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녀스토리텔러, 장미라

[컬처]by 아이러브제주
해녀스토리텔러, 장미라
해녀스토리텔러, 장미라

“그동안 많은 사진가들이 제주의 해녀를 기록했고, 현재도 진행되고 있는 걸로 알고 있는데요. 저는 주름 깊게 패인 ‘강인한 바다의 여성, 해녀’로서의 모습보다 투박하지만 따뜻한 정을 나누던 제주 여성으로서 해녀의 모습을 담아내고 싶습니다.”

해녀스토리텔러, 장미라

“해녀는 힘이 아니고 情입니다!” 해녀 스토리텔러로서 만 2년간 해녀들과 함께해온 시간을 담은 사진집을 내고 책을 펴낸 장미라(40세) 작가는 말한다. 해녀의 겉모습이 아닌 내면을 들여다보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긴 말이다. 인터뷰를 진행하며 그동안 고정되어 있던 해녀의 이미지가 바뀌는 순간을 경험한다. 갈색 양파 껍질을 벗기면 새하얀 속살이 나오듯이 틀 안에 감춰졌던 해녀의 모습을 조금이라도 들여다 볼 수 있게 되었다는 말이 맞을 듯하다. 제주에서 아침 해를 맞는 하루하루가 낯설지 않고 해녀들을 만나 조근조근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 편안하고 좋다고 말하는 그녀에게 해녀 이야기, 제주에서의 일상 이야기를 들어본다.

해녀스토리텔러, 장미라
해녀스토리텔러, 장미라
해녀스토리텔러, 장미라
해녀스토리텔러, 장미라

“제주에 오게 된 것은 갑자기 일어난 일이에요.” 변화가 간절하게 필요한 시기였을까. 아무 이유 없이 일어난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알 수 없는 운명의 힘에 의해 제주가 끌렸을 테고 그 마음을 따라가다 보니 어느새 온평 바다가 눈앞에 펼쳐지는 지금의 집에서 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다는 그녀, 그녀의 제주 이주 날짜는 깔끔하다. 2013년 1월 1일. 실제로 이주하기 전부터 제주의 어머니 ‘해녀’에 대한 관심이 컸다. 직업으로 하던 일이 기록하는 일이었고 ‘위안부·일제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이야기를 들을 기회를 가졌었다. 역사의 기록이라는 직업의 아이덴티티는 그녀의 제주살이를 마냥 편안하게 내버려두지 않았다. 제주 이주 전부터 해녀학교를 적극적으로 알아보았고 제주에 발을 디딘 첫해에 ‘한수풀해녀학교’에 들어갔다. 사실 그녀에겐 트라우마가 있다. “부산태생이지만 어릴 적 바다에서 물에 빠져 죽을 뻔한 기억이 있어요. 물을 무서워했어요.” 그런데 해녀수업이라니……. 해녀학교는 해녀를 알기 위한 첫 번째 관문이었고 그녀에게는 넘어야 할 산이었다. 처음에는 테왁만 붙잡고 꼼짝을 못하였다. 몇 달이 지나서 겨우 헤엄이 칠만해졌고 물에 대한 두려움이 없어졌다. 절실하면 극복할 수 있다. 해녀들의 삶도 그리하였다. “곤궁했던 살림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기 위해 10살 ~11살의 나이에 물질을 시작하고 스무 살 무렵에는 다른 지방에 가는 출가해녀를 해요.” 해녀들은 자연스럽게 또는 자신의 의지로 바다에 들어간다. 해녀는 직업에 자긍심을 갖는다. 다른 길을 선택할 수 있었다면 그리하겠지만 지금 60세, 70세가 되는 해녀들에게 선택의 폭은 그리 넓지 않았다. 자신의 바람이 무엇이든 집안을 이끌어야 했고 눈보라 치는 바다로 나가야만 했다. 톳, 우뭇가사리를 채취하는 해녀공동작업에는 몸이 아파도 참여해야 하며 해녀도구와 함께 상비약처럼 들이켜는 진통제 뇌선은 해녀들의 필수품이다. 작가는 그런 해녀들의 속내를 들여다보고자 했다, 순전히 같은 여자의 입장으로 이해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두 번째 해녀학교인 서귀포 법환해녀학교에서는 그나마 나았다. 물에 들어가기기도 버거웠던 첫 해녀학교를 졸업하고 나니 여유가 생겼다. 바닷속에 들어가서 해녀들에게 호흡법 이야기도 듣고 직접 소라도 캤다. 실제 법환해녀학교를 졸업한 10여 명은 해녀가 되었다고 한다. 해녀는 전문직업이다. 제주에서 바닷가에 사는 여성들이 어찌할 수 없는 숙명으로 택한 직업이었던 해녀가 이제는 바다를 터전 삼아 새로운 삶을 개척하려는 사람들의 관심 대상이 되고 있다. 억세고 강인한 이미지로 알려진 해녀 안에 숨어있는 따뜻하고 밝은 모습을 사진으로 글로 그려내고 있는 그녀에게 전해 들은 해녀는 낯설면서도 애틋하다. 여인으로서 수줍어하고 어머니로서 굳건한 우리네 어머니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다. 외따로 떨어진 섬에서 최선을 다해 삶을 꾸려야 했던 어머니였기에 조금 더 억척스러울 수밖에 없었던 것은 환경의 산물이다. 제주의 해녀들은 바다 밭에서 일한다. “삼춘들은 소금기 짙은 바닷물에 씻겨 나갈 것을 알면서도 화장을 곱게 하고 물질하러 가요.”라는 작가의 말에 가슴이 내려앉는다. 삼춘은 남자든 여자든 동네 어르신을 가깝게 부르는 말이다.

해녀스토리텔러, 장미라

1. 그녀가 거주하는 온평리 바닷가 집과 가까운 곳에 위치하는 수하리 카페는 그녀가 가끔 들러 쉬는 곳이다. 2. 카메라에 찍히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던 해녀들이 그녀의 카메라에 찍힌 자신의 모습을 보고는 기뻐하고 좋아한다. 강함에 감추어진 해녀들의 情과 일상을 담기 위해 그녀는 오늘도 카메라를 든다. 3. 외지인이 많이 이주해 와 온평리가 점차 활기를 띠어간다. 제주의 모든 해녀를 만난 후에 제주의 마을을 기록하고 싶어 하는 그녀에게 첫 대상 마을은 온평리가 아닐까.

처음부터 해녀들에게 가깝게 다가가지는 못했다. 깊은 바다로의 자맥질에 숨은 가빠오고 힘들게 내뱉는 숨비소리는 지상과 천상을 넘나든다. 그렇게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서 헤매고 있을 때 찰칵! 카메라 셔터가 오르내린다. 지나가는 여행자, 해녀를 담겠다는 사진가의 카메라 셔터는 그렇게 그들의 가슴에 생채기를 남긴다. 그동안 많은 이들이 제멋대로 사진을 찍고 동의도 없이 사용해왔기에 상처가 남았다는 해녀들. 괴로움에 몸서리치고 힘겨움에 숨 가빠했던 그 모습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사진에 담겨서 공항에 걸리고 책에 실렸다. 알지 못하다가 자식들이 전화를 해서 이를 알게 되니 얼마나 황당하겠는가. 장미라에게 사진은 가장 나중이었다. 해녀들이 망사리 가득 소라를 따서 바다 밖으로 나오면 그 무게는 엄청나다. 이를 끌어올려주는 손이 되었고 함께 나르는 동무가 되었다. 해녀탈의실을 수시로 찾았다. 진심은 전해진다 하였는가. 오래지 않아 조금씩 곁을 내주었고 사진으로 표현되는 자신들의 모습을 반겼다. 그녀가 찍은 사진들이 해녀박물관에 전시되고 사진과 글은 연재되었다. 힘이 아니라 情을 느낄 수 있는 사진들에 좋아해주신다. 아무도 돌아보지 않던 그네들의 삶을 먼지처럼 사라지지 않게 남겨줘서 고맙다는 이야기를 한다. 해녀 어머니의 이야기를 보고 자식들이 울었다며 그네들 또한 고맙다는 말을 전한다. 이것이 해녀작가, 장미라의 원동력이다. “해녀들을 모두 만나 기록해서 알리고 싶어요.” 하도해녀에 대한 기록을 남겼고 올해는 자신이 거주하는 온평리 해녀분들을 만나려고 한다. 그 끝을 기약할 수는 없지만 제주도 해녀 전체를 기록으로 남기고 아카이브 연구소를 만들어 해녀와 제주의 마을에 대한 섬세한 기록을 남기고 싶다는 것이 그녀의 최종적인 꿈이다. 사라질 위기에 처해있는 해녀의 맥을 잇기 위한 노력이 실질적이고 구체화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말한다. 해녀에 대한 애정으로 오늘을 제주에서 살며 내일의 원대한 계획을 실천해가는 그녀의 삶이 기대된다.

 

에디터 황정희

사진 오진권

2016.05.15원문링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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