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되면 왔다가 새벽 6시 사라진다···공사장 찾는 캠핑카 정체

[이슈]by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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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노상 방뇨는 어쩔 수 없다. 밤새 도로 위에서 일하다 볼일을 보고 싶어도 공사장 인근에 화장실 찾기가 어렵다. 지하철역사나 인근 건물은 닫혀 있다. 화장실을 찾으려고 공사장을 멀리 떠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작업복을 갈아입을 곳도 없어 공사장 구석에서 후다닥 입는다. (현장 작업자 A씨)


#2. 손을 씻을 곳이 없다. 공사용수로 먼지를 씻어내는 게 전부다. 아니면 물티슈로 쓱쓱 닦는다. 손에 묻은 검댕으로 티슈는 금세 시꺼메진다. 그 손으로 야참으로 준 빵을 그냥 툭 떼서 먹는다. 간식을 먹을 곳도 마땅치 않아 길바닥을 테이블 삼아 주저앉아 먹는다. (현장 작업자 B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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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 작업자 43.7% “화장실 없어서 노상방뇨”


지난 18일 밤 서울 지하철 문래역과 영등포구청역 사이의 도로에 캠핑카 한 대가 등장했다. 밤새 한 자리를 지키던 캠핑카는 오전 6시가 되기 전에 사라졌다. 다음날인 19일 밤 캠핑카는 다시 같은 자리에 나타났다.


밤마다 도심 한복판에 나타난 캠핑카의 정체는 바로 상수도관 교체 공사 건설 노동자들을 위한 것이다. 이곳에는 지난여름 ‘빨간 수돗물’ 사태가 있었던 문래동의 노후 상수도관 교체 공사가 이뤄지고 있었다. 현장에서 일하는 작업자들이 화장실 등 편의시설을 쓸 수 있도록 캠핑카를 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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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현장 작업자들은 화장실 가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강남역 화장실 사건 이후에 개방형 화장실이 줄어든 탓도 영향을 줬다. 서울시설공단이 지난 8월 현장 노동자 39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이들의 43.6%는 ‘어두운 곳에서 용변을 해결한다’고 답했다. 이들이 가장 필요한 시설로 꼽은 건 바로 ‘이동식 화장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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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에서 이런 어려움을 보고 서울시설공단 한 직원이 아이디어를 냈다. 이인엽 시설공단 공사감독처 과장은 “캠핑카 안에 화장실 등 시설이 갖춰져 있어 이를 공사 현장에 도입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2년여 전부터 했었다. 유튜브 등을 찾아보며 해외 사례도 검토했다”며 “아이디어를 냈더니 주변 반응이 좋아 적극적으로 추진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사실 공사장에는 화장실 등 휴게공간을 두는 것을 법으로 규정하고 있다. ‘건설근로자의 고용개선 등에 관한 법률’에 따르면 1억원 이상 건설공사의 사업주는 현장에 화장실·식당·탈의실 등의 시설을 설치해야 한다. 이를 지키지 않을 때는 500만원의 과태료를 물게 된다. 하지만 사업 규모가 작을 때는 관행적으로 불편을 감수해왔다. 특히 상수도관 교체 사업처럼 이동을 하면서 작업하기 때문에 화장실을 설치하기도 어려움이 따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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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원순 “노동자 존중 아이디어…확대 실시를”


캠핑카는 이런 문제를 한 번에 해결할 수 있었다. 이 과장의 아이디어는 곧바로 채택돼 쌍문동 배급수관 정비 공사와 문래동 송배수관 정비 공사 현장 두 곳에서 시범 운영했다. 캠핑카는 민간 업체에서 임대했다. 캠핑카에는 화장실뿐 아니라 사무를 볼 수 있게 테이블과 프린트 등 사무공간도 갖췄다. 그동안에는 마땅한 공간이 없어 현장에서 작업 회의를 했다. 도면을 펼쳐 볼 공간도 없어 현장에 있는 작업자들의 자동차 보닛 위를 활용하기도 했다.


캠핑카를 운영하는데는 한 곳당 월 400만원 정도가 든다. 임대료 300만원, 운영비 100만원 수준이다. 운영비에는 기름값, 화장실 등 청소비, 캠핑카를 운전하는 인건비 등이 포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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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아이디어를 들은 박원순 서울시장도 크게 반색했다. 지난달 31일 조성일 서울시설공단은 취임 100일을 맞아 박원순 시장에게 100일 업무보고를 했다. 조 이사장은 이 자리에서 캠핑카 아이디어를 보고했다. 박 시장은 “노동자들의 인권과 노동권을 보장해주는 좋은 아이디어다”라며 서울 전역에 운영할 것을 지시했다.


서울시설공단은 앞으로 캠핑카를 다양한 건설 현장에 도입할 계획이다. 제삼차 서울시설공단 상수도2팀장은 “임시 운영한 캠핑카는 건설 현장용이 아니라 필요 없는 시설도 포함돼 있다. 화장실 크기를 더 넓게 하는 등 근로자들에게 더 편리하도록 개조된 캠핑카를 쓸 수 있도록 할 것”이라며 “여러 대수가 늘어나면 예산도 더 줄어들 것이다”고 말했다.


박해리 기자 park.hael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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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8.06원문링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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