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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컬처 ]

흑인, 남성, 이민자, 게이…
101년 역사 보그가 선택한 이 남자

by중앙일보

1일 취임한 영국 보그 편집장 에드워드 에닌풀

가나에서 런던으로 이주한 이민자의 아들

어릴 적 자란 런던서 창조적 영감 길러

 

인종차별과 반 트럼프에 맞서는 기획

사회이슈를 작품활동에 적극 활용하기도

패션계 막강 인맥, 초호화 스태프 강점

패션업계 변화와 혁신에 앞장설 듯

 

이달 초 세계적인 패션잡지 ‘보그(VOGUE)’의 영국판 편집장에 에드워드 에닌풀(45)이 취임했다. 전통적으로 백인 여성이 맡아왔던 101년 보그 역사상 그는 첫 남성 편집장이다. 최초의 아프리카계 이민자이자 게이, 흑인인 그의 편집장 취임은 전 세계 패션계에 ‘혁명적인 사건’이었다.

흑인, 남성, 이민자, 게이… 101

"오늘부터 1일! 감사의 마음을 담아" 에드워드 에닌풀이 지난 1일 보그 편집장 취임에 맞춰 SNS에 올린 사진이다. [사진 에닌풀 인스타그램]

가나에서 태어난 그는 어릴 적 부모를 따라 영국 런던으로 이주했다. 그의 아버지는 육체노동자, 어머니는 재단사였다. 이런 그의 배경에는 다양성을 추구하는 패션업계에 일대 변화를 몰고 올 것이라는 예상과, 그간 패션잡지를 이끌어온 ‘중산층 출신 백인 여성 편집장’들과는 전혀 다른 퍼포먼스를 추구하는 기대가 깔려 있다.

 

에닌풀은 16세에 모델로 패션업계에 발을 내디뎠다. 19세에 패션잡지 ‘i-D’의 패션부장으로 전격 발탁된 것을 시작으로 ‘W’, 이탈리아와 미국판 보그의 편집자와 스타일리스트로 활약했다. 작년엔 패션업계에서의 오랜 공적을 인정받아 엘리자베스 2세 여왕으로부터 영국 제국훈장(OBE)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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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엘리자베스 여왕으로부터 훈장을 받은 에닌풀(왼쪽에서 셋째). 맨 오른쪽은 패션계 절친인 수퍼모델 나오미 캠벨이다. [사진 에닌풀 인스타그램]

그는 7월호 보그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의 패션 영감은 어릴 적 런던에서 길러졌다고 소개했다.

 

“젊은 시절, 웨스트 런던 특히 노팅힐 주변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이곳은 잘 아시다시피 런던에서도 가장 크리에이티브한 지역으로, 언제나 시대를 앞서가는 공간입니다. 어머니는 재단사로 일하셨는데, 나는 그때부터 ‘i-D’ 등 패션 잡지를 탐독했습니다. 또 한가지 런던에는 훌륭한 클럽들이 많은데, 보이 조지를 비롯한 수많은 수퍼스타들이 탄생한 곳이기도 합니다. 런던의 그런 에너지 속에서 자랐고, 필연적으로 창조적인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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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만의 패션아이템으로 안경을 꼽는 에드워드 에닌풀. 그는 어린 시절 런던 노팅힐에서 패션과 문화적 영감을 얻었다고 했다. [사진 에닌풀 인스타그램]

스타일링의 즐거움에 대해서는 “옷으로 세상의 모든 것을 표현하는 일”이라고 주저 없이 답했다. “의상을 통해 시대를 표현할 수 있고, 과거를 돌아볼 수도 있지요. 1950년대라면 로큰롤과 엘비스 프레슬리, 60년대는 비틀즈, 70년대는 데이비드 보위 등이 대표적인 아티스트들입니다. 80년대에는 마돈나라는 강력한 스타일이 존재했습니다. 마돈나 이후엔 좀처럼 인물이 없었는데, 최근엔 리아나와 드레이크 같은 패션을 사랑하는 아티스트들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는 스타일리스트를 비롯해 영화감독, 브랜드 컨설턴트 등을 두루 섭렵한 멀티플레이어다. “사람은 자신의 일을 즐기면서 동시에 호기심을 가져야 합니다. 나는 언제나 한 곳에 머무르지 않았습니다. 끝없이 공부하고 새로운 도전을 찾아나서는 것을 좋아합니다. 세상이 원하는 나의 틀에 자신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새 영역을 창조해 나가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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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닌풀(가운데)이 최근 제작한 Gap의 영상작품 'Bridging the Gap'에 참여한 14명의 캐스트들. [사진 에닌풀 인스타그램]

그의 이런 도전정신은 패션계에 언제나 도전과 변화를 몰고 왔다. 그가 2008년 이탈리아판 보그에서 흑인모델만 기용해 출판한 특집판은 화제성과 함께 상업적으로도 대대적인 성공을 거뒀다. 인종차별을 비롯한 사회 이슈에 정면으로 대응하는 그의 기획력은 항상 높은 평가를 받았다.

 

올 초 취임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이슬람국가 출신 이민자들의 입국금지령에도 정면으로 맞섰다. 그는 올 2월 W매거진의 유튜브 채널을 통해 '나는 이민자입니다(I am an immigrant)'라는 제목의 동영상을 제작했다. 81명의 패션업계 유력 인사들의 목소리를 빌어 제작한 이 동영상은 사회에 큰 울림을 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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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무대를 마치고 모델들과 함께 한 에드워드 에닌풀.[사진 에닌풀 인스타그램]

영국 신문 텔레그래프에 따르면 보그를 출판하고 있는 컨데나스트 인터내셔널의 조너선 뉴하우스 CEO는 “에드워드는 세계에서 가장 유능하고 숙련된 패션 편집자 중 한 사람이다. 패션업계나 할리우드, 음악업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존재”라고 평가했다.

 

에닌풀의 편집장 취임으로 패션계에서 흑인 여성들의 권리가 더 위협받는 것 아니냐는 우려의 목소리도 나왔다. 하지만 그의 절친인 수퍼모델 나오미 캠벨을 비롯한 패션계 흑인 여성들은 이런 우려를 불식하듯 SNS를 통해 그의 취임을 축하하고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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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돈나, 나오미 캠벨, 지지 하디드 등은 그의 패션계 막강 인맥이다. [사진 나오미 캠벨 인스타그램]

패션계에서 그의 인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팝스타 마돈나와 원조 수퍼모델 나오미 캠벨, 케이트 모스, 그리고 최근 토미 힐피거 등과의 컬래버레이션을 발표하며 최고의 몸값을 자랑하는 지지 하디드 등을 자신의 크리에이티브 모델로 언제든 기용할 수 있는 능력자다. 업계에선 이들 셀러브리티와의 친분, 여기에 인스타그램 등 SNS를 활용해 세상과 활발히 소통하는 그가 종전의 전통적인 패션업계의 질서와 미래 패션계를 잇는 연결고리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그가 이끌게 될 영국 보그에는 패션 디렉터 루신다 챔버스와 케이트 펠란, 그리고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스타일리스트 조 맥케나 같은 베테랑들이 포진 중이다. 그가 맡은 ‘보그’의 변신이 기대되는 이유다.

에닌풀이 지난 2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이슬람국가 출신자들의 입국금지조치에 맞서 제작한 동영상 '나는 이민자입니다(I am an immigrant).

서정민 기자 meantree@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