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불구불 끝없는 끝...그림바위마을이 숨긴 비경

[여행]by 한국일보

<114> 정선 화암면 화암팔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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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이 높으면 골이 깊다. 물길도, 찻길도 그 깊은 골짜기를 바로 넘지 못한다. 끊어질 듯 이어지는 구불구불한 도로를 따라 그림 같은 풍경이 숨어 있다. 정선 화암면 이야기다. 면소재지로 들어서는 도로 어귀에 ‘그림바위마을’ 조형물이 있다. ‘화암(畵巖)’을 한글로 풀어 쓴 이름이다. 가로등보다 높은 조형물에는 짙어가는 녹음을 배경으로 두 남성이 한가로이 쉬고 있다. 한 사람은 팔베개를 한 채 먼 산을 바라보고 있고, 또 한 사람은 시선을 아래로 떨구고 이따금씩 오가는 차량을 무심히 응시하고 있다. 고된 노동을 끝내고 온 몸에 힘을 뺀 채 편안히 쉬는 모양새다. 산중 마을의 여유로움이 부럽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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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보다 풍성한 비경, 화암팔경

화암면은 정선군에서 인구가 가장 적지만 골짜기마다 비경을 품고 있다. ‘그림바위마을’이라는 해석이 결코 과장이 아니다. 화암약수와 화암동굴을 비롯해 거북바위·용마소·화표주·소금강·몰운대·광대곡을 묶어 화암팔경이라 자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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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로 들어서면 화암팔경을 주제로 한 벽화와 조형물이 골목과 담장을 장식하고 있다. 2013년 ‘반월에 비친 그림바위마을’ 공공미술 프로젝트로 설치한 작품이다. 주제는 크게 ‘심원ㆍ고원ㆍ평원의 시선’이다. 해발 460m 고원을 1,000m급 고산이 둘러싼 지형적 특성을 반영하고 있다. ‘반월’은 마을 앞으로 흐르는 하천이 반달 모양으로 휘감아 돌기 때문에 붙은 수식이다. 화암면을 적신 어천은 정선 읍내에서 조양강에 합류된다. 공공미술 프로젝트를 주도한 것은 ‘그림마을예술발전소’다. 옛 변전소를 개조한 작은 미술관으로 현재 백자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마을 앞 어천 변에 화암팔경의 하나인 용마소가 있다. 아담한 퇴적층 절벽 아래에 넓은 반석이 형성돼 있고, 그 위로 맑은 물이 흐른다. 주변은 작은 공원으로 꾸몄다. 주민들에겐 평범한 쉼터지만, 여행객에겐 더 없이 좋은 피서지다. 용마소 상류, 울창한 나무 사이에서 독특하게 생긴 바위 하나가 마을을 내려다보고 있다. 역시 화암팔경의 하나인 거북바위다. 액운을 물리치고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수호신 같은 존재다. 험준한 주변 산세에 비하면 한없이 소박하지만, 늘 가까이서 주민들에게 마음의 평온을 안겨주는 존재로 화암팔경에 선정된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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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암약수는 화암팔경의 첫 번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마을 맞은편 산자락의 작은 계곡에 바위를 뚫고 샘솟는 탄산수로, 사이다처럼 톡 쏘는 맛이다. 맑은 물이 졸졸 흐르는 계곡 바로 옆에 붙은 약수터 주변은 철분이 산화해 붉은 반점이 찍혀 있다. 칼륨 불소 외에 9가지 미네랄을 함유하고 있어 위장병, 눈병, 피부병 등에 좋다고 자랑한다. 약수가 솟는 계곡의 3개 지점은 산책로로 연결돼 있다. 호젓하게 숲길을 걷는 여유를 누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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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인근 화암동굴은 화암팔경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관광지다. 폐광과 천연 석회동굴을 연결해 독특한 볼거리를 제공한다. 동굴 전체 길이는 1,803m다. 금을 캐던 천포광산 상부 갱도 515m와 하부 갱도 676m, 이를 연결하는 365개의 계단으로 이루어졌다. 미로 같이 연결된 금광, 수직에 가까운 철제 계단, 천연 동굴의 종유석과 광장 등이 거대한 지하 궁전을 연상케 한다. 동굴 체험장이자 광산촌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교육장으로 어린이를 동반한 가족 여행객이 많이 찾는다. 늘 선선한 기온을 유지하고 있어 여름 피서지로도 제격이다. 관람 동선은 모노레일로 상부 갱도까지 가서 동굴을 통과해 되돌아오게 설계돼 있다. 성인 기준 동굴 입장료는 5,000원, 모노레일 탑승료는 3,000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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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수화 풍경 소금강, 그 끝자락에 숨겨진 폭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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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암팔경의 진짜 절경은 소금강에서 광대곡으로 이어지는 계곡에 흩어져 있다. 황동규 시인은 ‘다시 몰운대에서’라는 시에서 정선 소금강에 대한 감상을 이렇게 적었다.


“저기 벼락 맞고 부러져 죽은 척하는 소나무 / 저기 동네 앞에서 머뭇대는 길 / 가다 말고 서성이는 바람 / 저 풀어지기 직전 마지막으로 몸 매무시하는 구름 / 늦가을 햇빛 걷어들이다 밑에 깔리기 시작하는 어스름 / 가끔씩 출몰하는 이름 모를 목청 맑은 새…(중략) 더 흔들릴 것도 없이 흔들리는 마른 풀 / 끝이랄 것도 없는 끝”


빼어난 경치야 말할 것도 없으니 미련 없이 생략하고, 그 속에 들어앉았을 때의 느낌을 속삭이듯 잔잔하게 읊었다. 아무것도 아닌 나무, 구름, 새, 풀, 길 하나하나가 깊은 울림으로 다가오는 그런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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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금강은 그림바위마을에서 몰운대까지 이어지는 약 4㎞ 협곡이다. 들머리 왼쪽 산자락에 기둥 2개를 겹쳐 놓은 것처럼 보이는 절벽이 있는데 화암팔경의 제5경 화표주다. 화표주는 무덤 양쪽에 세우는 석조물이다. 아슬아슬하게 층층이 쌓인 퇴적암 꼭대기에 소나무 한 그루가 뿌리를 내리고 있어 더욱 신비롭게 보인다. 겸재 정선의 ‘화표주도(華表柱圖)’가 이 모습을 그린 게 아닐까 해석하기도 한다.


계곡과 나란히 이어진 도로를 따라가면 산은 점점 높아지고, 한 굽이 돌 때마다 계곡 양쪽으로 수직에 가까운 바위 절벽이 나타난다. 검붉은 퇴적암층이 더러는 거대한 장벽 같고, 더러는 곧장 허물어질 듯 아슬아슬하다. 지나다니는 차량이 많지 않아 눈앞에 펼쳐지는 비경이 모든 소음을 삼킨 듯 고요하다. 어느 한 곳 그냥 지나치기 아까운데, 그중에서도 경치가 빼어난 2곳에 차를 대고 감상할 쉼터를 만들어 놓았다.


소금강 상류 몰운대 역시 깎아 세운 듯한 암벽이다. 그 아름다움에 반해 구름도 쉬어가는 곳이라는 의미다. 천상의 선인이 학을 타고 내려와 시흥(詩興)을 즐겼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몰운대는 아래서 올려다보는 게 아니라 꼭대기에서 주변 풍광을 내려다보며 감상하는 구조다. 도로 옆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숲길을 조금만 걸으면 수십 명은 족히 앉은 수 있는 암반이 나타난다. 바로 몰운대 정상이다. 소나무 몇 그루가 뿌리를 내린 바위 끝에는 생명을 다한 노송 한 그루가 마을을 굽어보고 있다. 황동규 시인이 ‘죽은 척하는 소나무’라 표현한 바로 그 나무다. 은빛을 띠는 뒤틀진 가지가 희한하게도 썩지 않고 화석처럼 굳어 몰운대의 상징이 됐다. 죽어도 살아 있는 나무다. 주변이 구름에 덮이면 이름처럼 신비스러운 풍광을 연출하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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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운대에서 조금만 가면 화암팔경의 마지막 광대곡이다. 광대산(1,019m) 서편 자락을 흐르는 약 4㎞ 계곡으로 소도굴, 촛대바위, 층대바위, 영천폭포, 골뱅이소, 바가지소 등 12개의 동굴과 폭포와 소가 이어진다. 심마니들이 신성하게 여기는 곳으로 오랫동안 외지인의 출입을 금했던 계곡이다.


등산로는 입구(광대사)에서 1.7㎞ 떨어진 영천폭포까지만 개설돼 있다. 초입에 멀쩡하게 숲길 안내판이 세워져 있어서 탐방로도 그렇겠거니 여겼다가는 낭패를 겪을 수 있다. 미리 말하자면 길은 있다가도 끊어지고, 없다가도 연결된다. 인적이 뜸한 탐방로는 수풀에 가려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두 사람이 나란히 걷기 힘든 오솔길이다. 험한 바위투성이 계곡을 여러 차례 가로질러야 한다. 비가 내리는 날은 욕심을 부리지 말아야 한다. 주민들은 통상 20분이 걸린다고 말하는데 실제는 30분이상 잡아야 한다. 경사가 가파르지 않은 게 그나마 위안이다.


탐방로로 접어들어 조금만 걸으면 길은 바로 계곡으로 내려간다. 계속 갈 수 있을까 미심쩍을 때 좌우로 유심히 살펴보면 다시 길이 보인다. 초반 풍경은 안내판이 과장된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평범하다. 약 700m를 올라가면 갑자기 계곡이 깊어지고 어두컴컴해진다. 새소리, 바람소리에 섞여 희미하게 들리는 물소리를 따라가면 초록을 가득 머금은 널찍한 소(沼)가 나타난다. 잔잔한 수면을 따라 시선을 이동하면 바위 사이로 하얗게 떨어지는 낮은 물줄기가 보인다. 선녀폭포다. 바위에 걸터앉아 발을 담갔더니 물이 얼음장처럼 차다. 아무리 버텨도 1분을 넘기기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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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부터 본격적으로 폭포와 소가 이어진다. 떨어지는 물줄기가 바위를 나선형으로 깎으며 돌아 흐르는 골뱅이폭포, 커다란 표주박 모양의 물웅덩이가 에메랄드빛 계곡물을 가득 담고 있는 바가지소가 바로 위에 나타난다. 골뱅이폭포 아래에는 널찍한 암반이 형성돼 있다. 계곡에서 유일하게 편안한 자세로 쉴 수 있는 장소다.


바가지소에서 조금 더 올라가면 최종 목적지인 영천폭포다. 탐방로에서 물소리를 따라 천천히 계곡으로 내려가면 뜻밖의 풍경에 짧은 감탄사를 내뱉는다. 평범한 산길에 이런 폭포가 숨겨져 있으리라고 상상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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깎아지른 절벽에서 떨어지는 물줄기가 깊이를 가늠하기 힘든 검푸른 소를 만들었다. 길쭉하고 커다란 옹기 항아리에 양동이로 물을 쏟아 붓는 모양새다. 계곡물이 많지 않아 물줄기가 웅장하지 않음에도 은은하게 물안개가 번지는 듯한 착각을 일으킨다. 절벽에 자라는 우산나물과 돌단풍은 물기를 가득 머금고 있다. 나뭇가지는 하늘을 덮어 햇볕이 거의 들지 않는다.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은 곳, 태고의 신비로움을 고이 간직한 모습이다.


정선=글∙사진 최흥수 기자 choissoo@hankookilbo.com

2021.06.24원문링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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