가지 의미가 있어요. 이혼이 실패가 아닌 경험일 뿐이라는 뜻을 전달하려고 했어요. 이혼으로 다시 하나가 됐을 때 나에 대해 훨씬 더 많이 알게 되고 더 단단해졌다면 성장의 계기가 되는 거니까요. 결혼도, 이혼도, 비혼도 동등한 가치의 선택이라는 의미를 부여하고 싶었죠. 또 ‘나의 반쪽을 찾는 게 결혼, 그러니 결혼은 하나가 되는 일’이라는 말에 동의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해요. 사람은 그 자체로 완전한 존재잖아요. 그 두 존재가 만나서 룰을 만들어 가며 사는 게 결혼이죠. 과도한 의미를 두면 기대와 함께 실망도 커질 뿐이에요.”


-많은 이별을 지켜봐 왔는데, 어떤 게 아름다운 이별일까요.


“상처 받지 않는 이별은 없어요. 굳이 아름다운 이별을 말한다면, 그 경험을 통해서 나를 되돌아볼 수 있는 이별 아닐까요. 증오로 끝나는 게 아니라 나의 장점도, 단점도 인정하는 계기가 된다면, 살아가는 데 큰 힘이 된다는 걸 의뢰인들을 보면서 깨달았어요. 이혼도 결국 행복한 삶으로 가기 위해 치르는 값비싼 수업료예요.”


-이혼전문 변호사는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나요.


“사건만이 아닌 삶을 다루는 일 같아요. 이혼 상담은 결국 어떻게 살아 왔는지를 얘기하는 시간이거든요. 이 일을 하면 할수록 인간에 대해 더 깊이 이해하고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지금까지 살면서 지키려고 해온 삶의 도가 있다면 뭔가요.


“용서할 수 있어야 한다는 거예요. 사람은 생각보다 여린 존재예요. 그리고 누구나 비슷하죠. 각자 처지가 다를 뿐이에요. ‘나는 저 사람보다 나을 거야’라고 생각했어도 같은 상황에 처하면 똑같이 무너질 수 있어요. 그래서 상대방을 용서하는 마음을 가지려고 노력해요.”


-그간 저는 나 자신만 많이 용서하며 살아 온 것 같은데.


“하하. 대부분 그렇겠죠. ‘저 인간이 쓰레기라서 이혼하려고 한다’는 말이 팩트일 수도 있지만, 그 생각에 갇히면 마음이 정말 힘들고 원망으로 가득하게 되거든요. 시간을 아무리 되돌리고 싶어도 불가능하고요. 나 자신을 위해서라도 팩트를 떠나 그때의 나도, 상대방도 용서하는 노력이 필요해요. 그래야 이혼도 경험으로 승화시킬 수 있죠.”


그가 말한 삶의 도는 의외였다. 변호사가 아니라 종교인의 입에서 나올 법한 얘기라서다. 아마 나 역시 이혼전문 변호사를 ‘싸움전문 변호사’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그는 지금까지 한 이혼 상담의 수를 정확히 꼽긴 어렵지만, 수천 건은 족히 될 것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수천의 인생에 들어갔다 나온 셈이라 해도 과언은 아닐 테다. 자신도, 상대도 결국은 용서해야 벗어날 수 있으며 행복도 그로부터 다시 시작된다는 결코 가볍지 않은 진리를, 그렇기에 그는 일찌감치 깨달은 것 아닐까.


김지은 인스플로러랩장 luna@hankookilbo.com

2020.12.15원문링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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