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리남서 물고기 잡던 선장님 "육해공 군인들 입맛 잡았죠"

[푸드]by 한국일보

[방방곡곡 노포기행] (92) 충남 계룡 어선횟집

광석 운반 제안, 알고 보니 4,000만명분 코카인

한국 대사관 신고 후 귀국했지만 정부는 외면

마약조직원 보복 위험에 숨어살다 '09년 개업

"한번 먹으면 또... 마약 같은 회맛" 단골 줄잇고

곁들이 음식이 메인요리 위협...'하극상' 엄치척

전임자가 후임자에게 인수인계하는 계룡맛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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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리남에서 자신의 선박에 실린 엄청난 양의 마약을 신고한 뒤 한국으로 돌아와 충남 계룡에 횟집 사장으로 정착한 남성희씨가 자신의 인생역정을 다룬 본보 기사 스크랩 앞에서 포즈를 취했다. 개업한 지 15년차로 '노포' 축에는 들지 않지만, 계룡을 떠나는 군인들이 후임자에게 추천할 정도로 명성이 자자하다.

인구 4만 남짓한 충남 계룡은 요식업자들의 무덤으로 불린다. 불황을 모르는 군사도시 계룡에서 무슨 말인가 싶지만, 설명을 들으면 고개가 끄덕여진다. 계룡은 육·해·공 3군 통합 군사기지인 계룡대 근무 군인들 덕분에 돌아간다.


군인들이 전국 각지를 돌며 근무하는 탓에 입맛이 까다롭다. 전국 대표 음식과 맛집을 훤히 꿰고 있는 미식가들도 제법 있다. 웬만한 내공의 주방장이 아니고선 이곳에서 버티기가 쉽지 않다는 얘기다. 실제로 계룡에선 '입은 청와대, 주머니는 서민'이란 말이 나올 정도로 깐깐한 손님들이 많다. 계룡에서 허름한 간판을 달고도 계속 문을 여는 점포가 있다면 그 안에는 범상치 않은 실력자가 숨어 있을 가능성이 높다. 계룡대에서 남쪽으로 1.5㎞가량 떨어진 엄사리의 어선횟집이 그런 곳이다.

수리남에서 온 주방장

빛바랜 어선횟집 간판 아래 출입문으로 들어서면 벽에 걸린 큰 액자가 손님들을 맞이한다. 액자에는 계룡에서 가장 회를 잘 뜬다는 남성희(65)씨가 '깔깔이'(군 방한내피)를 입고 회를 접시에 채우는 사진이 들어 있다. 사진과 함께 실린 글에는 영화보다 더 극적인 그의 인생이 찍혀 있다.


남씨는 남아메리카 수리남 원양어선 선장 출신이다. 그는 남미의 오지에서 물고기와 새우를 건져 올리던 일을 10년 가까이 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남씨는 “정글에서 생산되는 광석을 아프리카 세네갈로 옮겨주면 수고료를 주겠다”는 제안을 받았다. 그러나 배에는 엉뚱하게도 4,000만 명이 흡입할 수 있는 코카인이 올라왔다. 목숨 걸고 선박에서 마약 조직원을 제압한 뒤 한국대사관에 신고했지만, 외교부와 국가정보원에선 수고했다는 말만 전할 뿐 그를 철저히 외면했다. 마약 조직의 보복 위험 탓에 고향 같았던 수리남을 떠나 한국으로 돌아온 남씨는 한동안 가명을 사용하며 유령처럼 살았다. 단돈 1,000원이 없던 남씨는 숙소가 딸린 쓰레기 수거업체와 조선소 하청업체 등을 전전하며, 국가가 자신의 공로를 인정해주길 바랐다. 하지만 그것은 과분한 기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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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희씨가 오전에 잡아 숙성시킨 회를 정성스럽게 썰어내고 있다. 20년 이상 배를 타면서 회를 즐겼던 그는 같은 회라도 맛과 식감이 모두 다르다고 한다.

그는 살아야 했기에 죽기살기로 돈을 모아 2009년 지금의 어선횟집을 열었다. 남씨는 “20년 이상 배를 타면서 생선 요리 하나만큼은 정말 자신 있어 횟집을 차렸다”며 “주변에 문 닫는 가게가 수두룩한데, 지금까지 장사하고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때도 있다”고 웃어 보였다. 넷플릭스 드라마 ‘수리남’ 덕분에 최근엔 더 많은 이들이 남씨의 사연을 접하고 이 횟집을 찾는다. 영웅으로 대접해주지는 못할망정 국가가 남씨를 버렸다고 분개하며, 자신들이 받은 훈장과 국민포장을 들고 찾아오는 손님들도 있다.

’마약 횟집’ 전임이 후임에게 인수인계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사연의 주인공이 횟집 주인이라고 해도, 테이블에 오르는 음식의 맛과 질이 뒷받침되지 않았다면 지금까지 살아남지 못했을 터. “내 입맛을 충족시키지 못하는 음식이 다른 사람에게 맛있을 리 있겠어요?” 망망대해 열대 선상에서 20년 이상 회를 즐기면서, 또 직접 음식을 하면서 체득한 요리 실력에 손님들은 뜨겁게 호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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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계룡의 어선횟집 사장 남성희씨가 자신이 뜬 회를 보여주고 있다.

어선횟집 개업 초기부터 출입하고 있다는 최경호(65)씨는 “맛이 좋기로 유명하다는 식당에서 회를 먹을 때면 꼭 어선횟집과 비교하게 된다. 한번 먹고 나면 또 찾을 수밖에 없는 마약 같은 횟집”이라고 했다. 최씨만의 생각은 아니었다. 그가 데리고왔던 친구와 동료들도 나중에 알고 보면 이곳 단골이 돼 있었다. “코로나19 때도 한 달에 한두 번은 포장해서 먹었을 정도라니까요.”


계룡의 식당들은 군 훈련기간이나 인사철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유명 프랜차이즈 또는 입지가 좋은 곳은 뜨내기손님이 자주 찾기에 그럭저럭 장사가 되지만, 단골손님 매출 비중이 큰 지역 식당들은 계룡대 상황에 따라 휘청거릴 때가 있다.


하지만 어선횟집은 예외다. 식당에서 만난 한 공군 장교는 “인사 이동으로 떠나는 전임자들의 인수인계 목록에 이 식당은 꼭 적혀 있다”며 “영외 출입이 어려울 땐 이렇게 포장해서 가져가 먹는다”고 귀띔했다. 이곳은 주인이 대물림된 노포(老鋪)는 아니지만, 단골이 후임에게 빠뜨리지 않고 물려주는 점포였다.

고공 인기 비결은 ‘충실한 기본’

손님들이 어선횟집에 열광하는 이유는 많지만, 맛이 첫손에 꼽힌다. 기본에 충실하다는 이야기다. 일반인들은 횟감으로 올라온 생선을 구분하는 것도 쉽지 않지만, 같은 생선이라도 맛과 식감이 모두 다르다는 게 남씨 얘기다. “어획된 뒤 받은 스트레스, 수조 온도, 그리고 환경에 따라 생선 맛은 천양지차예요.” 최상의 ‘맛 포인트’에 대해 알고 있으니, 어선횟집에서 내놓는 회는 맛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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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선횟집 남성희 사장이 횟감으로 들어온 광어를 들어 보이고 있다.

어선횟집이 점심 장사를 하지 않는 것도 기본에 더 충실하기 위한 것이다. 단골이 요청하면 급하게 포장된 회를 준비하지만, 진짜 회는 저녁에 맛볼 수 있다. 예약받은 손님들의 규모와 도착시간을 헤아려 미리 회를 뜨고, 일정 시간 숙성시켜 상에 올린다. “점심 장사를 하면 따로 메뉴를 만들어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아무래도 회에 집중해야 할 에너지가 분산되죠.”


남씨는 생선 물기를 제거하는 일에도 공을 들인다. 여느 횟집과는 다른 맛을 내는 비결이다. 물기 제거에는 특수 종이가 사용된다. 왜 공을 들이냐고 물었더니, "최상의 식감을 내기 위해서"라는 답이 돌아왔다.

후한 인심이 부른 조연의 ‘하극상’

정성스럽게 나오는 쓰키다시(곁들이로 나오는 음식)도 단골들이 꼽는 인기 비결이다. 군 손님들은 ‘하극상’이라고 부르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운다. 남씨는 “생합, 문어, 소라, 멍게, 해삼 등 다른 곳에선 따로 주문해야 할 수준으로 나간다”며 “이 때문에 여느 횟집과 달리 사이드 메뉴도 없다”고 말했다. 이쯤 되면 쓰키다시가 메인 메뉴에 달려 나오는 무료 음식이란 통념도 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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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선횟집에선 메인 메뉴(회)만 시키면 정성스레 준비된 곁들이 요리들이 나온다. 사진은 3인상 기준이다.

그렇지만 쓰키다시와 관련한 남씨만의 철학이 있다. 아무리 좋은 쓰키다시를 준비했어도 메인 메뉴보다 앞서 내놓지 않는다. “본메뉴가 나오기도 전에 쓰키다시가 상에 올라 입 안을 오염시키거나 위를 채우면 진짜 회 맛을 느낄 수가 없어요.” 그는 회를 내놓기 전에 쓰키다시를 마구 내는 곳은 회에 자신이 없는 집으로 의심해도 좋다고 했다. 실제로 2000년대 초반 직장 회식 문화에 불었던 왜풍(倭風)으로 쓰키다시 문화가 확산했지만, 회 맛을 퇴보시키는 데 일조했다는 평가도 있었다.


이곳에선 죽과 버섯구이, 계란찜 정도만 애피타이저로 나간다. 이후 메인 메뉴인 회와 함께 시금치 된장국이 나온다. 된장국 맛이 일품이라 전문점으로 분가해도 좋을 수준이다.


식사를 마친 손님들이 주방에 보내는 인사말은 다양한다. "잘 먹었다" "맛있게 먹었다" "또 오겠다" 등등. 그중 남씨는 “오래오래 장사하세요”를 최고의 인사로 꼽는다. 수리남에서 온 남성희씨. 그가 둥지를 튼 어선횟집은 ‘노포’ 타이틀을 매일 예약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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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선횟집 전경.

계룡=글·사진 정민승 기자 msj@hankookilbo.com

2022.12.31원문링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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