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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컬처 ] 별세한 ‘둥지의 철학자’ 박이문 학문세계를 기리며

끊임없이 사유하고 절대진리 꿈꿨던 코스모폴리탄

by한국일보

끊임없이 사유하고 절대진리 꿈꿨던 코

‘둥지의 철학자’ 박이문 선생이 26일 숙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향년 87세. 1930년에 태어나 일제시대와 6.25전쟁을 경험한 세대에 속하는 선생은 삶의 고통과 무의미 속에서 자신의 짧지 않은 삶을 하나의 작품으로 만들었다.

 

그의 삶은 지적 투명성, 감성적 열정, 도덕적 진실성을 추구한 여정이었다. 세상을 투명하게 인식하고, 뜨거운 마음을 잃지 않으며, 남과 더불어 착한 삶을 살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그의 삶은 지적 방랑의 연속이었다. 1950년대 말부터 실존주의와 프랑스문학에 대한 글을 써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그는 1960년대 초 안정된 대학교수의 자리를 박차고 서른이 넘은 나이에 프랑스 유학을 감행했다. 그가 쓴 박사학위 논문은 프랑스어로 출간되었으며 그는 프랑스 철학계의 주요 학술지에 논문을 발표하기도 했다.

끊임없이 사유하고 절대진리 꿈꿨던 코

우리가 ‘세계화’ 말하기 전부터

동서양ㆍ국경 넘어 보편성 추구

분과학문 경계 넘어

인문학 통합 지향한 세계주의자

 

그러나 그는 프랑스 문학 전공자에 만족할 수 없었다. 귀국을 미루고 미국으로 가서 다시 철학을 공부했다. 미국에서 대학교수 생활을 하면서 철학논문만이 아니라 틈틈이 영어로 시를 썼다. 프랑스와 미국에서 30년을 보낸 그는 만년에 귀국하였다. 그 후 본격적인 저술작업에 착수하여 100여권의 저서를 남겼다. 그가 쓴 ‘시와 과학’, ‘예술철학’, ‘노장사상’ 등은 인문학에 목말랐던 인문학도와 사회과학도들에게 널리 읽혔으며, ‘문명의 위기와 문화의 전환’, ‘과학의 도전, 철학의 응전’은 자연과학도들에게도 사유의 계기를 마련했다.

 

고인은 언어와 국경을 넘어서 보편성을 추구했고 분과학문의 경계를 넘어 통합의 인문학을 지향했다. 그는 한국어, 일본어, 한문, 프랑스어, 영어, 독일어를 구사하면서 문학, 철학, 예술, 종교, 사회과학, 자연과학의 세계를 자유롭게 오가며 자신만의 학문세계를 구축했다. 그는 우리가 세계화를 말하기 이전에 이미 세계화된 학자였다. 동아시아 학자로서 서양의 문학과 철학을 연구했지만, 불교, 노장사상, 유학사상 등 아시아 철학의 세계를 탐구하여 서구 철학의 한계를 넘어서려고 했다.

 

고인은 평생 권력이나 돈을 탐해본 적이 없다. 오로지 학문을 통해 세상을 이해하고 글을 써서 세상에 개입하는 삶을 살았다. 그는 철학자, 문학이론가, 시인, 수필가, 칼럼니스트였다. 교수는 생계를 위한 직업이었고 끊임없이 사유하고 글을 쓰는 일이 그의 본업이었다. 그는 자신의 생각을 따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타인을 항상 동등한 입장에서 대했다. 제자나 학생들에게도 질문을 던지고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학문적 권위, 나이, 직위를 내세워 어느 누구도 지배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는 모든 사람을 자신의 삶을 하나의 작품으로 만들 자유와 책임을 지닌 주체로 인정했다.

 

어려운 시절 한반도에 태어난 그는 한국의 학자로서 세계적으로 인정받을 만한 학문의 세계를 이루려고 노력했다. 서양에서 공부하고 가르치면서도 서구 학문을 맹목적으로 추종하지 않았으며, 귀국하여 모어(母語)로 글을 쓰는 한국의 학자가 되었지만 편협한 민족주의에 사로잡히지 않았다. 그의 일관된 학문적 태도의 바탕에는 “무한한 지적 호기심과 진리에 대한 철저한 추구”가 자리하고 있다.

 

“우리 학자들은(…)

학문보다 정치와 사회적 출세,

연구비에 더 관심이 크다.(…)

세계사 장식할 학설 세워야”

한국의 학계에 아쉬움 드러내

 

그러나 오늘의 한국학계는 어떤 상태인가. 고인은 말년에 한국의 학계를 이렇게 진단했다. “우리 학자들은 아직도 우리가 자처하고 있는 만큼 학문을 존중하지도 않고, 우리 국민은 우리가 자부하고 있는 만큼 학문열에 불타고 있지도 않다. 학문보다 정치와 사회적 출세, 연구비에 더 관심이 크다. 저서보다도 연구소가 많고 학문적 탐구보다도 행사와 학회가 많으며, 학회가 학술적 탐구의 장이 되기보다는 사교장이 되기 쉽다.” 그는 다음 세대 학자들에게 “세계사를 장식할 만한 학설을 세우고 세계의 역사를 발전시키는데 기여할 수 있는 자생적 사상”을 창조하기를 기대했다. 이제 그의 뒤를 따르는 후학의 한 사람으로서 어둡고 궁핍한 시대에 태어나 학문과 사상의 세계에 헌신한 박이문 선생의 영전에 머리 숙여 마음 속 깊이 조의를 표한다.

 

유족으로는 부인 유영숙 여사와 아들 장욱씨가 있다. 빈소는 서울 신촌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 13호. 발인은 29일, 장지는 국립이천호국원. (02)2227-7500.

 

정수복 사회학자·작가(박이문 평전 ‘삶을 긍정하는 허무주의’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