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인니 왕회장도 가짜였다" 치밀한 8억 대사관 이전 사기

[이슈]by 중앙일보

주한 인도네시아 대사관 이전 사업권 투자사기

피해자 “한국인 2명에 8억5000여만 원 뜯겨”

인도네시아 정관계 인사들 친분 과시해 접근

현지 6선 국회의원 한국 방문해 사업 약속도



“인도네시아 대사관 성남 이전 사업권 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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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네시아 국회의원, 대통령 친척이 도와주겠다니 철석같이 믿었죠.”


12일 충북 청주에서 만난 정모(55)씨는 “극비리에 진행된다던 주한 인도네시아 대사관 이전 사업에 수억원을 투자했다가 한 푼도 받지 못했다”며 이같이 토로했다. 정씨는 청주에서 15년째 부동산 개발업을 하고 있다.


그는 “2018년 5월께 한국인 사업가 2명으로부터 ‘서울 여의도에 있는 주한 인도네시아 대사관이 곧 이전할 것이며 해당 부지에 건물을 세워 큰돈을 벌 수 있게 해주겠다’란 말을 믿고 그들에게 8억5000여만 원을 투자했다”며 “사업 자체가 허위로 밝혀졌음에도 한국인 사업가 2명은 아직 내 돈을 주지 않고 발뺌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정씨는 지난해 12월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사기)로 인도네시아에 체류 중인 A씨와 B씨를 검찰에 고소했다. 정씨는 “거액의 사기를 당해 직원 월급도 몇달째 주지 못하는 형편”이라며 “나를 속인 한국인 사업가 2명을 처벌하고 똑같은 사기 피해자가 생기지 않았으면 한다”고 말했다.



대통령 친인척 등 화력한 인맥 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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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씨가 겪은 사건의 발단은 2018년 4월 중순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한 지인에게서 “인도네시아 정치권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한국인 사업가 A씨가 있다. 그가 주한 인도네시아 대사관 이전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는 얘기를 들으면서부터다.


정씨는 “서울 여의도에 있는 인도네시아 대사관(부지면적 7934㎡) 자리에 주상복합 건물을 지을 경우 상당한 이익을 얻을 것으로 판단해 A씨를 만나게 됐다”고 했다. 정씨는 그해 4월 25일 인도네시아 자카르타로 건너가 A씨와 그의 회사 직원 B씨를 만났다.


A씨는 당시 인도네시아 6선 국회의원의 개인비서와 정부 고위 관료 등 4명과 식사 자리를 마련해 친분을 과시했다고 한다. 정씨는 “A씨가 ‘왕회장’이라 부르는 인도네시아 국회의원과 함께 찍은 사진을 보여주며 정·관계 인사들도 잘 안다고 했다. 비밀리에 추진하는 주한 인도네시아 대사관 이전 사업권을 따주겠다고 했다”고 말했다.



현지법인 설립에 허위 외교문서도 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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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씨는 그해 5월 2일 A씨의 인도네시아 사무실에서 업무협약을 맺었다. 구체적인 프로젝트명은 명시하지 않았지만 ‘정씨가 투자형식으로 A씨의 대리인 등에게 사업자금을 댄다’는 내용이다. 정씨는 “업무협약 자리에서 A씨 일행이 계약금 5000만원 외에 추가 비용 30만 달러를 요구했다. 그 돈은 대사관 이전 사업 경비로 쓰겠다고 했다”고 말했다.


정씨는 사흘 뒤 한국에 건너온 B씨와 인도네시아 대통령 처조카 사위 C씨, 정부 관료 등 5명을 만났다. A씨가 언급한 경기도 용인과 성남의 대사관 이전 부지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정씨는 이들이 국내에 머무는 동안 체류 비용을 대줬다.


20여일 뒤 정씨는 다시 B씨를 만났다. 이 자리에서 B씨는 “업무협약에 따라 사업 추진 비용 30만 달러를 달라. 이 자금은 정치인과 장관들에게 로비자금으로 사용하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이에 대해 정씨는 “업무협약 때는 로비 얘기를 꺼내지 않다가 한국에 와서는 정·관계 인사에게 돈을 돌려야 사업권을 딸 수 있다고 말을 바꿨다. 인도네시아에서 통상 진행하는 방식이라 어쩔 수 없다는 말로 회유했다”고 말했다. 정씨는 3억2600여만원을 인출했고 B씨는 이 돈을 환전해 인도네시아로 넘어갔다.



A씨, 2011년에도 같은 수법 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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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씨는 이런 방식으로 1년 2개월여 동안 8억5000여만원을 A씨와 B씨에게 뜯겼다고 주장했다. 정씨는 “대사관 이전 사업을 추진할 인도네시아 현지 법인 설립 비용과 인건비 등 운영 경비, 사업계획서 작성, 정치인들에게 줄 로비자금 등을 지속해서 요구해 그때마다 자금을 댔다”며 “유력 정치인과 고위 관료를 한국에 데리고 오거나 인도네시아에서 만남을 주선해주는 바람에 사기인 걸 의심할 수 없었다”고 했다.


정씨는 지난해 1월 B씨의 소개로 국내에서 ‘인도네시아 왕회장’과 그의 아들을 만나 “조속한 사업추진을 약속하겠다”는 답변을 받았다. 정씨는 “B씨와 함께 로비자금을 얻어간 인도네시아 대통령 처조카 사위 C씨는 대사관 부지 이전과 관련한 허위 외교문서를 보여주면서 나를 속였다”고 주장했다.


정씨는 사업이 지지부진하자 지난해 10월 초 주한 인도네시아 대사를 면담했다. 그는 “면담 자리에서 ‘대사관 이전 계획은 검토한 적이 없다’는 말을 듣고 속았다는 걸 알았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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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건을 수사 중인 검찰은 소재가 불명확한 A씨에 대해 기소중지를 내린 상황이다. B씨는 경찰 조사에서 A씨에게 책임을 떠넘겼다고 한다. 앞서 A씨는 2011년 10월 주한 인도네시아 대사관 부지에 주상복합 건물을 짓는다고 속여 피해자 7명에게 투자비 20억원을 가로챈 혐의로 구속되기도 했다.


정씨는 “사업 추진 방식이 정상적이지 않았는데 사전에 주한 인도네시아 대사관에 확인하지 않은 내 잘못이 크다”면서도 “A씨와 B씨를 하루빨리 붙잡아 추가로 사기를 당하는 사람이 없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청주=최종권 기자 choig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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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8.07원문링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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