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트병에 소변 보는 英택배기사···'칸의 거장'이 그린 착취현장

[컬처]by 중앙일보

영국 사회고발 83세 거장 켄 로치 감독

신작 '미안해요, 리키'서 긱이코노미 비판

보수 세력에 "조국 혐오한다" 비난 받기도

칸 황금종려 2번 수상에도 투자 안 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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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근 카드도, 실적에 시달릴 필요도 없다. 임금 대신 택배 건당 수수료를 챙기며, 일한 만큼 벌 수 있다는 달콤한 조건. 두 아이의 아빠 리키(크리스 히친)는 한 택배 회사와 개인 사업자로 택배 기사 계약을 맺는다.


6개월만 버티면 빚도 갚고 내 집 마련도 가능하리란 단꿈도 잠시, 당장 필요한 돈이 한두 푼이 아니다. 택배 차량 구매비만 1만4000파운드(약 2100만원), 회사 차를 쓰면 하루 65파운드씩 내야 한다. 사정상 하루라도 쉬는 날엔 대리기사 고용비를 부담해야 한다. 강도라도 당하면 제 몸보다 물어줄 돈, 벌점이 더 걱정이다.


“서명하면 개인사업자가 되는 겁니다. 자기 운명의 주인인 겁니다.” 택배 회사 매니저의 이 말이 ‘최소한의 노동권과 생명권도 회사가 책임지지 않겠다’는 의미란 걸 그는 너무 늦게 깨닫는다.



노장 은퇴 번복하게 만든 현실


아일랜드 독립투쟁을 그린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2006), 영국 복지제도의 맹점을 파고든 ‘나, 다니엘 블레이크’(2016)로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두 차례나 수상한 83세 영국 거장 켄 로치 감독이 이번엔 긱(GIG) 이코노미에 눈을 돌렸다. 19일 개봉한 신작 ‘미안해요, 리키’는 신자유주의 속에 급증한 긱 이코노미, 즉 정규직보다 계약직‧임시직 채용이 늘어난 경제상황이 어떻게 평범한 가족의 행복을 파괴하는지 살갗에 와 닿도록 보여준다. ‘기생충’과 함께 올해 칸영화제 경쟁부문에 초청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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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작으로 50여년 영화인생에 종지부를 찍으려던 그가 은퇴를 번복하고 만든 영화다. 전작 ‘나, 다니엘 블레이크’로 복지제도의 사각지대를 고발해 의회 논의까지 끌어낸 그에게 당시 조사차 푸드뱅크(식품을 기탁받아 소외계층에 지원하는 복지 서비스 단체)를 찾았던 경험은 강렬했다. 통조림 하나라도 더 받기 위해 반나절 넘게 줄을 서는 빈곤층 대다수가 이 긱 이코노미 노동자였다. 영화사와 사전 인터뷰에서 그는 이것이 “새로운 형태의 착취”라 설명했다.



"택배기사, 기술이 낳은 노동 착취"


리키와 같은 택배기사가 한 예다. 장보기조차 클릭 몇 번이면 되는 시대에 가장 친숙한 직업이다. 켄 로치 감독은 택배기사의 노동착취야말로 “현대기술과 함께 대두한 완전히 새로운 문제”라며 “위성을 이용한 기술장치가 있어서 주문한 상품이 어디쯤 오고 있는지, 예상 도착 시각은 언제인지 고객이 정확히 알 수 있게 됐다. 정교하게 짜인 시스템에 맞춰서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배송하다 보면 택배기사는 녹초가 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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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사업자라 ‘출퇴근이 자유롭다’는 건 허울 좋은 말뿐이다. 공장 같은 택배 물류 터미널에선 시간이 금이다. 계약 해지당하지 않으려면 새벽같이 물건을 받아 배달해야 한다. ‘배송 위치 추적 기술’은 화장실 갈 틈도 주지 않아 페트병에 소변을 봐야 한다.


리키의 아내 애비도 노인‧장애인 돌봄 노동자다. 정해진 보수 없이 임시직 계약으로 방문한 가정 건당 시급을 받는다. 아침 7시30분부터 오후 9시까지. 거리가 뚝뚝 떨어진 집들을 오가야 하지만 교통비가 자기 부담인 건 물론이고, 이동시간은 보수에 쳐주지도 않는다. 이런 내용은 제작진이 실상을 조사해 반영했다.



열심히 일할수록 불행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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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의 더 나은 미래를 위해 택한 일이지만, 부모가 과로에 시달리는 동안 아직 10대인 자식들은 방치되고 멀어져간다. 그 과정이 너무 있음 직해서 공포스러울 지경이다. 켄 로치 감독이 20년지기 각본가 폴 래버티와 직접 조사해서 투영한 현실이다. 영국의 현실이지만, 낯설지만은 않다.


“애비 같은 돌봄 노동자들은 지자체가 에이전시나 민간 의료 회사를 통해 하청 계약을 맺습니다. 당국은 이들이 제시한 낮은 입찰가가 그 일을 하는 사람들의 착취에 기반하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모른 척해요.” 켄 로치 감독은 말한다. 보다 신속한 배송을 위해 누군가는 14시간 내리 힘겹게 택배 차량을 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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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원제인 ‘쏘리 위 미스드 유(Sorry We Missed You)’는 ‘죄송합니다. 우리가 당신을 놓쳤네요’란 뜻이다. 원래 택배 수신자가 부재중일 때 남기는 쪽지 속 문구지만, 자본주의의 효율성을 추구하며 우리가 놓쳐버린, 미안해야 할 대상은 누구일지 중의적인 질문을 던진다.



극중 삶과 닮은꼴 배우 캐스팅


연기경험보단 영화 속 캐릭터에 가까운 삶의 경험을 더 중시해서 비전문 배우도 자주 기용한다는 그다. 이번 영화 리키 역의 크리스 히친도 실제 20년간 배관공이자 리키 같은 개인 사업자로 일했다. 주택융자금을 거의 다 갚은 마흔즈음 아내에게 허락받고 연기 꿈에 다가섰다. 이번 오디션 합격 전화도 보일러 수리일 중에 받았단다. 애비 역의 데비 허니우드 역시 남편이 극 중 리키처럼 2008년 세계 금융 위기로 인한 노던록은행 파산으로 정리해고 됐다. 자신도 보조교사로 일하며 10대 아들을 키우다 마흔 들어 TV 조단역 배우로 출발했다. 택배 물류 터미널 장면의 기사들은 대다수가 실제 전‧현직 택배기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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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등장인물들처럼 매 장면의 상황을 촬영 직전 전달받곤 했던 이들이 이처럼 생생하게 연기해낸 비법은 뭘까. “실제 사건 순서대로 찍으면 그 상황에서 어떤 기분일지 상상할 필요가 없어요. 가슴속에 그 기억이 각인되니까요.” 켄 로치 감독의 귀띔이다.



"왜 조국 혐오하냐" 비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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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부터 영국 국영방송 BBC 소속 감독 등으로 연출하며 빈곤층과 노동자 등 소외계층의 현실을 품어 안아 ‘블루칼라의 시인’이라 불렸던 그다. 현실에 기초한 사실적인 연출방식으로 극찬과 논란이 엇갈렸다. 처음 노숙자 문제를 수면위로 끄집어낸 BBC 수요극장 영화 ‘캐시, 집으로 돌아오다’(1966)는 가디언이 “가장 성공적인 사회 개혁 TV 영화”라 극찬하고 감독이 정부에 초청받는 등 화제를 모았지만 보수세력엔 “영화냐, 선동이냐” 공격받았다. 아일랜드 독립전쟁을 그린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이 칸영화제를 비롯해 세계적으로 주목받았을 때 보수성향 매체 ‘데일리메일’은 “왜 자신의 조국을 혐오하느냐”라 비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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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생애 두 번 받은 세계 9명뿐인 감독들(벨기에의 다르덴 형제, 오스트리아의 미카엘 하네케, 미국의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 등) 중 하나지만, 강한 진보성향으로 이름난 탓에 영국에선 여전히 제작비 조달이 힘들단다.



"옥스퍼드대서 상류층 본모습 알았다"


사실 켄 로치 감독은 보수당을 지지하는 노동자계층 아버지에게서 자랐다. 아홉 형제 중 특출났던 그는 옥스퍼드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했다. 오히려 이곳에서 상류층의 본모습을 알았다. “그들(동문)은 세상을 물려받아 자신들이 지배하게 될 거라고 생각했고 실제로 그랬습니다.” 3년 전 다큐멘터리 ‘켄 로치의 삶과 영화’(감독 루이즈 오스몬드)에서 털어놓은 얘기다. 이후 극단에서 배우로 활동하다 방송·영화로 옮겨 직접 글을 쓰고 연출하며 자신의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이들을 대변하는 데에 매진해왔다. 1977년엔 대영제국훈장 수훈자에 지명됐지만 거절했다. 대영제국이란 이름이 착취와 정복의 기념비란 이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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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영화를 비롯해 그의 대표작 중엔 아이의 시선, 어른의 책임감을 그린 게 많다. 가난한 탄광촌 소년과 그가 길들인 매의 이야기로 광산에 대물림된 비극을 가슴 시리게 고발한 ‘케스’(1968)가 한 예다. 실제 그는 자동차 사고로 다섯 살이던 둘째 아들을 잃은 적이 있다. “자식을 잃으면 전혀 다른 삶을 살게 되죠. 가슴에 돌 하나가 박혀 사라지질 않아요.” 어쩌면, 떠나보낸 아이에게 보여주지 못한, 살아남은 세대를 위한 더 나은 세상을 강렬하게 갈망해온 계기 아닐까.



자식 가슴에 묻고 어느덧 80대 노장


인생의 절반 넘게 영화를 만들며 현실의 낮은 곳에 깃들었던 그는 어느덧 자칭 “계속 약 먹고 약 바르고 (촬영하다) 안 쓰러지려면 필요한 것이 많은” 80대 노장이 됐다. 그럼에도 그의 은퇴는 또다시 번복되지 않을까. 그의 말대로 “삶은 사람들 간에 형성된 연결고리의 흔적”이고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에 관심을 두면 하루하루의 드라마를 완성할 수 있”으니까. 그의 다음 영화를 기다리는 까닭이다.


나원정 기자 na.wonje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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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8.06원문링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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