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남궁원도 매주 몸 맡겼다, 월1200만원 벌던 때밀이 전설

[비즈]by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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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그를 인터뷰하는 건 쉽지 않았다. 우리 나이로 일흔두 살. 43년을 한 직업으로 살았는데, 장안의 높은 사람이 허구한 날 줄을 섰고 한창땐 월수입 1200만원도 찍었는데 세상의 시선이 여전히 불편했던 모양이다. 10년쯤 전부터 인터뷰를 요청했으나 매번 거절당했다.


끝내 그가 인터뷰를 승낙했다. 대신 조건이 있었다. 얼굴 드러나는 사진은 안 되고, 본인을 특정할 수 있는 일부 사실은 숨기고, 본명도 감추기로. 하여 경기도 포천 한화리조트 산정호수 안시의 ‘때밀이’ 김순철(가명·71)씨가 탄생했다. 흔히 ‘세신사(洗身師)’라 부르는 것도 알고 ‘목욕관리사’란 더 고상해 보이는 명칭도 알지만, 때밀이라 적는다. 국립국어원이 이 단어만 인정하고 있어서다. 당당히 때밀이라고 적어 이 낱말에 밴 편견과 괄시의 시선에 어깃장을 놓고 싶었다. 그리고 묻고 싶었다. 당신은 한 번이라도 타인의 지친 몸을 어루만져준 적 있는가.



1막 : 그늘에서 일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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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철씨는 1949년 전남 장성 소작농의 6남매 중 셋째로 태어났다. 지지리도 가난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했다. 대신 아버지를 도와 농사를 지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뙤약볕 아래서 일했으나 나아지는 건 없었다. 무기력했던 나날, 소원은 하나였다. ‘그늘에서 일할 수만 있다면….’


열여섯 살, 고향을 뜨기로 작정했다. 친구 5명과 상경을 작당했다. 부모가 반대하고 나섰다. 열흘 가까이 식음을 전폐하고 시위했다. 마침내 부모는 아들의 상경을 허락했다. 아들이 떠나기 전 어머니가 병아리 한 마리를 삶아 줬다. 그때 먹었던 백숙의 맛을 여태 잊지 못한다. 어느 여름날 소년은 완행열차에 올라탔다. 가방에는 책 8권이 들어있었다.


서울 삼양동의 의류공장에 들어갔다. 일손이 모자랐던 시절, 기계 돌리는 법만 익히면 일할 수 있었다. 서울 제기동 자취방에서 1시간을 걸어 출근했고, 기계 앞에 서서 꼬박 14시간을 일했다. 한 달에 하루만 쉬고 일했는데, 방값 내면 남는 게 없었다. 군대에 갔다 왔고, 아는 사람 통해 잠실 아파트단지 목욕탕에 취업했다. 1978년의 일이다.


첫 손님을 잊지 못한다. ‘김 사장님’은 초보 때밀이의 서툰 손길을 묵묵히 받아줬다. 그리고 2만원을 쥐여줬다. 차마 돈 받을 생각도 못 했는데…. 김 사장님은 이후로 긴 세월 단골이 되었다. 그때만 해도 몰랐다. 평생을 목욕탕에서 밥을 벌 줄은. 그렇다고 다른 벌이를 힐끗거렸던 건 아니다. 하루하루 살아갔을 따름이다.



2막 : 월수입 1200만원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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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실 아파트단지 목욕탕(1978) → 서울 특급호텔 사우나(1982) → 잠실 오금플라자 사우나(1990) → 한화리조트 산정호수 온천사우나(2000)


김순철씨는 사우나 업계의 전설이다. 43년간 자리를 지킨 사람도 드물거니와 80∼90년대엔 때밀이 장인으로 소문이 자자했었다. 호텔에선 정확히 매일 30명씩 손님을 받았다. 요금 4만5000원 중 1만5000원이 김씨 몫이었다. 이렇게 하루 45만원, 한 달에 1200만원이 넘는 현금이 들어왔다. 주중엔 일본인 관광객, 주말엔 정치인과 기업인이 찾아왔다.


손님 한 명당 20분이 걸리니 하루에 손님 30명을 받았다는 건 하루에 10시간씩 때를 밀었다는 뜻이다. 저녁이면 체중이 2㎏씩 빠졌다. 낮에 제대로 못 먹었던 밥을 허겁지겁 먹고 뻗으면 이튿날 몸무게가 돌아왔다. 그렇게 8년을 살았다.


지금은 그때처럼 벌지 못한다. 때밀이뿐 아니라 사우나 운영·관리도 맡았으나 수입은 한창때 절반도 못 된다. 코로나 사태를 맞은 올해는 그 절반도 안 된다. 수입이 너무 줄어 서울 집의 아내가 “두 집 살림하는 것 아니냐” 묻기도 했다. 요즘엔 주말이면 아내와 아들이 일을 도와주러 온다. 산정호수 풍경이 어릴 적 떠났던 고향처럼 편안하다.



3막 : 남북정상회담 이튿날 걸려온 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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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6월 16일 예약 전화가 왔다. 이기호 당시 청와대 경제수석이었다. 서울공항에서 출발하니 준비하라고 했다. 그는 오랜 단골이었다. 평소 뒷목이 딱딱해 다른 손님보다 시간을 더 들여 마사지했다. 처음엔 몰랐었다. 그가 평양 남북정상회담에서 돌아오자마자 달려온 줄은. 지친 기색이 역력했던 그를 보살피는 사이 긴급 전화가 들어왔다. 어깨너머로 들으니 김대중 대통령이었다. 때를 밀다 말고 그는 1시간 넘게 통화했다. 다른 손님 누구도 불평하지 않았다. 그땐 정말 통일이 되는 줄 알았다.


연예인 단골 중엔 남궁원씨가 기억난다. 얼굴을 수건으로 칭칭 감싸고 나타났다. 심지어 한쪽 눈도 가렸다. 눈에 띄는 걸 그렇게 꺼리면서도 매주 때를 밀러 왔다. 돌아간 원로 가수도 생각난다. TV에서 보이는 온화한 이미지와 달리 그는 사람을 함부로 대했다. 늘 특별한 대우를 요구했고 제 자랑만 늘어놨다. 팁은커녕 음료수 한 병도 안 사줬다. 오금동 시절, 날마다 때를 미는 어르신이 있었다. 90년 오금동을 떠날 때 83세라 했으니 지금은 돌아갔겠다.


조폭 단골도 많았다. 오랫동안 부산 칠성파가 단골이었는데 김대중 대통령이 당선하자 사우나가 하루아침에 목포파 세상으로 바뀌었다. 다들 덩치가 크고 문신이 많아서 다른 손님 눈치가 보였지만, 팁을 넉넉히 줘 고마웠다. 일본 야쿠자 단골도 있었다. 그가 나타나면 업장의 다른 조폭이 금세 사라졌다.



4막 : 장인의 루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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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른손, 왼손, 왼쪽 옆구리, 등, 오른쪽 옆구리, 앞면. 이 순서로 밀어요. 여기까지 15분 걸려요. 빡빡 미는 게 아니라 지그시 눌러줘요. 그럼 아프지 않고 피로가 풀려요. 타월 앞을 살짝 들어 꾹 누르면서 밀어줘야 해요. 다음에 비누칠하고 배 마사지를 해요. 거품 타월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100회 정도 마사지하면 2분쯤 걸려요. 다음에 등을 비누칠하고 마사지해요. 등 왼쪽과 오른쪽, 중앙을 7회씩 모두 3회 반복해서 마사지해요. 등 마사지도 2분쯤 걸려요. 다 합치면 20분이 됩니다. 왜 기억을 못 해요? 평생을 이렇게 했는데. 누구든 똑같이 했는데.”


그는 때밀이 과정을 단계별로 설명했다. 한 치의 오차도 없었다. 그런데도 “별 기술은 없다”고 말했다. 열심히, 정성껏, 성의껏. 이 단어를 수십 번 사용했다. 대기 손님이 많이 있으면 대충 할 수도 있었을 텐데, 1시간에 4명 받은 적은 없단다. 그의 작업장엔 오래전 산 손목시계가 놓여 있었다.


“요즘엔 요금을 2만원 받아요. 20분에 2만원이니 1분에 1000원꼴이잖아요. 힘들고 어려우면 ‘1분에 1000원 버는 일이다’ 생각하며 스스로 달래요.”



에필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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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는 12월 4일 온천사우나에서 2시간 남짓 진행됐다. 어렵사리 성사된 인터뷰였으나 또 다른 난관이 있었다. 12월 1일부터 시행된 거리두기 강화 조치로 사우나가 문을 닫았다. ‘목욕은 허용, 사우나·한증막은 금지’ 방침이 내려지자 한화리조트는 온천사우나 폐쇄를 결정했다. 엎친 데 덮친다고 1일 한화리조트는 김씨와의 계약을 연장하지 않기로 했다. 다음 달부터 그는 21년 근무했던 직장에서 나와야 한다. 그런데도 한 달 전에 승낙한 인터뷰 약속을 지켰다. 김씨는 “계속 일하고 싶다”고 말했다.


“평생 일만 해서, 놀 줄을 몰라요. 비행기도 안 타봤고 제주도도 못 가봤어요. 나 같은 사람은 일을 안 하면 아파요.”


목욕은 위생 활동 이전에 종교 제의였다. 죄를 씻는 의식으로 인간은 몸을 닦았다. 때를 허물이라고도 한다. 남의 허물을 벗겨주는 일처럼 신성한 노동이 또 있을까. 그가 제 일을 자랑스러워했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열심히 살았다는 건 말할 수 있다. 유난히 두툼한 그의 손을 한참 바라봤다.


손민호 기자 ploves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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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8.07원문링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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