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등산사] 8848m서 스노보드 하강···그는 어디로 사라졌나

[여행]by 중앙일보

■ 마르코 시프레디

에베레스트 첫 활강 성공했지만

자신이 원했던 길 못가 재도전


“아듀” 인사 뒤 죽음의 지대로

8848m 올라 구름 속 사라져


“아듀,”


2002년 9월 에베레스트에 있던 마르코 시프레디(23)는 친구에게 위성전화를 걸었다. 다시 보자는 뜻의 ‘오 르봐(au revoir)’가 아니었다.


몇 시간 뒤, 시프레디는 에베레스트 정상에서 스노보드 하강에 나섰다. 구름 낀 협곡으로 날아들었다.

중앙일보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시프레디는 프랑스 샤모니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자연스럽게 산과 눈에 빠졌다. 그는 틈만 나면 스노보드를 메고 높은 산에 올랐다. 눈에 선 굵은 자국을 남기며 내려섰다.

1998년, 시프레디는 페루의 토클라라주(6032m)에서 스노보드를 탄 채 하강했다. 1999년 6월, 평균 경사 55도인 프랑스 샤모니의 에귀 베르테(4121m) 낭 블랑에서도 스노보드를 타고 내려왔다. 쟝 마르크 브아뱅의 첫 성공 이후 10년 만이었다. 같은 해 가을, 네팔의 도르지 락파(6,988m)에서도 스노보드 하산에 성공했다. 그는 이곳에서 에베레스트를 보며 새로운 목표를 세웠다. 토클라라주 하강에서부터 찬 십자가 목걸이는 행운의 상징이 됐다.


2000년, 그는 상업등반대인 ‘히말라야 엑스퍼디션’과 의기투합했다. 시프레디는 자신이 8000m가 넘는 ‘죽음의 지대’에 적응할 수 있는지 궁금했다. 그해 가을, 세계 6위봉인 8201m 초오유에 올랐다. 자신감을 가진 시프레디는 이듬해 5월 에베레스트로 향했다.

중앙일보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중앙일보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2001년 5월, 에베레스트에는 이미 오스트리아의 스테판 가트가 스노보드 하강을 준비하고 있었다. 한 봉우리에 두 명이 같은 목표를 갖고 있었던 셈이다. 스키를 이용한 에베레스트 활강은 이미 1년 전인 2000년 10월 7일에 이뤄졌다. 슬로베니아의 다보 카르니차르(당시 38세)가 5시간 만에 성공했다.

가트는 시프레디보다 하루 먼저 에베레스트 정상에 올랐다. 무산소 등정이었다. 가트는 노튼 쿨루아르(couloir·산비탈의 협곡)를 따라 내려갔다. 300m 가량 지나 그는 스노보드를 벗고 얼마간 걸어서 내려갔다.


“눈이 딱딱해 보여 그다지 (스노보드를) 타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가트는 7600m 지점에서 다시 스노보드에 올라 6450m 전진베이스캠프까지 미끄러져 내려갔다. 완주 기록을 인정받지 못했다. 그는 첫 번째 시도자라는 타이틀로 만족해야 했다.


5월 23일, 상업등반대와 함께 에베레스트 정상에 오른 시프레디도 노튼 쿨루아르를 택했다. 그러나 200m도 채 지나지 않아 영하35도의 강추위에 스노보드 바인딩이 파손됐다. 셰르파가 급히 내려가 수리를 해줬다. 그리고 6450m 지점까지 한달음에 내려갔다. 정상에서 전진베이스캠프(ABC)까지 세 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시프레디는 원래 북면 서쪽의 혼바인 쿨루아르를 노렸다. 이곳은 해발 8500m에서 8000m까지, 최대 경사 60도로 급격히 떨어진다. 하지만 눈이 적었다. 노튼 쿨루아르를 통해 내려선 건 절반의 성공이었다. 이는 절반의 실패라는 말과 동의어다. 그로서는 에베레스트에 묵직한 숙제를 놔두고 온 셈이 됐다.

중앙일보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중앙일보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1년 뒤, 시프레디는 눈이 좀 더 많은 9월을 기다렸다. 몬순은 통상 6월에서 9월까지 이어진다. 그는 2002년 8월 8일 다시 히말라야로 향했다. 행운의 상징인 십자가 목걸이는 집에 놔둔 채.

블루버드(bluebird·눈보라 뒤의 화창한 날씨를 뜻하는 스키용어)가 이어졌다. 9월7일, 8300m의 캠프3까지 전진했다. 위성전화로 프랑스 샤모니에 있는 친구 얀과 통화를 했다. 얀은 7일 저녁부터 8일에 걸쳐 구름이 낀다고 했다. 구름 대부분은 8000m 아래에 있을 것이라고 했다.


“얀, 알았어. 그리고 아듀.”


“음, 그래.”


얀은 순간 의아했다. 아듀(adieu)라니. 다시 보자(오 르봐·au revoir)가 아니고?


시프레디가 고향의 친구와 한 차례 더 통화하자 위성전화는 방전됐다.

중앙일보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2002년 9월 8일, 시프레디는 마지막 캠프인 8300m 지점에서부터 가슴께까지 올라온 눈을 뚫고 정상에 올랐다. 무려 12시간 30분이 걸렸다. 지난해 등정보다 3배 더 걸린 시간이었다. 동행한 3명의 셰르파 중 1명인 푸르바 타시는 정상에서 춤을 췄다. 하지만 시프레디는 지쳐 있었다.

“눈이 많네. 너무 피곤하고.”


하늘은 맑았고 눈은 파우더처럼 쌓여 있었다. 스노보드를 타기에 더할 나위 없는 날이었다. 역시 블루버드였다. 하지만 이미 오후 3시였다. 밑에는 짙은 구름이 몰려들었다. 얀의 말 그대로였다. 셰르파들은 그의 스노보드 하산을 막았다. 배낭에는 가득 찬 산소통과 하강장비, 3리터의 물을 넣었다. 모든 게 순조롭다면, 이 얄팍한 배낭은 문제될 게 없었다.









“푸르바, 내일 봐요.”

시프레디의 마지막 말이었다. 그는 셰르파들 앞에서 스노보드 턴을 몇 번 했다. 가쁜 숨이 몰아쳐 나왔다. 그리고 그는 구름 낀 혼바인 쿨르아르 속으로 사라졌다.


캠프3에서 장비를 정리하던 셰르파들은 저 아래의 노스 콜에서 스노보드를 타고 유유히 내려서는 사람을 봤다. 이미 등반 시즌이 지난 에베레스트에는 그들 외엔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셰르파들이 노스 콜에 내려갔을 때 스노보드 흔적은 전혀 없었다.



한 달 뒤 시프레디의 추모식이 에베레스트 베이스캠프에서 열렸다. 정상에서 혼바인 쿨루와르로 이어지는 길목에는 시프레디의 스노보드 자국이 선명하게 보였다. 3800m 위였다. 시프레디는 어디로 사라졌을까.
중앙일보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눈사태가 그를 휩쓸고 갔을지도 모른다. 당시 많은 눈은 스노보드 하기에는 좋을지 모르지만 눈사태의 위험이 컸다. 추락 가능성도 있었다. 히말라야 등반기록 전문가인 엘리자베스 홀리 여사는 시프레디의 스노보드 흔적이 8500m 지점에서 끝났다고 했다. 그러나 그의 누이 슈티는, 마르코가 살아있다고 믿는다. 티베트 이곳저곳의 고산에 오른 뒤 유유히 스노보드 활강을 즐긴다고.

김홍준 기자 rimrim@joongang.co.kr

중앙일보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중앙일보 '홈페이지' / '페이스북' 친구추가


이슈를 쉽게 정리해주는 '썰리'


ⓒ중앙일보 (http://joongang.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2022.08.06원문링크 바로가기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 등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Copyright © ZUM internet Corp.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