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덜트 시티로 어서오세요

[컬처]by 서울문화재단

지난해, 한 패스트푸드 프랜차이즈에서 어린이 메뉴를 주문하면 수퍼마리오 피규어를 제공하자 이를 수집하기 위한 30~40대 고객이 대거 몰려들어 매장마다 피규어가 품절되는 일이 있었다. 일명 ‘해피밀 대란’으로 불리는 이 해프닝은 한국에서 다소 부정적으로 인식됐던 ‘키덜트’가 그들의 취향을 숨기지 않고 유력한 소비층으로 부상하는 사건이었다. 키덜트는 이제 한국에서 중요한 산업으로 성장하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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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에 오락실이 생겼다.” 30년 전이라면 꼬마들 사이에 큰 뉴스가 되었을 것이다. 너나 할 것 없이 용돈을 털어 달려갔을 게다. 지금이라면 어떨까? 집집마다 컴퓨터, 골목마다 PC방, 손에 손에 스마트폰이 들려 있는 시대다. 구린 화질의 아케이드 게임엔 콧방귀도 아깝다고 여길 것이다. 그런데 얼마 전 우리 동네에 진짜 오락실이 생겼다. 뜻밖에도 소년들이 앞다투어 달려갔다. 소년은 소년인데, 30~40대의 소년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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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봄 성황리에 개최된 2015 키덜트엑스포 행사 포스터.

추억의 오락실에서 ‘보글보글’ ‘테트리스’ ‘철권’을 깔깔대며 즐기는 어른들. 해외 직구로 한정판 프라모델 로봇과 빈티지 인형을 사 모으는 엄마아빠들. 사회적·육체적 연령은 어른이지만, 어린이 같은 취미를 즐기는 사람들을 두고 ‘키덜트(kidult)’라고 한다. 예전에는 별난 취미를 가진 특별한 사람들로 여겨지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 아니다. ‘키덜트 엑스포’ ‘키덜트 페스티벌’ 등의 대형 행사가 연이어 열리고, <키덜트잇>이라는 전문 잡지가 창간되고 있다. 키덜트는 지금의 시대를 상징하는 단어가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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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 매거진 <키덜트잇>의 메인 화면.

대중문화의 세례를 받으며 성장한 한국의 키덜트 1세대

영어 단어 ‘키덜트(kidult)’는 키드(kid)와 어덜트(adult)의 합성어로 1960년대에 처음 생겨난 말이다. 원래는 피터팬 신드롬과 비슷하게 성인이 되어서도 자신의 독립적 정체성을 확립하지 못하고, 아이처럼 무책임하게 놀이에 빠져 있는 태도를 일컫는 말이었다. 그러다가 21세기 초반에 새로운 의미를 얻게 된다. <해리포터>가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키며 소년 판타지 문학과 성인 독서 시장의 경계를 허물었다. <스타워즈> <반지의 제왕> 등의 영화가 소년의 감성으로 최고 수준의 엔터테인먼트를 펼쳐냈다. 아이들만이 가졌던 상상력의 즐거움을 어른이 되고 나서도 포기할 필요가 없다는 걸 알게 된다.


국내에서도 키덜트라는 단어가 곧바로 유입되었는데, 여기에 특수한 문화지체 현상이 결합되었다. 한국에서 대중문화를 본격적으로 즐기게 된 이들은 1970년대 이후에 태어난 세대들이다. 이들은 가파른 경제성장의 궤도에 맞춰, 어린이 만화 잡지, 컬러TV, 프로스포츠, 댄스 음악 등의 세례를 받으면서 자라왔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몇 가지 한계가 있었다. 먼저 로봇장난감, 애니메이션 상품, 게임기 등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인지했지만, 이런 상품들을 자유롭게 향유할 만큼의 경제적 여유는 없었다. 부모들은 입시와 성공에 대한 강박을 주입하며, 이들이 공부 외의 여흥을 위해 돈과 시간을 쓰는 것에 강한 제약을 가했다. 또한 일본 문화 등 해외 문화 상품의 유입이 제한되어 있어, 제대로 된 작품이나 그에 연관된 상품을 만날 기회가 없었다.


이러한 제약들을 한꺼번에 벗어나게 된 것이 2000년대 초반이었다. 이들은 20~30대 성인이 되어 독립된 공간과 경제적 여유를 얻게 되었다. 일본문화 개방으로 인해 소문으로만 듣던 애니메이션, 게임 등을 한꺼번에 만나게 되었다. 인터넷을 통해 각국의 문화 국경이 거의 소멸되었다. 갈망했으나 채우지 못했던 어린 시절의 욕망을 뒤늦게나마 해소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 때문에 한국의 키덜트 현상은 세계 어느 곳과도 비교할 수 없는 정도로 강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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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에 열린 ‘키덜트 페스티벌’에서는 국내 최대 규모의 레고시티 디오라마가 재현됐다.

키덜트 산업의 성장, 추억을 오래 즐길 권리

연이은 불황이 잉여의 취미생활에 타격을 주기도 했지만, 10여 년이 지난 지금 키덜트는 당당한 산업으로까지 자리 잡게 되었다. 이 시대가 문화 산업이 본격적으로 성장한 때라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 한국에서 키덜트라는 존재를 널리 알린 데는 피규어 수집광인 이승환, 태권브이 마니아인 양현석의 역할이 적지 않았다. 이들은 연예인이자 문화기획자로서 당당한 자기 활동을 하면서, 어린아이 같은 취미를 가진 것을 숨기지 않았다. 오히려 그러한 잉여 행동이 중요한 문화적 자산이자 자기 정체성의 표현으로 여겨졌다. ‘뽀로로’ ‘꼬마버스 타요’ ‘라바’ 등 국내 캐릭터의 급성장 역시 키덜트에 대한 시선을 바꾸게 했다. 키덜트의 진열장을 장식하게 된 물건들이 ‘비싼 로열티를 지불하고 사는 외국 장난감’이 아니라, ‘문화 한류의 자랑스러운 선봉장’이된 것이다.


출산율이 떨어지면서 한두 명의 아이와 부모가 긴밀하게 생활하는 것도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엄마아빠와 아이가 함께 뽀로로 티셔츠를 입고 타요 버스를 찾아가 사진을 찍고 장난감을 사는 게 아주 일상적인 모습이 되고 있다. 물론 키덜트 엄마아빠는 아이에게 뽀로로 인형을 안겨 재운 뒤에 다른 꿍꿍이를 벌인다. 이소룡의 액션 장면을 그대로 본뜬 초고가의 액션 피규어를 장만하기 위해 경매 사이트에 접속하거나, 구체관절인형에게 자기 것보다 비싼 옷을 갈아입히기도 한다.


기업을 이끄는 CEO나 정책 결정자 중에도 키덜트 취향을 가진 사람이 많아졌다. 앞서 말한 대중문화 세대가 이미 40대 중반이 되기도 했고, 벤처사업을 일군 젊은 사업가도 많아졌다. 이들은 본인이 좋아해서, 또는 주변의 성인들이 좋아할 걸 알아서 키덜트 사업에 뛰어들고 있다. 거대한 캐릭터 인형을 사옥 중앙에 배치하고, 드론이나 액션캠 등 최신 과학기술을 활용한 키덜트 가전 전문점을 열고 있다.


키덜트의 감성은 낯선 이들과의 거리를 좁히는 일도 도와준다. 미니 마우스 핸드백, 피카추 스냅백 등 애니메이션 캐릭터로 장식된 패션이 세대의벽을 허문다. 외국인과 자연스럽게 어울리기 위해 스파이더맨, 배트맨, 어벤저스 등 슈퍼 히어로 대한 이야기를 꺼내는 것도 좋다.


우리는 지금 기대수명 80세의 문턱을 넘어서고 있다. 무언가를 추억하고 살아야 할 시간이 점점 늘어나고 있는 것이다. 가장 즐거울 수 있는 때, 소년소녀의 시간을 어떻게든 연장시켜야 하는 게 아닐까?


글 이명석
사진 제공 키덜트엑스포

2015.07.28원문링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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