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오래]본받고 싶은 20대 여자 골프 선수의 ‘존버’ 정신

[라이프]by 중앙일보


[더,오래] 박헌정의 원초적 놀기 본능(85)

자정부터 새벽 다섯 시까지 눈 한 번 떼지 않고 LPGA US여자오픈을 지켜보았다. 골프 실력도 시원찮은 내가 밤잠 미루며 집중한 것은 승부에 대한 선수들의 자세에 빠져들었기 때문이다.


최종라운드가 하루 늦춰질 만큼 혹독한 날씨였고, 이날도 매우 추운 것 같았다. 누구나 할 것 없이 샷이 흔들리고 퍼팅이 빗나가 버디는커녕 파 세이브도 만만치 않았다.


챔피언조의 선두 시부노 히나코와 2위 에이미 올슨은 시시각각 감정 변화가 드러나는데, 공동 9위로 출발한 한국의 김아림과 고진영 선수는 차돌처럼 표정 변화가 없었다.


추격하는 입장에서는 후반으로 갈수록 조급해져 섣부른 승부수로 낭패 볼 수도 있지만, 전혀 미동도 없이 파로 막아내며 속칭 ‘존버’하다가 막판 세 홀 연속 버디를 잡은 김아림은 자신의 우승이 확정되고서야 한꺼번에 감정을 표출했고, 고진영도 최종 홀에서 버디를 잡아 2위로 끌어올리고서야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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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완만한 하락세 속에 버티다가 역전당한 두 선수는 점점 표정이 험해졌다. 시부노는 샷 실수 후 자주 신경질 냈고 올슨은 급기야 눈물을 훔쳤다. 선두권까지 갔던 한 아마추어 선수는 더블보기 후 완전히 무너져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실력보다 정신의 단단함에서 차이가 느껴졌다.


정신력. 어릴 때부터 수없이 듣던 말이다. 어른은 공부나 입시처럼 경쟁이 필요할 때, 상황이 어렵거나 시스템이 부족할 때 늘 정신력으로 극복하라고 했다. 더는 내게 정신력을 강조하는 사람이 없게 된 시점에서야 비로소 생각해본다. 대체 그 ‘정신력’의 정체는 뭐였을까?


내가 생각한 정신력은 첫째, ‘목표를 향해 집중하는 힘’이다. 대부분 정신력이라 하면 정신을 집중해서 엄청난 에너지를 뿜어내 실력의 한계를 극복하는 것으로 여긴다. 그러니 승부가 명확한 스포츠를 떠올리고, 위험을 불사하고 저돌적으로 덤비는 걸 생각한다.


그러나 그런 정신력이 승리를 가져오는 경우는 별로 없는 것 같다. 승리를 보장하는 것은 실력이고, 정신력은 평소 연마한 실력이 제대로 발휘되도록, 자신이 허물어지지 않도록 내면에서 잡아주는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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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에 TV에서 마라톤 대회 광고를 보았다. 한 일본 선수가 탈진해 쓰러졌다가 겨우 일어나 몇 발 못 가 또 쓰러지고 다시 일어나 비틀대는 장면이었는데, 마치 인간 승리의 감동 드라마나 되듯 엄숙한 배경음악이 깔렸다.


그는 끝까지 최선을 다하려 했겠지만 내 눈에는 정신력보다 초능력을 발휘하려고 발버둥 치는 무모함이 보였다. 평소에 훈련을 더했어야지, 기본도 부족한데 그렇게 무리하는 건 책임 있는 일도 아니고 남에게 보일만 한 모습도 아니다. 깨끗이 포기한 후 치열한 반성과 준비로 완전히 바뀌는 정신력에 비하면 한 단계 낮은 정신력 아닐까.


둘째, ‘차분함을 유지하는 힘’이다. 기술이 충분한 선수가 변수나 다크호스에 맥없이 무너지는 걸 자주 본다. 심장과 근육이 터질 듯한 훈련을 이겨내고 그 자리에 섰겠지만, 상황의 무게를 이기는 힘이 부족한 것이다. 차분해져야 상황이 한눈에 들어오고 변수까지 예측하고 차단한다.


예전에 어느 축구 해설자는 중남미 선수들은 정신력이 약하고 쉽게 흥분하니까 선제골만 넣으면 쉽게 이길 거라 했다. 터무니없는 소리였다. 어릴 때부터 프로에서 수백 경기를 치른 그들은 흥분은커녕 더 차분하고 냉정해져 무섭게 몰아쳐 결국 역전시키곤 했다.


그렇다면 ‘차분하게 목표에 집중하는’ 정신력만큼 무서운 게 없다. 사회에서도 오직 한 가지 목표에만 매달리는 사람이 있다. 그런 사람에겐 능력 여하와 관계없이 매우 강한 기운이 느껴지고, 훗날 중요한 자리에 올라있음을 확인하곤 한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정신력을 부족한 상태에서 뭔가를 이룰 수 있는 특효약처럼 생각한다. 짧은 시간에 급히 발전해야 해서 그랬을까? “정신력의 반대는?” 하면 바로 “체력!” 하는 대답과 동시에, 몸의 한계를 정신으로 메꾸는 것, 힘들어도 더 버티는 것을 참된 의지로 여긴다. 그럴수록 자꾸 기본을 생략하고, 왜곡하며, 결정적으로 사람이 상하는 게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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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에서도 정신력은 효과적인 압박 수단이었다. 입시 같은 경쟁은 늘 정신력과 한 짝으로 언급되었고, 정신력은 학교생활에서 군기(軍紀) 비슷한 문화가 되어 필요 이상 남용되었다. 교련시간에 이유 모를 기합을 받으면서도 “그런 정신으로 나라를 지키겠냐?”는 질책에 찔끔해 버틸 수밖에 없었다. 체육 시간에는 아무리 해도 100m를 14초에 뛸 수 없는데 점수를 덜 주면 될 것이지 왜 이렇게 모욕 주며 괴롭히는지 원망스러웠다. 이런 게 지난 시절의 정신력이었다.


정신의 힘은 냉정함으로 표출된다. 오늘 새벽 최종라운드에서 추운 날씨에 실수가 속출해도 흔들리지 않고 더 냉정하게 자신을 제어하는 우리 선수들을 통해 확인했다.


정신력은 실력보다 앞도 아니고 뒤도 아니다. 실력과 나란히, 동시에 발휘되어야 할 힘이다. 그러니 사생 결단의 엄격하고 진지한 모습으로 포장할 필요 없다. 김아림 선수를 보니 독한 모습도 아니다. 잘 웃고 경쾌하고 정 많고, 무엇보다 자기 자신을 믿는 사람 같았다.


골프 칠 때 늘 엉망이 된 점수표를 받아들곤 하는 나로서는 깊이 생각해보고 본받아야 한다. 20대 여자 골프 선수들이 인생의 스승이다.


수필가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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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8.07원문링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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