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살 간호조무사에 성폭행당했다, 여성 노인 인권 사각지대 그린 '69세'

[컬처]by 중앙일보

영화 '69세'로 장편 데뷔한 임선애 감독

20대 남성에 성폭행당한 60대 여성 노인

2013년 접한 비슷한 실제 사건들 토대

"노인 여성 무성적 존재로 보는 편견 탓

사각지대 놓인 인간 존엄 그리려 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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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가 예쁘세요. 수영하셔서 그런가. 뒤에서 보면 아가씨 같아요.” 새카만 암전 화면. 젊은 남자가 초로의 여자 환자에게 추근대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인적 드문 시각의 병원 물리치료실, 간호조무사인 남자는 불편한 듯 상황을 벗어나려는 환자의 의연한 대꾸에도 추파를 멈추지 않는다. 긴장된 공기 속에 갑자기 불안한 침묵이 엄습한다.


이는 20일 개봉하는 임선애(42) 감독의 장편 데뷔작 ‘69세’ 첫 장면. 임 감독이 각본을 겸해 69세 효정(예수정)이 병원 치료 도중 29세 간호조무사에게 겪는 성폭행 사건을 바탕으로 인권 사각지대에 놓인 여성 노인의 성폭력 문제를 그렸다. 고통스런 피해 순간은 절제해서 표현하되, 그 속에 처한 효정의 분투를 와 닿도록 담아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KNN 관객상을 수상했다.



젊은 남자가 노인 여성 성폭행…비슷한 사건 많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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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차’ ‘남한산성’ ‘사바하’ 등 상업영화 스토리보드 작가로 일해온 임 감독은 2013년 우연히 여성 노인 대상 범죄 관련 칼럼을 읽고 이 영화를 시작했다. 극 중 경찰이 고민 끝에 신고한 효정을 오히려 치매로 의심하고, 법원이 나이 차를 근거로 구속영장을 기각하는 등의 설정들도 여러 실제 사건이 토대였다.


“‘젊은 남성이 나이든 여성을 성폭력 했을 개연성이 부족하다’. 비슷한 실제 사건에 대한 법원의 구속영장 기각 사유를 영화에 그대로 차용했죠. 처음엔 이 사건이 특이한 줄 알았는데, 이런 경우가 많더군요.”


17일 중앙일보에서 만난 임 감독의 말이다. 그는 “20대뿐 아니라 30대, 40대가 70~80대 노인을 한 마을에서 연이어 (성폭행)한 사건도 있었다. 사별하거나 가족과 떨어져 지내는 여성 노인은 방범에 위험하게 노출돼, 더 쉽게 타깃이 되더라”고 했다. “우리 사회가 ‘노인’과 ‘여성’을 분리하고 그들을 무성적인 존재로 보는 편견 때문에 피해자들은 신고할 용기조차 못 냈다. 가해자들이 바로 그 점을 악용해 타깃으로 삼는다는 데 경악했다”면서다.



한국에서 여성이란 '기본값', 예비 피해자라 느껴


도입부는 구상 초기부터 암전 처리하기로 결정했다. “기존 성폭력 소재 영화들처럼 사건을 재현하고 피해자 고통을 전시하듯 보여주지 말자는 목표”였고, “자칫 예민한 장면에서 의도치 않은 선입견을 관객이 갖게 될까 봐, 최대한 차단하고 싶었”단다. 또 “한국에서 여성으로 살다 보면 어렸을 때부터 가까운 누군가로부터 이게 성폭력인지 아닌지 모르게 당해오다 결국은 불편한 상황까지 가게 되는 경우가 많더라. 그런 상승하는 공포의 상황을 들려주고 싶었다”고 했다.


하필 69세로 정한 건 “중년과 노년의 경계선의 나이”여서다. “예전엔 할머니라고 생각했는데 60대가 된 어머니를 보니 중년 같았고 나이에 대한 선입견으로 구분지었다는 것을 깨달았다”면서다.


“친구들과 모여 살면서 단 한 사람 ‘미투’한다면 누굴 할 것 같아, 얘기하다 보니 공교롭게도 선생님이 많았어요. 그 선생님이 남아서 저 말고 다른 아이들에게도 계속 그런 거죠. 단 한번의 우연한 가해는 없다는 말이 있잖아요. 저도 아이가 있는 아줌마지만, 길 가다가도 겁이 날 때가 있어요. 과거에 비슷한 상황에 놓인 공포심, 트라우마 때문이죠. 여성이라는 기본값 때문에 여전히 예비 피해자란 생각이 드는 거예요. 69세 효정도 나와 비슷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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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아직까지 노인 여성의 (성폭행) 피해 사례를 이야기한 영화가 외국에도 없었다”고 강조했다. “영화는 세상의 감시자 역할을 하는 부분도 있잖아요. 누군가 한번이라도 더 관심 갖고 들여다볼 계기가 된다면, 피해자들이 발언하고 용기 냈으면 하는 마음, 영화로나마 그분들을 구하고 싶은 마음으로 영화를 만들었죠.”



'노인다움' '피해자다움' 벗어던진 69세 효정


효정은 강단 있는 캐릭터다. 의지할 가족 없이 간병일을 하며 살지만, 남들에게 무시 안 당하려 옷을 차려 입고 수영으로 몸을 단련하고 정갈한 자세를 유지한다. 사회가 정해놓은 ‘노인다운’ 틀에서 벗어나 있을뿐더러, ‘피해자다움’에서도 비켜나 있다. 수치심에 절망하기보단 경찰의 비웃음 섞인 추궁에 담담히 증거를 내밀고 잘못된 건 당당히 꼬집는다. 성폭행 사건을 안 누군가가 “조심 좀 하시지” 하자 “뭘 어떻게 조심해요” 일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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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신과함께’의 말 못하는 엄마, 드라마 ‘검색어를 입력하세요 WWW’의 대기업 총수 등 변신을 거듭해온 예순다섯 배우 예수정이 연기했다. “100세 시대에 예순은 오히려 한참 새로운 것을 학습하고 지적인 능력이 무르익을 때다” “아무리 나이든 노인도 가시에 찔리면 아파하는 한 명의 인간이다. 생생하게 살아있는 감각, 그리고 자신을 아프게 하는 가시를 뽑으려는 노력 그 자체가 중요하다” 등 그의 철학이 영화에 배어난 부분도 많다. 임 감독은 특히 예수정이 “60평생 살아온 여성이 성폭행당했을 때 그건 수치심보다 자존심이 상하는 문제다. 나를 약한 존재라고, 함부로 대해도 된다고 무시한 것에 화가 난다”고 말한 것을 듣고 “명치를 얻어맞은 기분이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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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에서 성폭행 후유증을 효정의 일상에 꾹꾹 눌러 담은 이유다. 효정에겐 가족에 대해 오랫동안 짊어져온 고통이 있고, 그는 감정을 겉으로 드러내는 인물도 아니다. 사건 당일 물리치료기기의 불빛, 간호조무사의 말, 살갗을 스치는 무언가가 조금만 연상되도 심장에 가시가 돋듯 소스라치게 놀라지만, 그는 절대 울지 않는다.


“영화제에서 효정이 왜 한 번도 울지 않느냐는 관객도 있었어요. 저는 곳곳에 효정의 감정을 충분히 다뤘다고 생각하지만 익숙한 힘겨움의 표정이 없다고 느끼셨던 것 같아요.”



영화 속 젊은 세대 부정적으로 그려진 이유는


효정의 유일한 조력자론 동거 중인 동갑내기 시인 동인(기주봉)이 있다. “노인을 주인공으로 등장시키면 관객들이 외면한다며 변호사나 활동가 등 젊은 조력자를 만들라는 말을 들었지만, 중요한 건 효정의 변화였고 효정과 동인이 무력감을 느끼면서도 그들(노인) 스스로 명예를 지키기 위해 나아간다는 점이었다.” 임 감독이 사전 인터뷰에서 들려준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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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성폭행 가해자뿐 아니라 경찰, 무단횡단하는 효정을 칠 뻔한 운전자, 병원 간호사 등 젊은 세대의 캐릭터가 대부분 불친절하고 폭력적으로 그려지는 점은 영화의 현실적인 균형감을 깨트리기도 한다. 이에 임 감독은 “일부러 설정하진 않았지만, 저 자신도 같은 세대로서 죄책감이 커서 그랬나보다. 올해 69세 되신 아버지한테도 늘 잘해드리진 못했던 것 같다”고 돌이켰다.


“노인·여성·성폭력을 다루지만, 인간 존엄 문제죠. 노년 사회를 바라보는 편견과 시선을 확장하고픈 바람이 컸어요. 예수정 선생님이 큰 역할을 하고 계시는데, 지금은 영화·드라마에서도 중장년 여성 캐릭터가 넓어지고 있잖아요. 나이 들어 억세고 거칠어진 전형적인 어머니, 할머니의 모습에 국한되지 않죠. 노인 여성은 왜 한 면만보여왔을까. 현실 여성은 다층적이잖아요. 그처럼 한 여성의 온전한 삶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나원정 기자 na.wonje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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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8.07원문링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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