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만 배우가 됐어도... 오정세는 오복슈퍼에서 일한다

[연예]by 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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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오정세의 영화 속 다양한 모습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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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극한직업'에서 마약중개상 테드 창을 연기한 오정세. 지질하고 허세 가득한 인물을 소화해 냈다. CJ엔터테인먼트 제공

지난 1월 개봉한 ‘나는 나를 해고하지 않는다’를 보며 발견의 기쁨을 느꼈다. 하청업체 비정규직 노동자의 고단한 삶을 파고드는 뚝심 있는 연출이 좋았다. 특히 배우 오정세의 변모가 눈길을 잡았다. 그는 송전탑 유지관리와 보수를 업으로 하는 막내라는 인물을 연기했다. 막내는 박봉으로는 세 딸을 키울 수 없어 퇴근 후 편의점에서 일하고 대리운전까지 뛴다. 세파에 맞서는 그의 얼굴은 주로 무표정이다. 말수는 적고 웃음기를 찾긴 어렵다. 여러 영화와 드라마에서 안면근육을 최대한 활용해 웃음을 전하곤 하던 수다쟁이 오정세의 모습은 오간 데 없다.


돌이켜보면 오정세 연기의 8할은 코미디다. 그가 빚어내는 웃음의 8할은 지질함과 허세에서 비롯된다. 1,626만명이 본 영화 ‘극한직업’(2019)의 테드 창은 그런 그의 이미지를 효율적으로 활용한 예다. 마약중개상인 테드 창의 원래 이름은 창식이다. 미국 유명 SF소설가 테드 창의 명성을 어디선가 듣고 지은 영어이름이리라. 하지만 창이 성이 아니니 엉터리 작명이다. 이런 지질한 허세를 옛 동업자 이무배(신하균)에게 들켜 당황하는 연기만으로 오정세는 ‘극한직업’에서 자기 몫을 다한다.


최고 시청률 23.8%를 기록한 KBS드라마 ‘동백 꽃 필 무렵’의 노규태 역시 같은 맥락의 인물이다. 노규태는 ‘사’자 직업(안경사)인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들먹이며 지역 유지 노릇을 한다. 변호사인 연상 아내 홍자영(염혜란) 앞에선 말을 더듬고 눈을 내리깔지만 말이다. 밉상인데 비굴함이 만들어내는 웃음 때문에 미워할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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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나를 해고하지 않는다'의 막내를 연기한 오정세. 무뚝뚝하지만 속정 깊은 인물을 맡았다. 영화사 진진 제공

코미디에 일가견이 있다고 하나 웃음에 속박되진 않는다. 악역 역시 맞춤옷처럼 어울린다. ‘타짜-신의 손’(2014)의 서 실장과 ‘조작된 도시’(2017)의 민천상이 대표적이다. 서 실장은 도박 사기로 지인 뒤통수를 치는 야비한 인물인데, 오정세의 날카로운 코맹맹이 목소리가 비열함을 더한다. 민천상은 오정세의 어리숙한 면모를 활용한 경우다. 민천상은 겉보기에는 의뢰인의 눈조차 잘 맞추지 못하는 내성적인 변호사이지만 밀실에서 거대한 음모를 꾸미는 인물이다.


오정세는 무명으로 오랜 시간을 견뎠다. 1997년 영화 ‘아버지’에서 행인2 역할로 연기에 발을 내디딘 후 10년가량 스포트라이트에서 비켜나 있었다. 연극 무대에서 연기를 다지고 여러 단역과 조연을 거쳐 ‘라듸오 데이즈’(2008)로 주연을 꿰찼다. 몇 년 전 TV 예능프로그램을 통해 알려졌듯이 그는 부모님이 경기 성남시에서 운영하시는 ‘오복슈퍼’ 일을 틈틈이 도우며 영화와 드라마 출연 기회를 엿봤다. ‘극한직업’과 ‘동백꽃 필 무렵’으로 웬만한 국민이면 얼굴을 알아볼 스타가 된 요즘은 어떨까. 그는 여전히 오복슈퍼 계산대에 종종 선다고 한다. ‘나는 나를 해고하지 않는다’에서 예사롭지 않은 솜씨로 편의점 바코드기계를 활용해 계산을 척척 해내는 모습이 연기가 아니라 생활이었던 셈이다.


무명의 설움을 곱씹다 스타덤에 오른 배우들은 많다. 성공하기 이전과 이후가 판연히 달라지는 배우 역시 많다. 어느 배우는 교통이 불편한 촬영장에서 영화사 직원이 차에 동승한 것만으로 매니저를 심하게 질책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감히 함부로 자기 차를 탔다는 이유에서다. ‘나는 나를 해고하지 않는다’의 이태겸 감독은 오정세와 관련해 이런 사연을 전했다. “촬영 중간 무렵 배우들끼리 사이가 좋아져서 나만 빼고 회식을 했나 생각을 했어요. 알고 보니 오정세 배우가 소속사가 없어 대중교통으로 다니던 조연 배우들을 스케줄이 맞으면 다들 자기 차에 태워 촬영장에 왔더라고요.” 이 감독은 “(감독으로서) 이런 배우는 든든하다. 배울 점이 많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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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조작된 도시'에서 오정세가 연기한 민천상. 그늘을 지닌 악역이다. CJ엔터테인먼트 제공

오정세는 ‘동백꽃 필 무렵’으로 지난해 백상예술대상 TV부문 남자조연상을 받으며 “세상이 참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꿋꿋이 열심히 일을 하는 많은 사람들이 똑같은 결과가 주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서”라는 것이었다. 그는 “자책하지 마십시오, 여러분 탓이 아닙니다”라며 자신처럼 묵묵히 일하다 보면 “동백꽃 필 무렵을 만나게 될 것”이라고도 말했다. 자신의 오랜 무명시절을 돌아보며 힘들게 살아가는 보통사람들에게 용기를 주려 했던 수상 소감이다. 오지랖 넓게 여러 역할을 척척 해내는 그의 연기의 원천은 소시민을 향한 이런 따스한 시선이 아닐까.


라제기 영화전문기자 wenders@hankookilbo.com

2021.03.03원문링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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