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현 극장장이 일흔살 국립극장에게

[컬처]by 헤럴드경제

“100년을 바라보는 앞으로의 30년도 늘 꿈꾸는 쳥년의 삶” -김철호

“초년은 고생, 중년은 개고생…피는 말년, 장수할 거예요” -김명곤

희로애락 70년 ‘K컬처 초석’ 다져

1970년대 국가 문화홍보기관役 수행

2000년 김명곤號 ‘국민친화 극장’ 선도

극장 이름 바꾸고 예술감독제 첫 도입

김철호 “동시대와 소통·예술 재창조”

전통예술기반 극장 지향…정체성 부합

헤럴드경제

올해로 70주년을 맞은 국립극장에서 현 국립극장장 김철호(왼쪽), 전 국립극장장인 배우 겸 연출가 김명곤을 만났다. 책임운영기관(2000년 1월)으로 체제 변화를 맞으며 민간 극장장 시대를 연 ‘최초’의 극장장 김명곤과, 예술가 출신 국립극장장 중 ‘최초’의 비연극인 출신 극장장 김철호의 배경엔 국립극장이 지나온 70년과 나아갈 30년이 담겨 있다. 박해묵 기자

사람의 나이로 치면 고희(古稀·70세). 국립극장이 올해로 일흔 번째 생일을 맞았다. 남산을 벗 삼아 서울 장충동에 자리 잡은 지는 47년. 지금 국립극장을 오르는 길은 새로운 시대를 맞을 준비에 한창이다. 우두커니 솟은 해오름극장은 지난 70년의 역사를 고스란히 짊어졌다.


“삶에 굴곡이 있는 것처럼 국립극장도 억압받던 시절이 있었고, 화려한 시절도 있었어요. 초년은 고생이었고, 독재정권에서 보낸 중년은 개고생이었죠. (웃음) 말년으로 가면서 피고 있어요. 앞으로 장수할 거예요.” (김명곤)


해오름극장의 리모델링 공사로 국립극장 앞길은 종종 뽀얀 모래가 내려앉는다. 극장장실은 국립무용단 연습실 옆으로 잠시 거처를 옮겼다. “이곳에서 천막 생활을 하고 있어요. 모양을 좀 낼까 했는데, 창고에 있던 걸 가져왔어요. (웃음)” (김철호) 세월의 흔적을 입은 소품들이 수납장 칸칸마다 질서정연하게 자리를 잡았다. “옛날에 있던 것들이 기억이 나네요.”(김명곤)


70주년을 맞은 국립극장에서 20년 전 국립극장장을 지낸 배우 겸 연출가 김명곤 전 극장장과 김철호 현 극장장을 만났다. 두 사람에겐 늘상 ‘최초’의 수사가 따라온다. 책임운영기관(2000년 1월)으로 체제 변화를 맞으며 민간 극장장 시대를 연 ‘최초’의 극장장(김명곤)이고, 예술가 출신 국립극장장 중 ‘최초’의 비연극인 출신 극장장(김철호)이다. 전·현 극장장의 배경엔 국립극장이 지나온 70년과 나아갈 30년이 담겨 있다.

K컬처 초석 다진 국립극장…기틀 세운 2000년대

국립극장은 존재가 곧 의미였다. 해방 5년 후인 1950년 4월 29일. 서울 태평로에 위치한 부민관(현 서울특별시의회 의사당) 자리에 국립극장이 들어섰다. 아시아 최초의 국립극장으로, 초대 극장장은 극작가 유치진이었다. 다음날 국립극장에선 유치진이 극본을 쓰고, 허석이 연출한 연극 ‘원술랑’이 역사적인 첫 무대를 가졌다. 일주일간 ‘원술랑’을 본 관객은 무려 5만명. 그러나 극장의 꿈은 개관 58일 만에 문을 닫았다. 그 해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3년 후 대구에서 극장을 되살리고, 이후 명동(1957년)을 거쳐 남산(1973년) 시대를 지내며 K컬처의 초석을 다졌다.


“힘들고 각박한 시절에 문화 국가를 이끌어가야겠다는 마음으로 국립극장이 세워졌어요. 그 당시 선생님들의 문화에 대한 자부심과 사랑이 정말 대단했어요. 우리 공연 예술을 비롯한 모든 인접 예술들이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고 평가받을 수 있는 계기죠. 그런 의미에서 국립극장의 70년이기도 하지만, 대한민국 예술의 70년이 함께 담겨 있어요.”(김철호)


국립극장 70년사에서 김명곤 전 국립극장장이 부임한 2000년은 국립극장의 기틀을 다진 때다. ‘진보 예술인’이 국립극장의 수장이 되며 책임운영기관으로 출범, 완전히 새 옷으로 갈아입었다. 폐쇄적이고 권위적인 ‘관료’ 조직을 민간 전문가가 맡아 극장의 기반을 다졌다.


“그때 내걸었던 캐치프레이즈가 ‘국민 속의 국립극장’, ‘세계 속의 국립극장’, ‘남산 속의 국립극장’이었어요. 특히 국립극장이라고 하면 국민과 괴리된, 멀게 느껴지는 공연장이었는데, 시민친화적 공연장을 만들어보자는 목표가 있었죠.”


대대적인 변화가 따라왔다. “가장 먼저 시도한 것은 극장 이름을 바꾸는 거였어요. 반대가 어마어마했어요.” 50년간 대극장, 소극장으로 불리던 극장 명칭은 공모와 투표를 통해 지금의 해오름, 달오름 극장으로 바꿨다. 예술단체의 단장을 예술감독으로 바꾼 것도, 아날로그식 극장 경영 방식을 디지털로 바꾼 것도 김명곤 극장장 시절의 일이다. “그땐 컴퓨터를 할 줄 아는 극장장이 왔다는게 화제였어요.(웃음) 전직원을 상대로 1인 1컴퓨터 교육을 했고, 전자결재로 바꿨죠.”


7개의 예술단체 중 국립오페라단, 국립발레단, 국립합창단을 재단법인으로 독립한 것도 김명곤 극장장이 취임 두 달 차에 진행한 일이다. “한 장르를 집중적으로 키워야 완성도가 높아진다고 판단했죠. 발레나 오페라 합창은 해오름극장에서 하기엔 시설이 너무 열악했어요. 더 좋은 무대로 가야 발전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예술의전당으로 시집보내는데 울고 불고 난리가 났었죠.(웃음)”


국립극장은 책임경영 시대를 맞으며 의미있는 성과를 써냈다. 김 전 극장장은 취임 일 년 만에 극장의 재정자립도를 두 배나 끌어올렸다. “김명곤 극장장께서 국민친화적 극장으로의 변화에 선도적인 역할을 했어요.” (김철호) 김 전 극장장의 경영 성적표는 해마다 A. 3년 임기를 마치고, 자동 연임까지 되니, 성과급제였던 연봉은 대통령, 국무총리에 이어 세번째로 많았다. “당시 공무원 연봉으로 총리급으로 받아 지금도 전설처럼 내려오고 있죠.(웃음)”(김철호)

100년의 꿈…“늘 꿈 꾸는 청년의 삶…아시아 공연예술의 허브로”

책임경영 시대를 지나며 가장 큰 성과는 국립극장이 예술기관 본연의 역할과 자율성을 찾아갔다는 데에 있다.


“국립극장의 명동 시대까지만 해도 그곳은 예술가들의 꿈이 모인 공간이었어요. 그런데 남산에 덩그러니 지을 때는 아시아에서 가장 큰 국립극장을 세우겠다는, 권력자의 꿈을 위해 만들어진 극장이었어요. 예술가를 위한, 예술적 꿈을 가진 공간이 아니라 관료들이 지배하는 공연기관이 된 거죠.” (김명곤)


국립극장 안의 예술단체들이 관료들의 통제를 받으며 보낸 50년은 암흑기였다. 2000년 이전 국립극장은 ‘납골당’이라 불리며 언론의 질타를 받고, 예술계에선 소외됐다.


“1970년대 국립극장은 국가 문화 홍보 기관의 역할을 수행했어요. 한동안 국립극장에 대한 예술적 기대와 희망이 동떨어진 시절을 보냈죠. 자율적, 창조적 이상이 강물처럼 흘러야 하는데 타율성에 갇혀 폐쇄적으로 움직인 거예요. 지금은 국립극장이 시대와 소통하며 동시대의 예술을 재창조하고 있다고 보고 있어요.”(김철호)


국립극장은 ‘시대의 거울’이었다. 작품을 통해 우리 시대의 단면을 비추고, 국립극장이 나아갈 길을 모색했다. 지금은 국립창극단, 국립무용단, 국립국악관현악단과 함께 전통예술 기반의 제작극장을 지향하는 정체성을 분명히 하고 있다. 정통 국악인 출신으로 국립국악원장, 서울시국악관현악단장을 역임한 김철호 극장장의 취임은 국립극장의 정체성에 부합하는 행보다.


“국립극장은 늘 청년의 삶을 살고 있어요. 100년을 바라보는 향후 30년도 늘 꿈을 간직하고, 늘 최고의 작품은 나오지 않았다는 목마름으로 청년의 삶을 유지하기를 바라죠. 예술가로서 제가 삶 속에서 희망했던 것들은, 예술에 대한 고뇌가 아름다운 고뇌가 될 수 있는 자율적 고뇌여야 하지 억압적 고뇌여서는 안 된다는 점이에요. 예술가로서 나 자신이 공연하고 싶은 공연장, 그런 국립극장이 될 수 있도록 열린 청년의 자세로 운영하면서, 아시아 공연예술의 허브 역할을 해나갈 겁니다. 100년, 200년 후에도 시대와 호흡하고, 시대를 견인하며 늘 그 시대의 청년으로 그 자리에 있기를 희망합니다.” (김철호)


고승희 기자

2020.05.29원문링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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