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오래] 상추·오이와 도란도란 대화, 도시에선 모르는 즐거움

[라이프]by 중앙일보


[더,오래] 송미옥의 살다보면(140)

밤색이던 나무에 초록색 옷을 입혀준 5월도 어느새 절반이 넘어가고 있다. 고양이도 한 몫 거든다는 농번기다. 신기술 농법으로 사계절 바쁜 곳도 있지만, 보편적으로 싹을 틔우고 모종, 모판을 옮겨 심는 기간이 지금이다.


내 텃밭에도 이것저것 심었다. 낯선 곳으로 옮겨져 움츠려 있던 모종이 비가 온 뒤 땅심을 받아 꼿꼿한 자태를 보여준다. 뿌려놓은 씨앗도 삐죽삐죽 올라온다. 한 알의 씨앗이 땅에 품어져 땅을 가르며 솟아나는 걸 보노라면 경외심이 든다. 그들 사이로 ‘나도 꽃’이라 아우성치며 자라는 많은 풀…. 그들도 살아남으려 용을 쓰지만 인간의 잣대로 잡초로 분류되어 바로 제거당한다.


색색 선명한 봄꽃이 눈을 호사시키며 농번기를 알린다. 평생을 업으로 한 사람도 해마다 농사를 시작할 땐 두렵다. 올해는 코로나19 사태로 더 힘들다. 일손을 못 구해 애태우는 부모님을 위해 자식들이 와서 거드는 모습이 보인다. 오죽하면 초등학교 수업시간에 ‘5월 5일은 무슨 날인가?’ 하니 시골 학생들은 ‘고추 심는 날’이라고 했을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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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오면 비가 와서 바쁘고, 안 오면 안 와서 바쁜 지금이라, 쉬는 날엔 산책하러 나갈까 말까도 늘 망설인다. 70~90대 어르신들이 기역자 허리를 하고 일하시니 처음엔 안타까운 마음에 도와준답시고 함께했다가 반나절 거들고도 며칠을 끙끙거렸다. 안 하던 일을 함부로 덤비면 정말 힘들다. 다음부터는 요령이 생겨서 쉬는 날엔 적당한 시간에 간식거리를 들고 가서 아주 조금만 거들다가 약속이 있다며 뺑소니친다. 속된말로 밉살스러워도 모른 체하고 외면하며 다니는 것보다 낫다. 왕따를 안 시킨다. 늘 마주치는 이웃과 적당한 거리에서 인사하며 어울리는 방법이기도 하다.


농촌 사람들은 술을 많이 마신다. 몸으로 부딪치며 하는 노동일이라 엄청 피곤하다. 다음날을 위해 억지로라도 잠을 청하려면 술에 취해 자는 수밖에 없다. 옛날엔 백 평을 농사지으면 이웃과 나누고도 남았다 한다. 요즘 농사를 전업으로 하려면 기계화가 되어 최하 단위가 천 평이다. 그나마 논농사는 모든 공정을 거의 기계로 하니 더 넓다. 입농사라고도 한다. (말만 하면 기계가 다 하니까)


그래도 농사는 하늘이 반을 도와야 성공할 수 있다. 하늘 한잔 올리고 내 한잔 마시고, 땅 한잔 올리고 내 한잔 마시고. 모여서 술을 마셔야 할 핑계도 많다. 시대가 바뀐 요즘도 백 평이면 자급자족한다. 자발적 가난을 선택하면 느긋하고 풍요롭기도 할 것 같다. 정부에서 인정하는 자농업의 각종 혜택은 삼백평부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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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새 하루가 지나고 몸은 파김치가 된다. 손바닥만 한 농사를 짓는 나도 ‘밥숟가락이 안 올라간다.’ ‘다리가 풀렸다.’ 이런 엄살이 하루에도 몇 번씩 나온다. 온갖 벌레도 따라 설치니 한방 물리면 엄살은 배가 된다. 오늘도 눈가에 쏘여 퉁퉁 부었다.


저녁 9시면 티브이에서 드라마나 재밌는 볼거리로 유혹하지만, 농촌의 시간은 눈이 저절로 감기는 시간이다. 깜박 잠이 들었는데 전화가 온다. 그쪽에선 잠이 안 올만큼 무언가 힘든 일이 있나 보다. 비몽사몽 들으면서 그마저도 자장가로 바뀐다.


나이 들어 시골에서 살면 좋은 점이 많다. 작은 텃밭이라도 있으면 더 좋다. 인생살이 다들 비슷비슷하지만, 흙을 밟고 자연과 함께하다 보면 몸이 적당히 피곤해지고 잠이 잘 온다. 그래서 아이들이 다 떠나고 부부 혹은, 혼자 남았을 때 귀촌이나 귀농은 못 하더라도 주말농장이라도 분양받아서 땅과 친구 하라 권한다.


외로운 사람들이 애완동물을 기른다. 동물과 대화하며 외로움을 이겨낸다. 움직이지 않을 뿐 자연 속, 자라는 식물과의 대화도 쏠쏠히 재밌다. 고독하고, 외롭고, 우울할 때가 있어도 농번기가 되면 피곤해서 다음날로 미뤄야 한다. 오늘의 할 일을 내일로 미루지 말자고 하지만, 이것만은 미루고 미뤄도 좋은 시간이다.


작은도서관 관리실장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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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8.07원문링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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