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에 묻다 … 돈 버는 곳인가 병 고치는 곳인가

[컬처]by 중앙일보

의학드라마 폭 넓힌 ‘라이프’

의료민영화 안팎 정면에서 해부

주요 캐릭터만 21명 긴장감 높여

‘비밀의 숲’ 이수연 작가의 신작

과잉진료·오진 논란 등도 건드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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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TBC 월화극 ‘라이프’는 이상한 드라마다. 분명 이야기의 배경이 대학병원임에도 여느 의학드라마와 다르다. 예컨대 급박하게 응급실로 후송되는 환자는 있어도 의사가 그 위로 올라타 심폐소생술을 하는 식의 장면은 없다. 수술 전 양손에 장갑을 끼고 메스를 찾는 장면도 없다. 피고름 튀는 수술보다 더 치열한, 피 튀기는 듯한 기 싸움이 펼쳐질 뿐이다.

이는 ‘라이프’의 시선이 개별 의사가 아닌 전체 의료 시스템을 향하는 데서 기인한다. 주인공으로 신념을 중시하는 응급센터 전문의 예진우(이동욱 분)와 “병원도 기업”이라며 구조조정을 단행하는 총괄사장 구승효(조승우 분)을 내세웠지만, 실상은 자본주의 논리에 잠식돼 가는 병원과 의료민영화로 이어지는 문제에 방점을 찍는다. 의사들의 일과 사랑을 다룬 ‘종합병원’(1994)이나 병원 내 권력 다툼을 그린 ‘하얀거탑’(2003)과는 결이 다를 수밖에 없다.


지난해 데뷔작 ‘비밀의 숲’으로 백상예술대상에서 TV 부문 대상·극본상·남자최우수상(조승우) 등을 거둔 이수연 작가는 ‘라이프’의 기획의도에서 두 주인공을 항원과 항체에 비유했다. 의사가 아니라 재벌그룹 전문경영인 출신인 사장이 병원이라는 체내에 침입해 특이 반응을 유발하는 ‘사람의 얼굴을 한 항원’이라면, 평소엔 온순하던 청년 의사가 이에 반응하는 모습은 저항력이 필요한 신체 부위로 달려가는 항체로 표현한 것이다. “대한민국 아픈 곳을 수술하겠다”고 취임 일성을 던진 조승우의 메스는 제법 날카롭다.


이 드라마는 인물관계도에 나오는 사람만 21명에 달한다. 현실에서도 쉽사리 답을 찾지 못한 문제를 풀어내기 위해서는 보다 다양한 입장을 대변할 목소리가 필요하기 때문. 흉부외과 센터장(유재명 분)이나 장기이식센터 코디네이터(태인호 분) 같은 병원에서 일하는 사람은 물론 국민건강보험심사평가위원회 심사위원(이규형 분) 같은 낯선 직업도 등장한다. ‘닥터 이방인’(2014) ‘명불허전’(2017) 등을 연출한 홍종찬 PD는 “‘라이프’는 각각의 인물이 그동안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전사를 보여주거나 사건을 통해 서사를 전개하기보다는 철저히 병원 안의 모습에 집중하며 파고든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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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히 드라마가 던지는 질문도 달라진다. 의사 대 의사 혹은 의사 대 환자 중심으로 진행되는 드라마에 비해 다룰 수 있는 범위가 훨씬 넓다. 충남대 국문과 윤석진 교수는 “‘골든타임’(2012)이 의사와 의료행위의 상관관계라는 다른 층위의 고민을 하게 했다면, ‘라이프’는 명분과 실리 중 어느 쪽을 좇을 것인가를 묻는 동시에 의료민영화를 통해 신자유주의시대에 대한 사회적 성찰을 요구한다”고 분석했다. 작가의 전작 ‘비밀의 숲’ 역시 검사나 경찰 개인의 업적보다 시스템적 문제를 드러내는 데 공을 들였다.

전작에서 입증된 작가의 취재력도 빛을 발한다. 출신학교에 따라 조직 내 주류와 비주류가 대립하고, 실수가 없을 수 없는 상황에서 실수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의사들의 민낯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공희정 드라마평론가는 “누구나 병원에서 느꼈을 법한 과잉진료나 오진 등의 에피소드 등을 통해 시청자들이 보다 쉽게 병원 내 산재한 문제들을 이해하며 쫓아갈 수 있도록 촘촘하게 구성했다. 여기에 원장의 의문사나 가족관계 등 미스터리한 요소를 곳곳에 배치함으로써 장르물적인 재미를 더했다”고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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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 전 제작발표회에서도 극본에 대한 칭찬이 쏟아졌다. 대본은 일찌감치 탈고, 지난 3일 마지막 촬영까지 끝난 상태다. 이 작가 작품에 연속해 주연을 맡은 조승우는 “사실 작가님 대본이 되게 어려워서 즐거운 마음으로 머리를 쥐어뜯으면서 하루하루를 보냈기 때문에 고민이 많았지만 그래도 잘한 일 같다”고 소감을 밝혔다. 신경외과 센터장 역을 맡은 문소리는 “많은 드라마나 영화가 사회 문제를 단순히 소재로 다루는 데 반해 이렇게 날카롭게 정면돌파할 수 있다는 데 놀랐다”고 밝혔다.

이는 JTBC 드라마 첫방 최고 시청률인 4.3%(닐슨코리아 유료가구 기준)로 시작한 이 드라마가 넘어야 할 산이기도 하다. ‘도깨비’ 이후 차기작으로 이 작품을 택한 이동욱은 “작가님에 대한 믿음이 컸지만 사실 처음 대본을 봤을 땐 한눈에 잘 안 들어왔다. 여러 번 읽어보고 후반부로 갈수록 의문이 풀려나가고 이해의 폭이 넓어지는 독특하고 섬세한 화법”이라며 고충을 털어놨다. 배우뿐 아니라 시청자 역시 한순간도 긴장을 풀지 않고 정자세로 관람해야 하는 작품이란 반응이 나온다. 화제성·작품성을 고루 잡은 ‘비밀의 숲’ 최고 시청률이 6.6%에 그친 것 역시 이처럼 중간 진입이 어려운 까닭이었다.


반면 매체 환경 변화에 따라 드라마의 장르적 속성 자체가 바뀌었다는 분석도 나온다. 몰입이 담보되지 않으면 바로 채널이 돌아가고, TV가 아닌 다른 플랫폼으로 옮겨탈 수 있는 상황에서 다른 일을 하면서도 볼 수 있는 느슨한 지상파 미니시리즈 형태로는 더는 소구하기 어렵다는 뜻이다. 윤석진 교수는 “비지상파 채널에서 꾸준히 양질의 장르물을 선보이면서 새로운 시청 습관이 형성됐고, ‘미스티’나 ‘마더’처럼 사회적 이슈를 차용하고 방향성을 제시하는 것 또한 좋은 드라마가 갖춰야 할 조건이 됐기 때문에 이런 현상은 앞으로 더욱 강화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민경원 기자 storym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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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8.06원문링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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