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내가 이런 몹쓸 병에…" 자꾸 그 이유를 캐는 환자들

[라이프]by 중앙일보


[더,오래] 조용수의 코드클리어(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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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쉽게 받아들이는 사람은 없다. 운이 나빴다며 덤덤히 돌아서는 사람도 없다. 어떻게든 죽음의 원인을 찾아 책임을 묻는다. 설령 그게 사실이 아닐지라도. 단순한 사고라도 누군가를 탓해야 끝이 난다. 응급실에서는 심지어 그 대상이 자기 자신이 되는 경우도 흔하다.


"나 때문이에요. 내가 화내지 않았어야 해요. 그랬다면 싸우지도 않았을 것이고, 그가 문을 박차고 나가는 일도 없었을 거예요. 그이가 이렇게 된 건 모두 내 잘못이에요."


교통사고 환자였다. 병원에 왔을 때는 이미 손 쓸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뒤늦게 도착한 아내는 싸늘한 주검 앞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곤 자기 자신을 저주했다. 괜한 싸움으로 밤늦게 남편이 차를 몰고 나가게 했다며.


엄밀히 말해, 부부싸움과 교통사고 사이에는 어떤 연관성도 없다. 싸움은 싸움이고 사고는 사고다. 졸음운전인지 신호 위반인지 그냥 상대 차가 와서 박았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결코 싸움 때문에 일어난 사건은 아니라는 것이다. 싸우지 않아도 사고는 날 수 있고, 싸운다고 꼭 사고가 나는 것도 아니다. 사고와 싸움은 시간적 선후 관계일 뿐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죽음의 충격 때문인지, 너무나 자주 선후 관계를 인과 관계로 혼동한다. 평생 지울 수 없는 큰 후회가 남게 되는 것이다. 안타까운 일이다.


"단순한 교통사고입니다.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굳이 따지자면 운이 없었을 따름이죠. 당신 책임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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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급실에서 사고로 죽은 사람을 수도 없이 많이 보았다. 그중에 사연 없는 죽음은 하나도 없었다. 죽음 앞에선 누구나 죄인이다. 누구나 후회를 한다. 크고 작은 책임을 느끼지 않은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누구나 그렇다. 그러니 너무 자신을 탓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당신이 특별한 잘못을 저질러서 일어난 사고가 아니다. 결코 아니다.


"저는 어쩌다 이런 몹쓸 병에 걸린 걸까요? 가난에서 벗어나려고 앞만 보고 달려왔는데. 아등바등 살았는데. 그러지 말았어야 했어. 그동안 가족을 살피지 않았던 벌을 받는 것일 테죠?"


정정부터 하자. 벌이 아니라 병이다. 젊은 날을 반추하는 걸 말릴 생각은 없다. 하지만 병에 걸린 원인을 자신의 삶에서 찾을 필요는 없다. 죽어서 염라 앞에 서기 전에는, 하늘이 먼저 처벌을 내리는 경우는 없다. 질병은 눈 없는 장님이라 사람을 가리지 않는 것뿐이다.


평생을 착하게 살아도 병에 걸리긴 매한가지다. 50년간 담배를 입에 물어도 백 살 넘게 장수하는 사람도 있고, 일생을 금욕하며 살아도 젊은 날에 단명하는 사람도 있다. 병에 걸리는 건 카지노의 룰렛과도 같다. 하필 내 칸에 구슬이 멈춘 것뿐이다. 당신이 병에 걸린 건, 인생이란 길을 걷다 우연히 질병을 마주친 것에 불과하다.


모든 게 우연이라면 왜 나한테만 이런 일이 생기느냐고 원망할지 모르겠다. 어쩔 수 없다. 똑같이 로또를 사도 누군가는 당첨되고 누군가는 떨어지니까. 질병은 태생이 불공평하다. 어느 날 갑자기 찾아든 불청객이다. 누구에게나 일어나는 일이고, 이번엔 하필 내 차례일 뿐이다. 그러니 너무 자기 자신을 몰아붙이지 않았으면 좋겠다. 당신의 삶이 잘못되어 이 자리에 서 있는 게 아니다. 결코 아니다.


"모든 게 우연이라면 건강을 위한 어떤 노력도 무의미한가요?"


그런 건 아니다. 룰렛을 돌리더라도 37개 중 하나의 숫자를 고르는 것과 두세 개의 숫자를 고르는 건 당첨 확률이 다르니까. 질병 없이 건강하게 살 수 있는 가능성을 높이는 건 중요하다.


모든 걸 운명이나 우연에 맡기고 무기력하게 살라는 얘기는 아니다. 어디까지나 선후 관계를 인과관계로 혼동하여 자책하지 말고, 병에 걸렸다고 자기 인생을 부정하지 말란 얘기지, 모든 일에 체념하라는 얘기가 아니다. 아무리 열심히 노력해도 재수 없게 낙첨하는 경우는 반드시 일어난단 얘기이고. 이때 너무 자기 자신을 몰아붙이지 않았으면 한다는 얘기이다. 옆에서 보기에 너무 안타까워서 하는 얘기이고.


조용수 전남대학교병원 응급의학과 조교수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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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8.06원문링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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