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시카고 뺨치는 '금란방'…영조도 혀내두른 음주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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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영조는 어느 왕보다도 엄격한 금주령을 내렸던 것으로 유명합니다. 술을 만들고 마셨다고 유배형을 내리거나 노비로 만들고, 또는 군대에 보내기도 했습니다.


“술을 빚은 자는 섬으로 유배를 보내고, 술을 사서 마신 자는 영원히 노비로 소속시킬 것이며, 선비 중 이름을 알린 자는 멀리 귀양 보내고, 일반인들은 햇수를 한정하지 말고 수군(水軍)에 복무하게 하라” (『영조실록』, 영조 32년 10월 20일)


강력한 금주령을 펼친 지 1년이 지났을 때, 술을 빚다가 잡혀 섬으로 간 사람만 700명이 넘었습니다. 술을 마시다가 적발된 숫자는 나오지 않지만, 당연히 만든 사람보다는 많았겠지요. 당시 조선의 인구수를 생각해볼 때, 주류업자만 700명을 붙잡아 간 것은 큰 파문을 일으켰음을 어렵지 않게 짐작해볼 수 있습니다.


“오늘은 금주(禁酒)를 한 지 일주년이 되는 날이다. 금주를 어겨 섬으로 유배된 자가 700여 명이나 되는데, 모두 풀어주도록 하라.” (『영조실록』 33년 10월 24일)


하지만 조선시대에 술에 대한 태도가 늘 엄격했던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조선 전기만 해도 음주에 대해서 매우 관대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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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윤복의 '주사거배(酒肆擧盃)' [중앙포토]

음주에 대한 이중적 시선


조선시대 술에 대한 인식은 이중적이고 모순적이었습니다. 성리학의 영향으로 술에 대해 엄격했을 거라고 상상하기 쉬운데 실상은 그 반대였습니다. 조선은 성리학의 영향으로 국가의례나 조상에 대한 제사를 지내는 걸 중요하게 여겼는데 이때 술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주례(酒醴)라고 하지요.


반면 불교 영향이 강했던 고려시대엔 한데 어울려 차를 마시는, 음다(飮茶)의 문화가 있었습니다. 이것이 조선시대로 오면서 음주로 바뀐 것이지요. 즉, 특별한 행사에 음주를 곁들이는 문화가 사회 전반에 퍼지고, 본격화된 것은 조선시대라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국가적으로 술을 권장한 것만은 아닙니다. 조선 초기에도 금주령이 있었습니다.


조선은 농업국가였기 때문에 곡식의 흉년이 들 때면 자연스럽게 술에 대한 규제로 이어졌습니다. 쌀이나 곡식을 술로 만들면 식량이 더욱 부족해지기 때문이죠. 다만 조선 전기의 금주령은 빠져나갈 ‘구멍’이나 틈도 많았습니다.


예를 들어 조선의 첫 금주령은 태조 2년(1393년)에 시행됐는데, 왕실 행사나 제사 등 예외조항을 많이 뒀음에도 일주일 만에 해제됐습니다. ‘중국 사신이 와서 접대해야 한다’는 외교적인 이유와 ‘날씨가 춥다’는 게 그 이유였습니다. 당시엔 술이 중요한 방한(防寒)도구였던 셈이지요.


'음주운마(馬)'를 막기 위해 가마를


뿐만 아니라 태조 이성계는 음주에 대한 처벌에서도 관대했습니다. 그것은 이성계의 배경에서 유추해볼 수 있습니다. 그는 한반도에서 가장 추운 지역 중 하나인 함경도 영흥 출신이기도 했고, 무장(武將)이었습니다. 아무래도 술을 가까이하는 생활에 익숙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겠죠. 그래서 그는 금주령 기간에도 “무릇 사람으로서 병이 있는 자는 혹여 술을 약으로도 마시게 되는데 일괄적으로 명령을 어겼다고 죄를 가하는 일이 옳겠는가?”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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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 이성계. [사진제공=문화유산국민신탁]

또한 이성계는 자신의 생일잔치에 왔다가 술에 만취한 채 돌아가던 홍영통이라는 대신이 말에서 떨어져 사망하자, 자신의 심복들이었던 조준, 정도전 등에게 가마를 하나씩 보내기도 했습니다.


만취했을 때는 말 대신 가마를 타고 가라는 배려였던 것이죠. 지금으로 치면 음주운전을 막는 대리운전을 추천한 셈입니다. 즉, 안전 귀가 걱정은 내려놓고 마음껏 술을 마시라는 메시지로도 해석됩니다.


이성계의 아들 이방원은 한술 더 뜹니다. 그는 왕이 된 뒤, 금주령을 내리고는 “생원시 합격자 발표 후 3일 동안은 술을 금지하지 말라”는 특별 명령을 내립니다. 생원시는 과거시험의 기초단계인데, 합격하면 성균관에 입학할 자격이 생깁니다. 지금으로 치면 대입 수학능력시험인데, 생원시 합격 발표 후 3일간은 일종의 신입생 OT 기간이니 축하하며 술을 좀 마시게 두어도 괜찮지 않겠냐는 의미겠죠.


“새로 들어온 생원을 축하하는 것은 오래된 풍속이니, 3일 동안은 하고서 그침이 마땅하다.” (『태종실록』, 태종 17년 2월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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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죽교에서 정몽주를 암살한 일이나 1ㆍ2차 왕자의 난 때문에 과격한 무장의 이미지가 강하지만, 이방원도 고려 때 성균관을 나와 문과에 급제한 엘리트 출신이었습니다. 아마도 자신의 성균관 시절을 떠올렸을지도 모릅니다.


아무튼 금주령은 조선에서 특별한 이벤트는 아니었고, 여러 차례 실시됐습니다. 다만 대개 1~2년을 넘지 않았고, 적용도 느슨했습니다.


영조는 왜 엄격한 금주령을 내렸나


그렇다면 영조는 왜 이렇게 강력한 금주령을 내렸을까요.


여러 추측이 나오고 있는데, 일단 영조가 매우 검소하고 자기 절제에 충실한 사람이었다는 점을 꼽습니다. 83세에 사망한 영조는 자신의 장수비결로 ’채식과 적게 먹는 습관‘이라고 꼽았을 정도였습니다.


한편으로는 출신에 대한 콤플렉스 때문이라고도 합니다. 그는 궁녀의 몸종인 각심이의 아들이었다고 하죠. 그래서 행여나 사대부들에게 얕보이진 않을까 경계도 많았다고 합니다. 이런 이유로 그는 스스로에게 엄격했고, 자기절제를 바탕으로 금주령도 강력하게 밀어붙일 수 있었던 것이죠.


심지어 태조 때의 전례를 떠올리며 “중국 사신이 오면 술을 대접해야 하는데 어떻게 하냐”는 신하들의 걱정에 영조는 “우리의 특별한 사정을 잘 설명하고, 감주(甘酒)로 드려라”는 답변을 내놓기도 했습니다. 한 치의 예외도 두지 않으려 했습니다.


이 같은 왕의 의지에도 불구하고 저항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영조가 “모두 풀어주도록 하라”고 명을 내린 날(영조 32년 10월 20일)로부터 불과 한 달 뒤에 형조판서(지금의 법무부 장관) 김상익이 “금주령을 어겨 술을 빚다가 갇힌 죄수가 무려 100여 인에 달합니다”라고 보고했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한 영조의 반응은 기록되지 않았습니다만 아마도 큰 한숨을 쉬지는 않았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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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작용도 있었습니다. 왕이 사는 서울 중심가에선 밀주를 만들어 파는 비밀 공간도 생겼습니다. 관리들은 돈을 받고 뒤를 봐주기도 했고 심지어 직접 운영도 했습니다. 그래서 이를 막는 금란방(禁亂房)이라는 단속기구도 만들어졌지요. 1920년대 금주령 시대 미국 시카고의 마피아 뺨치는 부정부패 커넥션이 발각된 셈이죠.


그렇다면 이 금주령의 결말은 어땠을까요. 결국 영조는 금주령 시행 10년 만에 슬그머니 규제를 풀었습니다. 사관은 이렇게 남겼습니다.


“(왕은) 형조에 명하여 술을 빚는 자를 처벌하고 주점을 금지했다. 그러나 마침내 능히 금할 수 없었다.” (『영조실록』, 영조 46년 1월 26일)


술에 대한 규제가 어려운 것은 요즘도 다르지 않습니다. 얼마 전 음주운전 사고를 당해 치킨 배달을 하던 50대 남성이 사망하는 안타까운 사건이 있었습니다. 정부에서 ‘윤창호법’을 만드는 등 음주운전에 대한 강력한 의지를 보였지만 좀처럼 이런 문제가 근절되지는 않고 있습니다.


오히려 올해 상반기 음주운전 사고 건수는 지난해보다 13.1% 늘었습니다. 윤창호법 시행에도 사고 건수가 늘어나는 기현상이 벌어진 것이지요. 그래서 이번 사고를 통해 음주운전을 적극적으로 막지 않은 동승자도 강하게 처벌하는 식으로 법을 고치자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습니다.


하지만 조선 영조 때 금주령의 실패에서도 봤듯이 법안을 아무리 엄하게 해도 시민 모두가 스스로 공감대를 갖고 협조하지 않으면 기대만큼의 실효성은 없는 게 사실입니다.


그러니 엄벌에 처하는 것만 기대할 것이 아니라 음주운전은 다른 사람의 목숨을 빼앗을 뿐 아니라 패가망신하게 된다는 메시지를 늘 염두에 두는 교육이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유성운·김태호 기자 pirat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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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8.07원문링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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