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의 꽃’ 살인범에게 맘이 열린다? 동분서주한 이 남자 덕분

[컬처]by 중앙일보

[민경원의 심스틸러]

남다른 적응력 발휘 김무진 역 서현우

언제 어디 있어도 자연스레 녹아들어

“감정보다 행위 집중” 독특한 연기철학

카멜레온 같은 변신 어디까지 갈까 관심

중앙일보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흔히 장르물이라고 하면 떠오르는 몇 가지 공식이 있다. 의문의 사건이 발생하면 진실을 파헤치기 위해 경찰 혹은 검찰이 동원돼 범인 찾기에 나서고 수사망이 좁혀져 가면 다시 새로운 인물이 등장해 수사에 혼선을 주다가 반전에 반전을 거듭해 검거에 성공하는 것 같은. 그래야 극의 긴장감을 유지하면서도 시청자의 궁금증을 유발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tvN 수목드라마 ‘악의 꽃’은 전혀 다른 길을 택한다. 처음부터 도현수(이준기)를 범인으로 놓고 시작한다. 18년 전 스스로 목숨을 끊은 연쇄 살인마 도민석의 아들이자 아무런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사이코패스로 언제 살인을 저질러도 이상하지 않은 인물로 설정해 놓은 것이다. 살인사건 피의자로 수배 중인 그는 15년간 백희성이라는 이름으로 전혀 다른 삶을 살아왔다.


이 같은 설정은 의외의 전개를 낳았다. 범인 찾기에 몰두할 때는 보이지 않았던 범인의 삶을 들여다보게 만든 것이다. 금속공예가인 백희성이 경찰인 아내 차지원(문채원)과 딸 백은하(정서연)를 살뜰히 보살피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그가 끔찍하게 사람을 죽인 사람이라고는 상상하기 힘들다. 자신의 정체를 알게 된 고등학교 동창 김무진(서현우)이나 택시기사 박경춘(윤병희)을 대하는 모습도 그렇다. 이들만 사라지면 다시 평온한 삶으로 돌아갈 수 있을 거란 생각에 확 없애버리고 싶어 하다가도 결국 타협하는 길을 택한다. 세상은 오랫동안 그에게 ‘가해자’라는 굴레를 씌워왔지만, 그는 누구보다도 가해자의 범주에 속하길 원치 않는 것이다. 크고 작은 사건에 휘말릴수록 어쩌면 그가 진짜 ‘피해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중앙일보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중앙일보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시청자들이 살인자일지도 모르는 도현수에게 마음을 열게 된 것은 김무진의 공이 크다. 주간지 기자로 일하는 그는 백희성에게 감금까지 당했지만 그의 조력자가 된다. 사건 당일 캠코더에 찍힌 영상을 빌미로 약점이 잡혀서라고 하기엔 꽤 열성적이다. 궁금한 것이 생기면 참을 수가 없고 실체적 진실에 다가서고자 애쓰는 직업적 특성도 있겠지만, 그것만으로도 설명이 부족하다. 이 사건을 매듭지어야만 자신도 과거에서 벗어나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 거라 믿는 걸까. 그는 당사자인 도현수보다도 부지런히 움직인다. 과거 사진을 가지고 있는 할머니를 찾아가고, 당시 사건을 담당했던 형사와 술을 마시고, 사건 당일 목격자를 만나 사정한다. 조그만 단서라도 생기면 경찰보다 한발 먼저 나서 더 많은 정보를 손에 쥘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이는 김무진 역을 맡은 배우 서현우(37)가 지닌 장점과도 잘 맞아 떨어진다. ‘배우 같지 않은 배우’를 지향하는 덕에 언제 어느 곳에 있든지 그 현장에 온전히 스며드는 덕분이다. 환경미화원으로 일하는 목격자를 설득하기 위해 장소를 가리지 않고 출몰하는데 그곳이 대학교 화장실이 됐든 주택 앞 담벼락이 됐든 전혀 어색하지 않다. 그곳에 있음직한 모습이기 때문이다. 과거 TV리포트 인터뷰에서 “어떻게 하면 배우스럽지 않게 연기할 수 있을까 항상 고민한다. 요즘 시청자들은 눈이 높아서 연기 같고 가짜 같으면 싫어한다”고 밝힌 소신처럼 카멜레온마냥 완벽한 보호색을 탑재한다. “어디서나 적응력 하나만큼은 남부럽지 않다”는 김무진의 인물 설명이 괜히 나온 것이 아니다.

중앙일보

‘나의 아저씨’(2018)에서 박동훈(이선균)의 오른팔 송과장 역할을 맡아 주목받았다. [사진 tvN]

그렇다고 그를 무색무취한 배우라고 여겨서는 곤란하다. ‘자연스러움’이 곧 ‘아무것도 하지 않음’을 뜻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되려 캐릭터를 찬찬히 쌓아 올리고 다시 덜어내는 과정에서 더 많은 준비가 필요하기도 하다. 명문으로 손꼽히는 한일고 재학 시절 연극반 활동을 시작한 그는 대학 입학 1년 만에 공부를 때려치우고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에 진학했고, 연기도 학문적으로 접근했다. 2016년 텐아시아 인터뷰에서 인상 깊게 읽은 책으로 『배우에 관한 역설』을 꼽은 그는 ‘감정’보다 ‘행위’를 중시한다고 밝혔다. 상황과 대상에 집중하는 편이 보다 일관적인 연기를 끌어낼 수 있을 거라 믿는 것이다. 감정 연기에 능해야 연기력이 뛰어나다고 인정받는 세상에서 이성을 잃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배우라니, 차별화가 되지 않을 수 없다.


그를 찾는 곳도 점차 늘어났다. 2010년 뮤지컬 ‘내 마음의 풍금’으로 데뷔 이후 영화와 드라마로 반경을 넓혀오면서 지난 10년간 출연한 작품이 80여편에 달한다. 쉼 없이 작품 활동을 하면서도 디테일을 놓지 않았다. 영화 ‘그놈이다’(2015)에서 묵직한 존재감을 발휘하는 강력계 형사 역할을 위해 20kg가량 증량한 그는 OCN 드라마 ‘모두의 거짓말’(2019)에서 완벽주의자를 소화하기 위해 다시 12kg을 감량하는 등 고무줄처럼 몸무게를 늘였다 줄이기도 했다. 영화 ‘남산의 부장들’(2020)에서는 전두환 전 대통령을 모티브로 만들어진 전두혁 캐릭터를 표현하고자 삭발도 불사했을 정도. 드라마 ‘나의 아저씨’(2018)에서도 박동훈(이선균)의 오른팔인 송과장으로 인상 깊은 연기를 남겼지만, 작품마다 달라지는 인상 탓에 동일인물인지 모르는 사람도 많다.

중앙일보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시나리오 전체를 파악하는 안목을 가진 영리한 배우”(‘남산의 부장들’의 우민호 감독) 등 함께 일한 동료들의 칭찬도 쏟아졌다. ‘악의 꽃’ 제작발표회에서 이준기는 “촬영 전 주변에서 ‘서현우가 연기를 정말 잘해서 자칫하면 네가 묻힐 수도 있다’는 말을 들었다”며 “캐릭터마다 성격이 너무 달라서 실제로 어떤 모습인지 궁금했다. 변화무쌍한 매력이 있는 배우”라고 말하기도 했다. 지금 이 페이스대로라면 우민호 감독의 전작 ‘내부자들’(2015)의 히든 병기를 잇는 ‘제2의 조우진’ 같은 수식어 없이도 서현우 이름 석 자를 기억하는 이들이 많아지지 않을까. 어느 곳에 숨어들어도 눈에 띄는 존재감 넘치는 배우로 말이다.


민경원 기자 storymin@joongang.co.kr


중앙일보 '홈페이지' / '페이스북' 친구추가


이슈를 쉽게 정리해주는 '썰리'


ⓒ중앙일보(https://joongang.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2022.08.07원문링크 바로가기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 등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Copyright © ZUM internet Corp.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