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반대한다" 진보 아이콘 긴즈버그, 이루지 못한 꿈 하나

[이슈]by 중앙일보

긴즈버그 美 연방 대법관 암 투병 중 사망

양성평등 개척자, 美 두번째 여성 대법관

타자수로 일하다 임신해 일자리마저 잃어

女입학 불허 군사학교 패소 판결 이끌어

"호의 안 바래…우리 목에서 발을 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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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 앞에 양성평등을 개척한 선구자이자 미국 두 번째 여성 연방 대법관인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가 18일(현지시간) 수도 워싱턴 자택에서 별세했다. 향년 87세.


법률 전문가였을 뿐 아니라 진보주의와 페미니즘의 상징, 문화의 아이콘으로 대중적으로 큰 인기를 누린 긴즈버그 사망 소식에 미국 전역에 추모 열기가 퍼지고 있다.


긴즈버그는 1970년대에는 법대 교수이자 변호사로서 여성 권리를 찾기 위한 대법원 소송에서 잇따라 승리하며 두각을 나타냈다. 1980년 지미 카터 대통령 지명으로 연방 항소법원 판사 임관 후에는 법원 안에서 양성평등과 소수자를 위한 판결을 이끌었다. 1993년엔 빌 클린턴 대통령 지명으로 연방 대법관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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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27년간 연방 대법관으로 일하면서 기념비적인 판결문을 남겼다. 1996년 '미국 대 버지니아' 사건이 대표적이다. 대법원은 버지니아 군사대학(VMI)이 남학생만 입학을 허용하는 것은 위헌이라고 7대1로 판결했다. 3년 차 '초보' 대법관이었던 긴즈버그는 판결문에 이렇게 썼다.


"대부분 여성, 심지어 대부분 남성도 VMI의 엄격한 요구를 충족하고 싶어하지 않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주 정부가 그런 요구를 충족할 수 있는 여성을 배제할 수는 없다. 여성과 남성에 대한 광범위한 일반화로 재능과 능력이 평균을 넘어서는 여성에게 기회를 주지 않아서는 안 된다."


여성, 약자, 소수자의 편에 서는 경우가 많았던 긴즈버그는 그래서 반대의견으로 더 유명했다. 비록 최종 판결에서 자신의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더라도 훗날 판결을 바꿀 수 있는 밑거름이 되도록 반대의견을 썼다.


2000년 대통령 선거 결과를 법정에서 다툰 '부시 대 고어' 사건에서 대법원은 5대 4로 조지 W 부시 전 대통령의 손을 들어줬다. 플로리다주 표를 재검표하는 것은 합리적인 시간 안에 이뤄질 수 없다는 이유였다.


긴즈버그는 반대의견에서 "헌법적으로 적절한 재검표가 비현실적이라는 법원의 결론은 법원 자체의 판단에 대해 검증을 허용하지 않겠다는 예언이다. 그런 검증되지 않은 예언이 미국 대통령직을 결정해서는 안 된다"면서 "나는 반대한다"고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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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즈버그는 1933년 뉴욕 브루클린에서 태어났다. 롤모델이었던 어머니는 고교 졸업식 하루 전 암으로 사망했다. 17세에 명문 코넬대에 전액 장학생으로 입학했다. 대학에서 남편 마틴 긴즈버그를 만났다. 긴즈버그는 "내게도 뇌가 있다는 것을 존중해 준 사람"이어서 남편에게 매력을 느꼈다고 한 인터뷰에서 밝혔다.


졸업 후 결혼한 두 사람은 남편의 군 복무지인 오클라호마주로 이주했다. 긴즈버그는 공무원 시험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뒀지만, 타자수로 일할 수밖에 없었고, 임신하자 그 일자리마저 잃었다고 미 공영라디오 NPR이 전했다.


1958년 하버드대 로스쿨에 입학했다. 동급생 500명 가운데 여성은 9명이었다. 교수로부터 "왜 남학생 자리를 차지하고 있느냐"는 소리를 들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남편 역시 하버드 로스쿨에 재학 중에 고환암에 걸렸다. 긴즈버그는 세 살짜리 아이를 키우며, 남편 투병과 학업을 도왔다. 남편이 구술하면 논문을 받아 써서 완성한 뒤 밤새 자기 수업 준비를 했다고 한다. 먼저 졸업한 남편이 뉴욕 로펌에 일자리를 얻으면서 컬럼비아대 로스쿨로 옮겨 거기서 졸업했다.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지만, 당시로선 여성이 뉴욕 로펌에 일자리를 얻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법관 서기 면접도 줄줄이 떨어졌다. 대학 시절 은사가 뉴욕법원 판사에게 '긴즈버그를 받지 않으면 우수한 학생을 보내지 않겠다'고 협박해 법관 서기 자리를 겨우 얻을 수 있었다. 1963년 럿거스대 로스쿨 교수로 교편을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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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즈버그는 영리한 방법으로 법 앞에 양성평등을 추구했다. 변호사 시절 여성이 아닌, 남성이 손해를 보는 사건을 맡아 남성 판사들의 공감을 끌어내는 전략을 썼다. 예컨대, 유족 연금은 배우자인 여성만 신청하게 돼 있는 법 때문에 아내가 숨진 뒤 유족 연금을 받지 못하는 남성 사건을 맡아 성 평등적 판결을 끌어내는 식이었다.


아들이 초등학교에 다닐 때 말썽을 피워 학교에서 전화를 숱하게 받았다고 한다. 똑같이 바쁜데 엄마인 자신에게만 학교에 와서 상담을 받으라는 요구가 계속됐다. 긴즈버그가 "이 아이에게는 부모가 둘이 있다. 번갈아 가면서 전화해 달라"고 부탁하자 학교 전화가 뚝 끊겼다는 일화도 생전에 들려줬다. 아버지에게 막상 전화하려니 그 정도로 심각한 일이 아니라는 걸 학교가 깨달았다는 게 긴즈버그의 주장이었다.


긴즈버그는 최근 20년간 암과 싸우면서도 일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1999년 대장암이 처음 발병했고, 10년 뒤 췌장암이 찾아왔다. 2018년엔 폐암 진단을 받았다. 지난해에 췌장암이 재발했으며 올해는 간으로도 전이가 된 것으로 알려졌다.


투병하면서도 승마와 패러글라이딩을 즐길 정도로 왕성한 모습을 보였다. 80대 나이에 '슈퍼 디바'라고 쓴 운동복을 입고 개인 트레이너와 웨이트 트레이닝 훈련을 하는 게 알려지면서 젊은 층의 팬덤이 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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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즈버그는 법률뿐 아니라 페미니즘의 상징적 존재였으며, 그의 삶을 다룬 전기 영화와 다큐멘터리 여러 편이 나올 정도로 문화계에서도 대중적인 인기를 누렸다.


이름 앞글자를 딴 애칭 RBG로 불렸다. 1990년대 인기 래퍼 '노터리어스 B.I.G'를 빗대 '노터리어스 RBG'라는 별칭을 얻었으며, 캐리커처를 그린 티셔츠와 모자 등 굿즈까지 나왔다.


긴즈버그는 2018년 다큐멘터리 'RBG'에서 "나는 내 성별에 관해 호의를 바라지 않는다. 내가 우리 형제들에게 바라는 것은 우리 목에서 발을 떼는 것"이라고 말했다. 구순을 바라보는 긴즈버그의 진보적인 발언은 성 평등 주제에 민감한 젊은 여성들과의 공감대를 만들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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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숨지기 며칠 전 손녀에게 구술로 "나의 가장 열렬한 소망은 새 대통령이 들어설 때까지 내가 교체되지 않는 것"이라고 말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자신이 비운 자리에 보수 성향 대법관을 지명하지 못하도록 더 버티기를 희망했다.


이런 이유로 한때 진보 진영에서는 그가 버락 오바마 대통령 시절 퇴임하지 않은 것을 비판했다. 오바마 대통령이 후임으로 진보 성향 대법관을 임명할 수 있도록 길을 터줬어야 한다는 것이었지만 긴즈버그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긴즈버그는 지난해 인터뷰에서 90세에 사망할 때까지 연방 대법관으로 일한 존 폴 스티븐스를 거론하며 "내 꿈은 그가 했던 만큼 법정에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 꿈은 이루지 못했다.


워싱턴=박현영 특파원 hypar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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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8.07원문링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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