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 자폐증" 2조 달러 주무른 채권왕의 놀라운 고백

[비즈]by 중앙일보

채권 투자의 전설, 빌 그로스 은퇴

“아스퍼거 증후군 때문인 집착증

투자전략 집중해 짜는 덴 큰 도움”


27년간 연평균 7.8% 수익률 올려

AI시대 직감에 의존하다 내리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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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조 달러(약 2250조원)의 엄청난 자금을 운용하며 20세기 후반 미국 금융계를 주름잡았던 ‘채권왕’ 빌 그로스 야누스캐피털 그룹 포트폴리오 매니저(75)가 공식 은퇴했다.


그는 자신의 은퇴일인 1일(현지시간) 블룸버그TV와의 인터뷰에서 아스퍼거 증후군 투병 사실을 털어놨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전설적인 채권 투자자의 놀라운 고백이다. 아스퍼거 증후군은 사회적으로 의사소통 능력이 떨어지는 자폐성 장애다.


그로스는 “아스퍼거 증후군 투병에 따라 생긴 집착성은 주변인과 마찰을 일으킨 요인이었다. 하지만 한편으론 장기적인 투자 전략 개발에 집중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고 밝혔다. 자신이 겪은 정신질환이 ‘채권 투자계 1인자’로 발돋움하는 데 일정 부분 영향을 끼쳤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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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T 수학과 교수 에드워드 소프가 쓴 『딜러를 이기는 방법』(1961년).

미 듀크대 재학 시절 평범한 심리학도였던 그는 졸업 후 해군 특공대(SEAL)에 입대해 베트남전에 참전했다. 제대 후엔 매사추세츠공과대(MIT) 수학과 교수 에드워드 소프가 쓴 『딜러를 이기는 방법』(1961년)을 독파하며, 혼자 힘으로 ‘블랙잭(딜러와 플레이어가 두 장 이상의 카드를 합한 점수로 대결하는 카드게임)’을 익혔다.


이 경험을 토대로 라스베이거스 도박장에서 단돈 200달러를 1만 달러로 불리는 등 뛰어난 투자 수완을 발휘했다. 이 돈을 캘리포니아대 로스앤젤레스캠퍼스(UCLA) 경영전문대학원(MBA) 등록금에 쓴 그는 훗날 “도박을 통해 리스크 테이킹(위험 감수 투자)을 배웠다”고 밝혔다.


그로스가 ‘채권왕’으로 알려진 건 전성기 시절의 승부사 기질 덕분이다. 1971년 글로벌 채권펀드 운용사 ‘핌코(PIMCO)’를 공동 창업한 그는 87년 ‘토털 리턴 펀드’를 출시했다. 이 펀드는 그가 퇴사한 2014년까지 연평균 7.8%의 수익률을 올렸다. 80년대 초 미 금리가 장기간 하락할 때 핌코는 미국 국채 시장에서 큰돈을 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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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핌코가 독일 보험사인 알리안츠에 매각된 후에도 그는 회사에 남아 토털 리턴 펀드의 운용 책임을 맡았다. 이 펀드의 규모는 이후 3000억 달러(약 336조원)로 불어났다. 핌코의 전체 자산 규모 역시 2조 달러로 증가했다.


신환종 NH투자증권 FICC리서치센터장은 “그로스는 현장 실사를 통해 거시경제 흐름과 기업 신용도를 꼼꼼히 확인하고자 노력했다. 그 덕분에 각종 금융위기에서도 채권 수익을 낼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채권왕의 명성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2011년 토털리턴펀드의 수익률이 4.16%를 기록해, 벤치마크(7.84%)에도 못 미친 것이다. 수익률 하락으로 투자금 50억 달러(약 5조6300억원)가 하룻밤에 빠진 적도 있다.


2014년 투자 실패로 경영진과 마찰을 겪은 그는 핌코를 떠났다. 중소형 펀드 운용사인 ‘야누스 캐피털 그룹’으로 자리를 옮겼다. 하지만 이 회사에서도 좀처럼 양호한 실적을 내지 못했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에 따르면 지난해 그로스가 운용한 글로벌 언컨스트레인드 채권펀드는 22억4000만 달러(약 2조5222억원)에서 12억5000만 달러(약 1조4075억원)로 줄었다. 미국 국채 가격 상승 등에 잘못 베팅한 결과였다. 지난해 이 펀드는 시중 채권펀드 가운데 가장 낮은 수익률(1% 이하)을 기록했다.


전문가들은 “개인의 능력과 감에 의존하는 그로스의 투자 방식엔 한계가 있다”고 지적한다. 최근 월가가 금융 투자 분석에 도입한 인공지능(AI)·머신러닝 기술 역시 ‘개인 투자가’의 신뢰도를 떨어뜨린 계기가 됐다는 지적이다.


박종연 IBK연금보험 증권운용부장은 “과거 경기가 안정적일 때 그로스는 3년 혹은 5년을 내다보는 장기적 전략을 세울 수 있었다. 하지만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계기로 시장 변동성이 커졌으며, 주변 투자가들이 (단기 투자 전략인) 롱숏 전략을 잇따라 도입했다”며 “(2010년 들어) 그로스 역시 롱숏 전략을 통해 변동성 장세에 대비하려 했다. 하지만 과거 성과를 과신한 나머지 잘못된 베팅을 지속해 투자에 실패했다”고 설명했다.


이날 인터뷰에서 그로스는 옛 주장을 선회하는 듯한 입장을 나타냈다. 그는 양적 완화 정책을 추진한 일본 중앙은행(BOJ)을 언급하며 “미국 또한 재정 적자를 2배 늘려서라도 경기를 부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각국 중앙은행이 통화 부양 조치를 취한다면 글로벌 자산 가격이 추락할 것”이라는 옛 주장(2013년)과 배치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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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공화당원인 그로스는 “고소득층에 대한 세금 인상을 지지한다”고 밝혔다. 특히 그는 ‘부유층 과세’를 주장한 최연소 민주당 하원의원 알렉산드리아 오카시오-코르테스를 언급하며 “고소득층 증세가 미국식 자본주의의 실패를 잡는 필연적 악”이라며 “현재의 소득 불균형이 지속한다면 투표소에서 혁명이 일어날 것”이라고 말했다.


그로스의 뒤를 이을 ‘21세기 채권왕’은 누구일까. 그로스는 “쉽게 나타나지 않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시장 흐름에 따라 움직이는 꼭두각시인 인덱스 펀드가 유행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지난 20년간 8억 달러(약 9000억원)의 기부금을 낸 그로스는 “가족 이름을 딴 자선 재단을 운영하며 노후를 보낼 계획”이라고 밝혔다.


조진형 기자 enish@joongang.co.kr


☞아스퍼거 증후군=만성 신경정신 질환으로, 언어와 사회 적응력 발달이 지연되는 증상이 나타난다. 타인과의 의사소통이 어렵고, 자신이 관심을 가진 분야에만 빠져드는 성향이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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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8.06원문링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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