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면로드] '매워도 맛있어' 美서 세계인 입맛 바꿔놓은 한국라면

[비즈]by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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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29일(현지 시간) 미국 로스앤젤레스(LA) 외곽 치노밸리의 대만계 대형 슈퍼마켓 ‘99 랜츠 마켓’. 매장 한가운데 자리 잡은 라면 코너에 들어서자 첫눈에 빨강 바탕에 한자로 된 검은색 매울 신(辛)자가 선명한 한국의 농심 신라면이 확 들어온다. 옆엔 역시 농심의 너구리와 김치라면. 아래쪽 선반에도 튀김우동ㆍ생면 등 다양한 농심라면들이 터를 잡고 있다. 선반 꼭대기에도 한글과 영어로 포장을 한 친숙한 라면들이 눈에 들어온다. 오뚜기 진라면, 팔도 비빔면ㆍ우골탕면, 삼양 불닭볶음면….

반가운 마음에 한 걸음 더 다가서니, 한국 라면뿐이 아니다. 삿포로이치방ㆍ도쿄ㆍ니신ㆍ마루찬 등 일본라면들도 줄을 지어 있다. 이외에도 말레이시아의 이부미, 태국의 마마, 중국 유니프 등. 마치‘라면 엑스포’에 온 듯한 느낌이다.


세계 인스턴트 라면의 격전지인 미국에서 한국 라면이 세계인의 입맛을 바꿔놓고 있다. 과거 인스턴트 라면의 원조인 일본라면이 미국 시장의 주종을 이뤘다면, 이제는 농심을 필두로 한국 브랜드들이 그 자리를 빠르게 잠식하고 있다. 여기에 중국과 동남아 국가의 라면들까지 새롭게 등장하고 있는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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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무역투자진흥공사(KOTRA)에 따르면 한국은 미국의 라면제품 1위 수입국이다. 미국은 지난해 한국에서 5862만 달러(약 663억원)의 라면 제품을 수입, 전체 라면 수입액의 26.6%를 차지했다. 미국 시장에서 한국라면 제품 수입은 지난해 전년대비 16.38% 증가하는 등 꾸준한 증가세를 보이고 있다.

권오석 LA무역관장은“SNS를 통해 매운 한국 라면 맛보기 챌린지가 소개되면서, 전 세계 젊은층의 소비자들 사이에서 한국 라면에 대한 관심도가 높아지고 있다”며“특히 매운 맛을 즐겨 먹는 히스패닉 소비자들 사이에서도 한국식 매콤한 국물 라면의 인기가 높다”고 말했다.


미국 라면 시장은 연간 12억4000만 달러(약 1조4000억원) 규모다. 시장 점유율 1위는 일본기업 마루찬(46%). 2위는 니신(30%)이다. 한국의 대표 주자 농심은 15%의 점유율로 3위를 차지하고 있다. 여기서 눈여겨볼 점은 성장세다. 농심의 미국시장 점유율은 10년 전만 하더라도 2%에 불과했다. 하지만 최근 매년 14%씩 매출이 성장하면서 빠른 속도로 원조인 일본 라면을 따라잡고 있다.


1971년 처음 미국 시장에 발을 들여놓은 농심은 이후 현지 매출이 크게 늘면서 2005년 아예 LA지역에 라면공장을 세웠다. 북미 지역에서 유일한 한국 라면 공장시설이다. 이곳에서 생산되는 16종의 라면이 연간 3억 개 이상 캐나다와 미국ㆍ멕시코 지역으로 팔려나간다.


지난달 29일 찾은 농심 LA공장은 거대했다. LA도심에서 동쪽으로 100㎞ 가량 떨어진 소도시 랜초쿠카몽가에 자리한 5만2000㎡(약 1만5600평) 규모의 농심 아메리카법인 캠퍼스에는 100m 길이의 라면 생산라인 5개를 갖춘 공장이 들어서 있었다. 길 건너편에는 공장 절반 규모의 시설에 연구개발(R&D)과 마케팅본부ㆍ창고 등의 시설까지 갖추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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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심 아메리카법인의 장우진 부장은“최근 공장시설 규모의 대폭 키웠다”며“R&D 시설이 들어선 곳은 일주일 전에 새로 입주한 곳”이라고 말했다. 그는“현지인의 입맛을 공략하기 위해 한국산 제품과는 별도로 제품 개발을 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실제로 농심아메리카법인이 생산하는 제품 16종 중 한국에는 없는 제품만 6종에 이른다. 오룡면(烏龍麵)ㆍ김치ㆍ순(純) 등이 그것이다.


후발주자인 한국 라면이 어떻게 미국인들의 입맛을 사로잡을 수 있었을까. 농심의 북미 지역 판매총괄을 맡고 있는 크리스 로스 본부장은 그 비결을 ‘프리미엄 전략’으로 압축 설명했다. 그는“니신ㆍ마루찬과 같은 일본 라면은 처음부터 주공략 대상이 저소득층이어서 면에 (가루)스프가 전부였다”며“반면 농심은 고급 밀가루에 건더기 스프까지 곁들였다”고 말했다.


여기에 더해 일본라면이 쓰는 컵보다 용량이 큰 사발에 더 많은 면을 담고, 발효 스프를 이용해 양과 질에서 일본라면과는 질적 차이가 많이 난다는 게 농심측의 설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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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엽 농심아메리카 법인장은“우리는 LA공장에서 R&D를 통해 다양한 스프를 직접 개발하고 있지만, 니신과 마루찬은 공장을 미국 현지에 두고서도 외부에서 면과 스프를 공급받아 믹스만 할 뿐”이라고 말했다. 그는 “한국처럼 미국의 젊은 백인들도 최근에는 점점 더 매운 라면을 좋아한다”며 “미국 농심 소비층은 60%가 백인ㆍ히스패틱ㆍ흑인이며, 나머지가 아시아인들”이라고 덧붙였다.


신 법인장과 주요 본부장들은 주중 매일 점심식사를 사내 ‘크리에이티브 룸’(creative room)에서 해결한다. 주요 임직원과 연구개발실 연구원들이 함께 매일 다른 재료로 만든 면과 스프를 활용해 새로운 맛의 면을 요리해 먹고 토론하는 식이다. 농심 관계자는 “매일 점심시간마다 매일 다른 메뉴의 면요리를 만들어보는 것이 실무자 입장에서 부담될 수도 있지만, 격의없는 토론을 통해 새로운 아이디어를 얻으려고 하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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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같은 노력 덕분에 지난해 8월 농심의 대표 주자 신라면은 한국 식품 최초로 미국 월마트 4692개 전 점포에 입점할 수 있었다. 월마트가 미국 전역에서 판매하는 식품은 코카콜라와 네슬레ㆍ펩시ㆍ켈로그ㆍ하인즈 등 세계적인 식품 브랜드뿐이다. 농심 신라면이 미국 현지에서 가치를 인정받았다는 뜻이다.


한국 라면의 활약은 미국시장뿐 아니다. 삼양식품의 불닭볶음면은 최근 유투브 등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서 한국 라면을 세계인들에게 전파하는 첨병이 되고 있다. 유투브 검색창에 불닭볶음면을 뜻하는‘fire noodle’을 쳐넣으면 100만 개에 가까운 동영상이 검색된다. 이들 중에는 한국인이 외국 친구들과 같이 불닭볶음면을 즐기는 영상도 있지만, 외국인들끼리 매운 맛에 도전하는 것들도 절반 가까이 된다. 덕분에 삼양식품은 최근 연간 매출 4500억원 중, 45%(2050억원)를 수출로 올리고 있다.


진종기 삼양식품 기획담당 상무는“수출의 85%를 불닭볶음면 시리즈들이 차지하고 있다”며“한국인의 입맛에도 매운 라면을 외국인들이 즐긴다는 게 뜻밖이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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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정 국가에서 맹활약을 하는 한국라면도 있다. 1986년 출시된 사각형 모양의 팔도 도시락이 그 주인공이다. 도시락은 러시아에서 단순 1위가 아닌‘국민라면’으로 성장했다. 시장을 석권하다 보니 현지인들은 아예‘라면=도시락’으로 여길 정도다. 이 때문에 팔도는 2002년 ‘도시락’이라는 이름의 현지법인까지 세우고 2개의 생산 공장에서 8종의 도시락을 생산하고 있다. 지난해 러시아 내 매출은 2300억원에 달해, 팔도 국내 라면 매출(2200억원)을 넘어서는 진기록을 세웠다.


조홍철 팔도 해외영업팀장은“도시락은 부산항과 러시아를 오가던 러시아 선원들과 보따리상을 통해 러시아 처음 알려졌다”며“이후 현지에 공장을 세우고 치킨ㆍ버섯ㆍ새우 등 현지인 입맛에 맞는 제품을 끊임없는 맛의 현지화를 한 것이 러시아 시장을 석권한 비결”이라고 말했다.


로스앤젤레스=최준호 기자 joonh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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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8.06원문링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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