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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컬처 ]

성수대교 붕괴된 94년, 중학생 은희의 세계도 무너졌다

by중앙일보

29일 개봉 '벌새' 장편데뷔 김보라 감독

성수대교 붕괴한 94년 자전적 성장담

해외서도 공감…베를린영화제 등 25관왕

박찬욱 감독 "속히 차기작 내놓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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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삶에서 영화적으로 할 얘기가 많은 시기가 1994년 중학생 시절이었어요. 가장 먼저 성수대교 붕괴가 떠올랐죠. 충격적이고, 아팠어요. 저뿐 아니라 모두에게 그랬을 거예요. 그 분절의 이미지가 열네 살 제 마음 속 관계의 붕괴, 학교 시스템의 붕괴와도 연결됐죠.” 29일 장편 데뷔작 ‘벌새’를 개봉하는 김보라(38) 감독의 말이다. 개봉 전 서울 동작구 아트나인 극장에서 만난 그는 이 영화를 “1994년이란 시대의 공기 안에서 펼쳐진 중학교 1학년생 은희(박지후)의 감정적 지형도”라 요약했다.



대치동 떡집 막내딸에 세계가 공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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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강남 대치동 떡집 막내딸인 은희는 집에서는 가부장적 분위기에, 학교에선 ‘날라리’란 꼬리표에 숨 막힌다. 첫사랑을 하고, 눈만 마주쳐도 깔깔대던 단짝과 절교할 듯 싸우기도 하는 소소한 일상사는 성수대교가 무너진 날 크게 흔들린다. 1초에 90번 날갯짓을 하는 작은 새 벌새처럼 작은 순간들이 촘촘히 쌓여 큰 시대상을 이룬다. 실제 대치동 떡집 막내딸이었던 감독 자신의 경험에서 출발한 이런 이야기가 국내외 영화제에서 공감을 얻었다.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 넷팩상을 비롯, 올해 베를린영화제 제너레이션 14+ 부문 대상, 뉴욕 트라이베카영화제 3관왕(국제경쟁대상‧여우주연상‧촬영상) 등 25관왕을 달성했다. 영화 ‘피아노’의 제인 캠피온 감독은 “놀라울 정도로 섬세하며 매우 성숙하다”고 평했고, ‘벌새’에 크게 매료된 박찬욱 감독은 “서둘러 속편을 내놓으라”고 했다.



박찬욱 감독 "서둘러 속편 내놓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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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 국내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내 이야기 같다”는 호평이 많다.


A : “유년시절의 감정에 공감하고 시적인 분위기를 좋아해주셨다. 성수대교 붕괴는 각국 재난으로 치환해서 해석했다. 이탈리아는 지난해 제노바 다리가 무너졌고, 쓰나미‧지진이 많은 일본의 어떤 관객은 울면서 자기 나라 재난을 떠올렸다. 단순히 여중생의 귀여운 성장담이 아니라 한 인간이 자유롭고 싶은 의지, 날아가고 싶은 여정 안에 어떤 난관을 만나고 어떻게 사랑하며 ‘관계’를 통해 자신의 우주를 확장해 가는지, 보편적이고 원형적인 주제로 봐주는 시각이 반가웠다.”


Q : 8년 전 단편 ‘리코더 시험’에서도 ‘은희’라는 방앗간 집 아홉 살 소녀가 리코더 시험을 잘 봐서 칭찬받고 싶어 하는 모습을 그렸는데.


A : “연결된 이야기 맞다. 엄마가 ‘떡집 좀 그만 우려먹으라’ 하시더라.(웃음) ‘벌새’는 중학생이 됐으니까 세계가 더 확장됐달까. 어른들도 ‘다 컸다’ ‘서울대 가라’는 등 사회적 압박을 주기 시작하는 시기다. 내가 살았던 대치동에선 끊임없이 잘 사는 아이, 못사는 아이를 나누고 서로의 제품 브랜드로 비교해 상대적 빈곤감에 시달렸다. 그런 내 유년기가 녹아있지만, 보편적인 지점을 건드리기 위해 ‘나를 빼는’ 과정을 거듭했다.”



각본·편집부터 퍼즐 맞추듯 흐름 고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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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에 침잠하면 감상적이고 신파가 돼요. 구체적인 은희의 이야기가 나만이 아니라 모두의 기억과 현재를 관통하길 바랐습니다.” 그는 이를 위해 시나리오를 영문 번역까지 해 철저한 모니터링을 거쳤다. 아시아‧유럽‧미국 친구들, 연령대도 중학생부터 60대 후반 교수까지 다양한 지인들에 보여준 뒤 어떤 부분이 와 닿고 또 이해하기 어려운지 의견을 듣고 수정해나갔다. 편집과정에서도 영화 속 160여개 장면을 그림카드로 만들어 전후 순서를 바꾸며 새롭게 파생되는 의미와 리듬을 세밀하게 고민했다. 이렇게 편집에만 열 달을 매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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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극 중 친구 지숙(박서윤)이 은희에게 “너는 니 생각만 한다”고 말하는 장면을 가장 좋아한다고 꼽았다. “은희라는 주인공을 객관적 거리를 두고 보여주는 장면이다. 은희뿐 아니라 등장인물 각자에게 저마다의 우주, 자기 이야기가 있다는 걸 말하고 싶었다”고 했다.



1994년, 성수대교의 공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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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 아파트에 사는 은희가 집을 착각하곤 열리지 않는 문 때문에 울먹이는 오프닝 장면부터 인상적이다.


A : “영화 속 어디에 붙여놔도 어울릴 만한 꿈결 같은 장면이다. ‘벌새’가 하려는 얘기를 압축했다. 집이 있는데도 집을 찾지 못하던 아이가 진짜 자신의 자리, ‘집’을 찾게 되는 여정 말이다. 초인종을 눌렀을 때 누가 열어주지 않아도 그냥 ‘지금 집에 아무도 없나보다’라며 큰 생각을 않는 아이가 있는 반면, 자기를 버렸을지 모른다며 집을 잘못 찾았던 사실조차 엄마한테 말하지 않고 불안과 공포를 감추는 아이도 있다. 나 역시 어릴 적 집 호수를 잘못 찾아간 적이 있다. 모든 게 비슷비슷한 아파트에선 흔히 있는 일이잖나. 카메라가 줌아웃되면서 아파트단지의 이 많은 사람들도 은희 같은 각자의 우주가 있으리라, 암시하고 싶었다.”


Q : 성수대교가 붕괴된 1994년이란 배경 때문에 2시간 넘는 상영시간 내내 마음을 졸이며 봤다.


A : “반가운 반응이다. 일상을 그리는데 재난이 떠오르길 의도했다. 가족의 식사장면조차 뭔가 일이 일어날 것 같은 느낌으로. 재난은 일상에서 일어나지 않나. 어떻게 다리가 무너질 줄 알았겠나. 서울올림픽 이후 서구에 인정받으려 열망하고, 뭐든 빨리 짓고 성장하면서 모두의 마음에 구멍이 생겼다. 도사린 균열들이 이빨을 드러내고 끝내 성수대교와 삼풍백화점이 무너졌고, 몇 년 후엔 IMF 외환위기가 터졌다. 우리가 무슨 짓을 한 건지, 각성한 계기였다.”


은희는 부모의 부부싸움 후 소파 밑에서 깨진 유리조각을 발견한다. 김 감독은 “봉합되지 않은 분열의 조각이 집안 곳곳에 유령처럼 떠도는 이미지를 상상했다”고 했다.



외삼촌·김일성·그 사람의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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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이 아는 사람들 중에 속마음을 아는 사람은 몇 명이나 될까요?” 한문학원 교사 영지(김새벽)는 은희에게 생전 처음 이런 고민거리를 던진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마음의 깊이만큼, 아픔은 더 커져간다. 이번 영화로 트라이베카영화제 여우주연상을 받은 올해 열여섯 살 주연 박지후의 연기가 섬세하다.


Q : 영화엔 세 번의 다른 죽음이 등장한다.


A : “죽음은 상실이지만 과거의 것들과 작별하고 새롭게 탄생하는 의미도 있다. 죽음은 예고 없이 의외로 자주 찾아온다. 처음 외삼촌의 장례식장에서 남자친구 연락만 기다리던 은희는 진짜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서야 (오빠 잃은) 엄마의 심정을 묻는다. 자기만 생각하던 틀에서 벗어나 처음 엄마와 연결된다. 어둠이 있으면 빛이 있듯이. 김일성의 죽음의 경우 한 시대가 저무는 사건으로 그렸다.”



여성 눈으로 본 전쟁영화·SF 하고파


시나리오 초고를 2013년 완성한 뒤 개봉까지 5년이 걸렸다. 동국대 영화과를 거쳐 미국 뉴욕 컬럼비아대학원 유학을 다녀온 뒤 첫 장편 데뷔까지 시간은 금세 흘렀다. 여러 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영화진흥위원회‧선댄스영화제 등 제작지원을 따내며 3억이란 제작비를 모았다.


“이 영화를 너무 사랑해서 혼자 너무 치열한 것 같아 다른 제작진한테도 항상 조금 민망했다”는 그는 “예산도 적은데 왜 현대물을 하지 않고 과거 시대구현까지 하느냔 지적도 들었지만, 단편 ‘리코더 시험’ 때 직접 발품 팔아 1988년을 구현했던 경험이 큰 힘이 됐다”고 돌이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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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개봉에 맞춰 원래 세 시간 넘는 분량이던 오리지널 시나리오집도 나온다. 이 책에 에세이를 수록한 그래픽노블 작가 엘리슨 벡델(영화 성평등 테스트 '벡델테스트' 창시자)은 해외 영화제에서 ‘벌새’를 접하곤 “(영화에서 자주 소외돼온) 소녀의 삶이자, 온전한 한 인간에 대한 대서사시”라 감탄했다. 차기작에 대해 김 감독은 “‘벌새’가 은희의 눈으로 본 서사시였듯, 여성의 눈으로 개인의 역사와 사회 맥락을 다룬 전쟁영화‧SF도 만들고 싶다”고 했다. “여성은 할 수 없다고 박아둔 남성 중심적이고 큰 자본이 드는 장르들이죠. 하지만 전쟁은 스펙터클만이 아니거든요. 전쟁으로 인한 마음의 폐허를 그려보고 싶습니다.”


나원정 기자 na.wonje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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