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트로·뉴트로가 트렌드라더니 이젠 개화기까지? 밀레니얼 세대가 개화기 패션에 빠진 이유

[라이프]by 중앙일보

[江南人流]익선동·황리단길에 나타난 개화기 패션 열풍

개화기 의상 입고 ‘미스터 선샤인’ 주인공처럼 사진찍기


이번엔 개화기다. 몇 년 전 시작된 한복 체험이 이번엔 개화기 의상으로 넘어갔다. 아직 한복만큼 흔하게 거리에서 볼 정도는 아니지만, 서울 익선동과 전주 한옥마을 등에선 주말이면 개화기 의상을 입고 다니는 사람들로 북적인다. 지난해 말 인스타그램·유튜브 등 SNS를 통해 개화기 의상을 입은 사진과 영상이 인기를 끌더니 이젠 예능프로그램 방송에서도 앞다퉈 다루는 중이다. ‘복고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다’는 ‘뉴트로’(New+Retro의 합성어)의 바람을 타고 밀레니얼 세대들이 개화기 놀이에 빠져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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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0대, 한복 이어 개화기 의상에 빠져


지난 20일 오후 서울 종로구 익선동은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개화기로 돌아간 듯 했다. 지난해 인기를 끈 드라마 ‘미스터 선샤인’의 한 장면처럼 벨벳 원피스를 입고 진주목걸이, 망사가 드리워진 모자와 레이스 장갑을 낀 여성과 조끼에 서스펜더(멜빵)까지 갖춘 남성이 여럿이 눈에 띄었다. 이들의 모습은 옛 모습이 그대로 남아있는 동네 분위기와 꽤 잘 어우러졌다.


개화기 의상을 입고 사진찍기에 열중한 이들은 주로 20대 초반에서 30대 후반까지의 밀레니얼 세대다. 처음엔 친구나 연인과 함께 커플로 즐기는 20대 여성 위주였지만, 지금은 30~40대까지로 확장돼 가족 단위로 함께 즐기는 이들도 많아졌다. 이날 살구색 복고풍 원피스를 입고 한 손엔 양산까지 든 김지선(28)씨는 “최근 인스타그램에 개화기 의상 사진이 많이 올라와 친구와 함께 한 달 전부터 익선동 개화기 의상 체험을 계획했다”고 말했다. 어머니와 함께 익선동을 찾은 하주은(31)씨는 “지난해 초 엄마와 한 한복 체험이 재밌어 이번엔 개화기 의상으로 사진도 찍고 즐거운 시간을 보내려고 나왔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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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화기란 강화도 조약(1876년)을 시작으로 우리나라에 서양 문물이 들어온 시기를 말한다. 간호섭 홍익대 교수(섬유미술·패션디자인과)는 “당시는 우리 민족 사상 처음으로 의복의 형태가 파격적으로 바뀐 때”라고 말했다. 한복만 입어왔던 우리 민족에게 처음으로 양복이 소개된 시기로, 머리카락을 짧게 자르고 짧은 치마를 입는 서양 의상은 문화적 충격을 주기에 충분했다. 간 교수는 “거부감도 많았지만 당시 서양 음악·무용 등 엔터테인먼트 문화가 함께 유입되며 이를 기반으로 활동하는 예술가들이 대체로 양복를 입고 ‘모던보이’ ‘신여성’이란 별명을 얻으며 트렌드세터 또는 패셔니스타 역할을 했다”고 설명했다.


지금 밀레니얼 세대들이 빠져든 개화기 의상은 당시 의상을 그대로 재현한 것으로 보기엔 무리가 있다. 여자는 종아리까지 내려오는 복고풍 원피스를 기본으로 모자·양산·장갑 등 액세서리를 착용하고, 남자는 같은 원단으로 만든 재킷·조끼·바지에 서스펜더를 갖춰 입는 정도다. 정확한 역사적 고증보다는 영화·드라마 속 개화기 의상의 ‘느낌’을 내는 정도로 보는 게 맞다. 이들의 롤모델은 단연 ‘미스터 선샤인’ 속 주인공들이다. 여자는 주인공 고애신(김태리)과 글로리 호텔의 주인 쿠도히나(김민정)의 복장을, 남자는 주로 일본 유학생 출신 룸펜이었던 김희성(변요한)의 스타일을 따라한다. 경주에 있는 개화기 의상 대여점 ‘황남양장점’은 아예 매장 한쪽 벽에 커다란 태극기를 그려 놓고 소품으로 고애신이 들었던 총 모형을 비치했다. 이곳의 김은희 매니저는 “매장 안에 다른 컨셉트의 포토 스폿을 여럿 꾸며 놨는데, 총을 들고 태극기를 배경으로 사진 찍는 사람이 가장 많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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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익선동에서 시작해 지방으로 확산


개화기 의상 체험이 시작된 것은 지난해 부터다. 2018년 여름 익선동 한옥마을 인근에 ‘경성의복’이란 이름을 내건 개화기 의상 대여점이 생긴 후, SNS를 통해 입소문이 나면서 6개월만에 익선동에만 ‘종로부띠끄’ ‘경성스타일’ 등 4개의 대여점이 잇따라 생겼다. 대여비는 3시간에 3만원 선으로 싸지 않지만 인기가 높아, 올해 초엔 인천·경주·전주 등 지방에도 대여점이 생기며 빠른 속도로 퍼져 나가고 있다. 인천 차이나타운에서 자매가 함께 개화기 의상을 대여·판매하고 있는 ‘장의상실’ 장은주 사장은 “하루에도 몇 통씩 창업 문의 전화가 온다. 이달 전주에 ‘경성의상실’이라는 이름의 가맹점 두 곳을 낼 예정”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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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옥·궁 등 문화 유산 있는 지역이 중심


개화기 의상 대여점이 자리를 잡는 곳은 공통점이 있다. 한옥을 포함해 역사적으로 의미있는 건축물이나 적산가옥 등 근대 문화의 흔적이 남아있는 장소다. 고풍스러운 한옥의 정취를 느낄 수 있는 서울 익선동과 전주 한옥마을, 불국사·첨성대 등 역사 유산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경주, 과거 일본·중국·한국의 건축이 융합돼 있는 인천 차이나타운은 과거로의 여행을 떠나기 더없이 좋은 환경을 갖췄다. 익선동 의상대여점 ‘경성스타일’의 박준서 대표는 "이곳들을 배경 삼아 개화기 의상을 입고 사진을 찍으면 특별한 촬영 기술이 없어도 멋진 사진을 얻을 수 있다는 것도 장점"이라고 말했다.


인스타그램엔 이미 #개화기 #개화기컨셉 #개화기의상 등을 주요 키워드로 한 게시물이 3만5000개 가량 올라와 있다. 유튜브엔 ‘모던걸 메이크업’이란 이름으로 개화기 의상에 어울리는 화장법을 알려주는 영상도 속속 올라온다. 한복 체험이 한창이던 2015~16년 한복 나들이로 시작해 한복에 어울리는 헤어·메이크업까지 SNS 속 콘텐트가 확장된 것과 똑같은 양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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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험자들의 반응은 좋은 편이다. 부산에서 경주까지 왔다는 이지아(23)씨는”마치 영화 속 주인공이 된 것 같은 느낌을 준다“며 ”사진도 더 예쁘게 나오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익선동에서 만난 차이진(30)씨는 “망사 달린 모자나 레이스 장갑 등 화려한 장신구를 해볼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라며 수줍게 웃었다.


예비 부부의 셀프 웨딩 촬영용으로도 인기다. 장은주 장의상실 사장은 “셀프 웨딩 촬영을 위해 3~4벌을 1박2일씩 빌리는 손님이 꽤 많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최근 개화기 컨셉트로 웨딩 촬영을 한 30대 직장인 김민씨는 “1~2년 전엔 좋아하는 축구·야구팀 유니폼을 입고 커플 사진을 찍는 게 유행이었는데, 올해는 개화기 의상이 인기"라며 "옛날 사진 같은 느낌이 오히려 세련돼 보인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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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롯데월드는 지난 3월 초부터 시작한 봄 시즌 축제의 테마를 아예 ‘개화기’로 잡았다. 꽃이 피는 시기(開花期)와 새로운 문화가 열리는 시기(開化期)라는 중의적 의미를 담은 제목이다. 벚꽃 개화 시기에 맞춰 매직아일랜드 일대를 조선 근대기 거리 풍으로 꾸미고 개화기 의상 대여점을 설치했다. 롯데월드 측은 “뉴트로 트렌드를 반영해 과거로의 여행을 경험할 수 있는 체험존을 마련한 것”이라고 축제 취지를 설명했다.

밀레니얼 세대가 개화기 의상에 빠지는 이유


트렌드 분석가인 이향은 성신여대 교수(서비스·디자인공학과)는 "개화기 의상이 지금의 뉴트로 트렌드와 절묘하게 맞아 떨어진다"고 봤다. '흔치 않은 고급스러움'을 향유하고 싶은 밀레니얼 세대에 개화기 의상이 가진 고급스러운 빈티지 스타일이 매력적으로 느껴질 수 밖에 없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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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석·레이스로 장식한 화려한 가방은 개화기 코스튬의 필수 액세서리. [황남양장점]

이미지 컨설턴트 강진주 소장은 "사회 전반으로 퍼진 레트로 트렌드를 배경으로 드라마 '미스터 선샤인'이 새로운 복고 스타일을 제시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드라마 이전에 이미 ‘사의찬미’ ‘암살’ 등의 영화를 통해 개화기 의상을 보아온 밀레니얼 세대가 이 의상을 친숙하면서도 독특하다고 느끼고, 자신의 개성을 드러내고 싶어하는 욕구를 충족시킨다는 얘기다. 강 소장은 “게다가 영화·드라마 속 인물의 캐릭터가 모두 ‘영웅’의 이미지를 가졌다”며 “좋은 이미지때문에라도 이를 입고 SNS에 올리고 싶어한다”고 말했다. 간 교수 역시 "개화기 의상은 파티하듯 입고 즐기는 재미에 SNS 사진용으로도 훌륭한 소재가 돼 앞으로도 한동안 인기를 누릴 것으로 보인다"고 전망했다.

글=윤경희 기자 annie@joongang.co.kr 사진=각 업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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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8.06원문링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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