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대신 들어줘"···귀 큰 토끼 '베니' 그린 청력장애인 작가

[컬처]by 중앙일보

귀 큰 토끼 '베니' 그리는 청각장애인 구경선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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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 세상은 친절하다. 하와이의 캄캄한 밤, 혼자 숙소로 돌아가는 긴장된 저자를 위해 운전자들이 일부러 밝게 빛을 비춰준다. 방콕에서는 수상버스 티켓 판매원이 그가 길을 잃을까 매표소에서 나와 버스 선착장까지 안내한다. 쇼핑몰의 직원은 무거운 짐을 선뜻 맡아 보관해주고, 레스토랑 웨이터는 대뜸 악수를 청하며 엄지손가락을 치켜든다.


이달 나온 책『거기에 가면 좋은 일이 생길 거예요』는 구경선 작가가 글과 그림으로 기록한 여행의 기억이다. 태국, 하와이, 프랑스에서 만난 사람들과 소소한 여행 이야기가 들어있다. 책 속 그림의 주인공은 귀가 큰 토끼. 두 살에 열병을 앓고 청력을 잃어버린 구 작가의 캐릭터 베니다. 구 작가는 2008년부터 싸이월드 스킨, 카카오톡 이모티콘에 베니를 그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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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신저로 인터뷰에 응한 구 작가는 “운이 좋게 친절한 사람들을 만났다”고 했다. 또 “코로나19로 세계 여행을 못 하게 된 시절에 책이 나오게 돼 조심스럽다”고 덧붙였다.


“제가 운이 좋은 건지, 혼자 다녀서 그런 것인지, 장애인이라 그런 것인지 모르겠지만 정말 좋은 사람을 많이 만났어요.” 구 작가는 낯선 외국인을 만나면 제일 먼저 “나는 청각장애인”이라고 알린다. “청각장애인은 겉으로 봐서 모르잖아요. 그래서 오해를 많이 받아요. 악의가 없는데도 상대방의 기분을 나쁘게 할 때도 많고요.” 그래서 그는 먼저 청각장애인이라 알리는 것을 당연한 일이라 생각한다. 구 작가는 “여행을 다니면서 청각장애인이라 알리면 사람들은 더욱 친절해졌다”고 했다. 도도하던 파리지앵도 열정적인 표정으로 몇번이고 길을 알려주며 두 엄지손가락을 번쩍 치켜들었다.


“물론 좋은 일만 있었던 건 아니에요. 인종차별도 당하고 당황스러웠던 적이 있었죠. 한국 카페에서는 식사가 안 끝났는데 상을 치워버리는 황당한 경험도 했어요. 친구와 수화로 수다 떠는 중에 일어난 일이죠. 저의 청각 장애인 친구들은 더 말도 안 되는 일도 많이 겪고요.” 베니의 밝은 웃음, 따뜻한 이야기들은 구 작가가 속상한 기억을 떨쳐버린 결과다. “나쁜 것보다 좋은 경험을 더 기억하고 싶어요. 속상해하기엔 제가 너무 아까워요!”


이번이 그의 네 번째 책이다. 희망찬 베니의 이야기로 『그래도 괜찮은 하루』, 구 작가와 엄마의 이야기가 담긴 『엄마, 오늘도 사랑해』, 『베니의 컬러링 일기』에 이어 나왔다. 세 권을 합쳐 20만 독자를 만난 구 작가는 “생각보다 사랑을 받아서 얼떨떨했다”고 했다.


두 살에 청력을 잃은 뒤 그의 눈앞에는 새로운 세계가 열렸다. “책을 읽으면 드넓은 세상이 눈앞에 영화처럼 펼쳐졌다”고 했다. 중학교 때 친구가 권해준 천계영 만화책 『언플러그드 보이』가 인생을 바꿨다. “처음에는 주인공 ‘이락’의 잘생김에 두근두근했어요. 저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모르니까 시각적으로 더 보나 봐요. 아무 생각을 안 하고 몰입할 수 있었죠. 그런 작품을 만들고 싶어졌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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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였던 꿈을 만화가로 바꾼 후 학원에 다녔다. ‘자신을 표현할 캐릭터를 찾아보라’는 학원 과제에 동물 백과를 펼쳤고 사람이 못 듣는 소리까지 듣는다는 토끼를 발견했다. 구 작가를 대신해 세상의 소리를 들어주는 베니가 그렇게 탄생했다. “베니가 저에게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대신 전해주는 것 같아요.”


이번 책의 여행은 그가 7년 전 적은 버킷 리스트 중의 일부다. 당시 그는 망막색소변성증 판정을 받았다. 시야가 좁아져 실명까지 될 수 있는 ‘어셔 증후군’이다.


현재 그의 시야는 8.8㎝. 구 작가는 “이 이상 좁아지면 혼자서 다니는 것조차 어려워진다고 한다. 아직 혼자서 실컷 다닐 수 있을 때, 눈이 보일 때 많은 걸 보자고 적극적으로 여행을 다녔다”고 했다. 파리 오르세 미술관 가보기 등을 포함한 그의 버킷 리스트는 발랄하다. 엄마에게 미역국 끓여드리기, 김연아 선수 만나기, 마라톤 참가하기, 나의 목소리 녹음하기 같은 것이다. 시력을 잃을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리스트를 25번까지 한 번에 써내려갔다는 그는 “설렜지만 한편으로는 아련했다. 아니 아려왔다”고 했다.


어렵고 아픈 일에 구 작가는 이처럼 밝고 명랑하게 응수한다. “저에겐 많은 성격이 있지만 주로 밝고, 수다쟁이에 엉뚱해요. 무엇보다 다른 사람들에게 웃음 주는 걸 좋아하고요.” 그는 “스트레스 받지 않고 잘 먹고 잘 자면 약이 나올 때까지 시력이 유지될 가능성이 있다네요”라고 소식을 전했다. 몇 해째 종이에 펜으로 그림을 그렸지만 안압이 높아지고 눈이 아파서 뜰 수 없을 때가 많아져 전자펜으로 작업 방식을 바꾼 그는 “지금도 쓸 책이 두 권 남아있고 이모티콘 작업도 줄지어 남아있다”고 했다. “제 그림과 책을 보는 분들이 편안하고 즐겁고, 함께 용기를 냈으면 좋겠어요.”


김호정 기자 wisehj@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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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8.07원문링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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