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희빈 남자'만은 아니었다···절대군주 숙종 둘러싼 오해

[컬처]by 중앙일보

[강혜란의 사소한 발견] 조선조 정통성의 끝판왕, 숙종의 카리스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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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자는 적통을 이은 대군입니다. 원자를 살려놓으신다면 이 나라가 큰 혼란에 빠지게 될 겁니다. 왕위를 이을 자는 한 명이어야 합니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 ‘킹덤’ 시즌2의 마지막회(6화)에서 좀비떼와의 혈투가 끝난 뒤 대신들이 세자 창(주지훈)에게 하는 말이다. 만신창이가 된 궁에서 의녀 서비(배두나)가 보호하고 있던 ‘이복동생’ 원자를 살려두면 후환이 닥치리라는 간언이다. 그러나 서자 출신의 창은 적통을 이은 대군이야말로 전란과 역병으로 어지러운 나라를 수습할 적임자라며 자신이 물러난다. 원자를 둘러싼 의혹과 별개로 그 자신이 얼마나 정통성 콤플렉스에 시달렸는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킹덤’도 ‘더 킹’도 적장자 콤플렉스 반영


이 정통성의 요체는 적장자 즉, 정실 부인에게서 난 첫째 아들이 왕위를 계승한다는 원칙이라 하겠다. 적장자 콤플렉스는 킹덤 속 ‘피의 서사’에서만 주요한 게 아니다. 입헌군주제 평행세계를 가정한 SBS 드라마 ‘더 킹’에서도 큰아버지 이림(이정진)으로부터 위협당하는 황제 이곤(이민호)의 적통성이 향후 갈등의 키워드로 떠오를 전망이다. 이들 드라마는 모두 유교 중심의 조선 왕실이 배경이다. 결국 적장자 승계 원칙이 종종 피바람을 일으켰던 조선 역사 자체가 이 같은 상상력의 모태다.


그런데 [사소한 발견]이 왕가 계보를 들춰보니 의외로 조선 임금 중에 적장자 출신이 드물었다. 태조부터 순종까지 총 27명의 왕 가운데 정비(계비 포함) 소생의 맏아들로 왕위에 오른 국왕은 문종·단종·연산군·인종·현종·숙종‧순종 등 7명에 불과했다. 특히 유일한 왕후에게서 난 외아들로 후계를 다툴 이가 없던 경우는 6대 단종(재위 1452-1455)과 19대 숙종(재위 1674~1720) 뿐이다. (여기에 순종을 추가할 수도 있다. 순종은 고종과 명성황후의 둘째 아들로, 첫째 원자는 돌을 못 넘기고 사망했다.) 이 가운데 단종은 작은아버지 수양대군(세조)에게 왕위를 찬탈당하고 노산군으로 강등당한 뒤 죽임을 당했으니, 숙종은 라이벌 없는 정통성을 과시하며 왕위와 천수를 누린 유일한 조선 임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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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간 한국 대중문화에서 숙종은 주로 인현왕후와 장희빈의 엇갈린 운명 속에서 궁중정치에 휘둘리는 군주로 비쳐졌다. 실제 영화와 드라마에서도 상대적으로 부드러운 이미지의 미남 배우들이 주로 연기했다. 영화 ‘장희빈’(1961)에서 김지미를 상대한 김진규를 필두로 신성일‧유인촌‧강석우‧임호‧전광렬‧지진희 등이 대표적이다. 2013년 ‘장옥정, 사랑에 살다’(SBS)에선 타이틀롤 김태희를 상대로 유아인이 숙종으로 변신했다.


하지만 역사학자 및 왕실 연구 전문가들은 이 같은 스테레오타입이 오해라고 주장한다. 숙종은 불과 13세에(1674년) 부왕이 승하하자 섭정 체제도 없이 바로 왕위를 물려받았다. 타고난 정통성은 신하들을 모두 물갈이하는 수차례 환국(換局)에도 흔들림 없는 왕권의 버팀목이 됐다. 두 차례 전란이 남긴 상흔 속에 부국강병을 기치로 왕실 전통을 재정비하고 경제 활성화와 안보 강화에 힘썼다. 그의 46년 재위 기간은 영조(52년)에 이어 두 번째로 길다. 1392년 건국돼 1910년 한일 강제병합으로 멸망한 조선 왕조 오백년사에서 손꼽을 만한 절대군주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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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왕 중 두번째로 긴 46년 재위


지난 6일 이를 뒷받침하는 전시회가 개막했다. 서울 경복궁 내 위치한 국립고궁박물관 1층 기획전시실에서 열리는 ‘숙종대왕 호시절에’라는 이름의 테마전이다. 신종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인해 개막이 예정보다 늦춰진 가운데 숙종의 치세와 치적을 돌아보게 하는 유물을 한자리에 모았다. 숙종 치세를 ‘호시절’로 표현한 것은 19세기 유행한 한글 소설에서 숙종 재위기를 태평성세로 그린 경우가 많기 때문이라고 한다. 전시회를 준비한 김재은 학예연구사는 “구전설화 속에서 숙종은 축지법으로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하면서 민생의 어려움을 직접 해결해 주려고 한 훌륭한 임금으로 등장하기도 한다”고 소개했다.


전시회 첫 머리엔 숙종의 이름 후보를 적은 종이가 놓여 있다. 현종2년(1661년) 정비인 명성왕후 김씨가 낳은 원자(훗날 숙종)를 두고 순, 경, 영 3개의 후보가 올랐고 이 가운데 ‘순(焞)’을 택해 그 위에 점을 찍었다. 순은 ‘불이 성하다’ ‘광명을 밝히다’는 뜻을 담고 있다. 원자 이후에도 명성왕후는 세 딸 명선‧명해‧명안 공주를 낳았지만 아들은 더 없었다. 현종은 후궁조차 두지 않아 후사는 이걸로 끝이었다. 원자 순은 6세 때인 현종8년(1667년) 왕세자에 책봉됐고 입학례와 관례(1669년), 가례(1670년)를 치른 뒤 1674년 8월 조선 제19대 왕으로 등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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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같은 자신감일까. 숙종은 재위 기간 조선 왕실의 적통성을 확립하고 왕권을 강화한 군주로 평가된다. 왕실의 족보인 『선원계보기략』, 선왕의 글과 글씨를 모아 간행한 『열성어필』과 『열성어제』 등이 본격적으로 편찬된 때가 숙종 시절이다. 또 잊혔던 왕실 인물들을 재평가하고 추숭(追崇)했다. 태종 이방원에 의해 잠시 허수아비 임금 노릇을 했던 공정대왕(恭靖大王)에게 정종(定宗, 재위 1398~1400)의 묘호를 올린 것도 숙종이다. 특히 노산군으로 강등됐던 단종의 지위를 되돌렸는데, 이는 사육신의 지위 회복과 맞물려 ‘왕에 대한 신하의 충절’을 보여주는 사례로 왕권 강화에 활용됐다고 한다. 이에 따라 『노산군일기』로 남아있던 실록도 『단종대왕실록』이란 이름을 찾았고 이번 전시에도 공개됐다.



왕실 족보 편찬하고 어진 제작 되살려


숙종기의 왕권 강화 노력을 잘 보여주는 또 다른 사례가 어진(御眞, 임금의 초상화) 제작 확립이다. 원래 조선 임금 대부분은 어진을 제작하는 전통이 있었고 특히 창업주인 태조 어진은 몇 차례 모사됐다. 하지만 임진왜란 때 궁궐들이 피해를 입으면서 어진들 대부분이 소실됐고 제작 체계까지 무너지는 지경에 이르렀다. 신재근 학예연구사는 “전란기 선조와 인조는 물론이고 이후 효종, 현종까지 어진을 그렸다는 기록조차 없다”면서 “숙종은 다시 이를 확립함으로써 이후 조선 후기 국왕들은 재위 기간이 짧았던 경종을 제외하고 모두 어진을 제작했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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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장희빈과 인현왕후가 서로 사랑을 두고 다퉜던(혹은 다퉜다고 묘사돼온) 숙종은 과연 어떻게 생겼을까. 숙종의 어진 도사(圖寫, 왕을 직접 보고 그림)는 1695년과 1713년 두 차례 거행됐다고 기록에 전한다. 이 중 1713년의 익선관본(영희전 봉안)을 모본으로 한 모사가 몇차례 이뤄졌다가 이 중 전해진 2점이 1921년 창덕궁 신선원전에 봉안되었다. 이를 포함해 창덕궁, 경운궁 등에 봉안된 조선 왕들의 초상화는 해방 무렵 총 48점이 전해졌다.


그런데 한국전쟁 와중에 이를 보호하기 위해 부산으로 가져갔던 게 다시 서울로 복귀되지 않은 상황에서 1954년 인근에서 번진 불이 보관창고를 덮쳤다. 두루마리 상태의 어진들을 포함해 임금들의 친필인 어필, 역대 재상들을 그린 초상화, 궁중일기 등 유물 4000여점이 대부분 잿더미로 변했다. 숙종 어진 역시 1점은 아예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숙종 어진으로 추정되는 한 점이 2/3가량 불에 탄 채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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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아 있는 것은 위의 그림이다. 붉은 곤룡포를 입고 교의자에 앉은 모습의 전신상 어진이다. 표제 부분을 포함한 오른쪽이 3분의2 가량 소실돼 얼굴이 전혀 남아있지 않다. 다만 학자들은 바닥에 깔린 화문석 등을 근거로 제작 연대를 숙종 대로 추정하고 있다. 화문석을 그려 넣은 순조 이전의 어진으로는 숙종, 영조, 정조 어진이 있는데 이 중 익선관본은 숙종과 영조의 어진이며 곤룡포에 나타나는 양식이 18세기 초의 특징을 보이고 있다는 점 등에서다.



'장희빈의 남자' 넘어 부국강병에 힘써


다만 추정에 불과한 데다 형체를 거의 알아볼 수 없다는 점에서 이번 전시 유물엔 포함되지 않았다고 한다. 선대의 격렬했던 예송 논쟁을 마무리하고 신권에 흔들리지 않는 왕권을 확립했으며, 상평통보를 발행하고 대동법을 전국적으로 시행한데다, 북한산성을 새로 쌓아 도성과 수도 방비를 탄탄히 하고 백두산정계비를 통해 조선과 청의 국경을 획정한 19대 임금의 얼굴은 이렇게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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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그의 글씨는 뚜렷이 전해진다. 1694년(숙종 20) 왕의 글과 글씨를 모아 보관하는 ‘규장각’이 생겼기 때문이다. 애초 규장각 설립 구상 자체는 세조 대로 거슬러올라가지만 실현되지 못하다가 숙종에 이르러 왕실 업무를 관장하던 종부시(宗簿寺)에 소각(小閣)을 세워 규장각이라 이름 지었다. 규장각은 1776년(정조 즉위년)에는 창덕궁 후원에 새로 지으면서 학술과 정책을 연구한 관서의 역할로 발돋움했다. 이번 전시회에 공개된 ‘규장각’이라는 현판은 숙종의 글씨를 새겨 만든 것으로 알려진다.


강혜란 기자 theothe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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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8.07원문링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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